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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희망도 절망도 불가능한

등록 2007-01-20 00:00 수정 2020-05-03 04:24

실종자가족협회 디아즈 사무국장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1976년 아버지의 실종…무장투쟁을 벌였던 남동생은 피노체트가 숨진 뒤에도 사면되지 않아 귀국하면 감옥에 가야

▣ 산티아고(칠레)=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하영식의 남미기행 ⑦

칠레 실종자가족협회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군부에 의해 체포돼 실종된 가족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만들어졌다. 3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종자를 찾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 단체의 비비안느 디아즈(55) 사무국장도 칠레 공산당 사무총장과 노동총연맹 의장을 지낸 아버지 빅토르 디아즈를 군부정권에 잃은 ‘실종자 가족’이다.

1973년 쿠데타 발발 당시 디아즈 사무국장은 21살 대학생이었다. 피노체트 집권 직후 수배를 피해 도피 생활에 들어간 그의 아버지는 1976년 5월12일 악명 높은 정보부 ‘디나’에 붙들렸다. 옛 동지의 밀고는 나중에야 알았다. 체포 과정에서 시작된 매질은 온갖 고문으로 이어졌고, 빅토르 디아즈는 ‘최악의 정치범’들이 간다는 ‘빌라 그리말디’의 독방에 내던져졌다. 혹독한 고문으로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지만, 그의 가족들은 체포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생존 소식을 알려준 동지의 갑작스런 사망

당시 디아즈 사무국장의 가족들은 모두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었다. 변호사와 함께 호세 이자기레 당시 대법원장을 면담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고문으로 죽어가고 있으니 제발 목숨만이라도 구해달라”고 하소연했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조소뿐이었다. 디아즈 사무국장은 “당시 군부에 협력했던 칠레 법원은 불법 체포된 이들을 모른 체했고, 합법적인 재판 절차도 무시했다”며 “실종된 가족에 대해 말할 때마다 ‘지나친 상상력’이라거나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되레 가족들에게 면박을 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체포된 뒤 군인들이 여러 차례 들이닥쳐 집을 뒤졌지만, 그때마다 법원이 내준 ‘합법적’ 수색 영장을 내보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아버지가 체포된 지 5개월이 지난 뒤에야 디아즈 사무국장의 가족들은 빌라 그리말디에서 풀려난 ‘동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서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디아즈 사무국장은 “소식을 전해준 분은 석방된 지 2주 만에 산티아고 북부의 바닷가에서 주검으로 떠올랐고, 그 뒤로는 한 번도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 교수였던 디아즈 사무국장의 언니는 사표를 써야 했고, 그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특히 남동생의 삶은 아버지가 체포된 뒤 극적으로 바뀌었다.

“군부는 남동생까지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돼 항상 집 주위를 맴돌았다. 당시에는 체포가 곧 죽음을 뜻했다. 당시 15살이던 남동생은 혈혈단신으로 스웨덴으로 도피한 뒤 그곳에서 10년 동안 지내다 칠레의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서 돌아왔다.” 남동생은 칠레로 돌아온 뒤 대학에 들어갔지만, 지속적으로 반피노체트 활동에 가담하다 결국 제적됐다. 그 길로 그는 당시 공산당에서 조직한 게릴라인 ‘애국전선’에 가입해 무장투쟁을 벌이다 체포된 뒤 징역 14년형에 처해졌다. 수감된 남동생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탈옥을 감행했고, 결국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랐다. 디아즈 사무국장은 “정부가 사면령을 내리지 않아 남동생이 아직 프랑스에 살고 있다”며 “피노체트가 숨진 지금도 남동생은 귀국할 경우 남은 형기를 채워야 할 판”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사진을 쓰다듬으며…

디아즈 사무국장은 인터뷰를 하는 내내 목에 걸고 있던 아버지 사진을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었다. 그에게 “아버지가 ‘실종’된 지 벌써 30여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느냐”고 물었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희망도 절망도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쓸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아버지를 포함한 실종자들의 행방(또는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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