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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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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은 없다, 명분은 있다

등록 2006-12-15 00:00 수정 2020-05-03 04:24

공식용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던 ‘솔직함’ 보여준 이라크 스터디 그룹의 보고서…79가지 이라크 정책 권고안에 현 상황을 타개할 10가지 ‘새로운 접근법’ 제시해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있다. 베이커위원회의 보고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제국의 군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자기의 법체계를 세울 수 없었다. (로마의 황제) 크라수스가 시리아-이라크의 사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지 부시도 그곳에서 제국의 깃발을 잃었다. …한때 로마의 상원에서 들려오던 ‘붕괴’ ‘재난’이란 단어가 베이커위원회 보고서에 점철돼 있다.”(로버트 피스크, 영국 12월7일치)

부시의 관용어 ‘승리’는 단 3번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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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모르겠는가? 심지어 ‘침공의 나팔수’이자 ‘점령의 집행자’ 노릇을 했던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조차 사임을 이틀 앞두고 “이라크 정책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의 메모를 남겼다. 중간선거란 정치적 격랑을 피해 ‘10인의 현자’가 뒤늦게 내놓은 정책 권고안의 내용은 워싱턴의 백악관과 바그다드의 안전지대(그린존)를 뺀 전세계에서 이미 ‘상식’으로 통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니 이제, 부시 대통령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라크 문제를 풀어낼 마술 같은 공식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상황을 진전시키고, 미국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있을 수 있다.” ‘이라크 스터디 그룹’(ISG·이하 베이커위원회)이 12월6일(현지시각) 내놓은 최종 보고서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나온 어떤 공식 보고서에서도 볼 수 없었던 ‘솔직함’이 베이커위원회의 ‘미덕’이다.

의회의 요청으로 소집돼 지난 3월 활동을 시작한 지 꼭 9개월 만에 내놓은 위원회의 보고서엔 이라크의 현황을 타개하기 위한 79가지 정책 권고안이 담겨 있다. 보고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분위기는 암울하기만 하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언급할 때면 즐겨쓰는 ‘승리’라는 단어는 84쪽 분량의 보고서에서 단 세 차례 등장했다. 그나마 세 차례 모두 ‘미국의 승리’가 아닌, 미국의 패배에 따른 ‘알카에다의 승리’를 거론할 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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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 양당의 고위급 출신 인사 각 5명씩 모두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이라크 현황에 대한 단호한 평가로 보고서를 시작한다. “미군과 동맹군, 이라크 치안세력에 대한 공격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그 횟수도 계속 늘고 있다. 지난 10월은 2005년 1월 이후 미군에겐 최악의 달이었다. 하루 평균 180차례의 공격이 이어졌고, 미군 10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라크 치안세력에 대한 공세는 더욱 불을 뿜어, 올 1월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도 올 초보다 4배가량 늘었고, 매월 3천여 명이 스러져가고 있다….”

치안 부재와 부패, 그에 따른 투자 부족과 폐허로 변해가는 사회 기반시설은 이라크의 앞날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베이커위원회는 “이라크 경제는 수십 년간 이어져온 문제들로 충격을 받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라크의 경제체제는 지난 1970년대엔 ‘경찰국가 경제’였고, 1980년대엔 전시경제였으며, 1990년대부터 미국의 침공 이전까지는 봉쇄경제였다.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 이라크 경제가 ‘정상’적으로 기능한 때가 없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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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보유고와 각종 소비재 수입 증가, 창업 열풍과 일부 지역에서 달아오르기 시작한 건축 경기 등 긍정적인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종 지표는 침공 이후 이라크 경제가 여전히 암담한 지경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보고서는 “물가상승률은 50%를 넘어서고, 실업률은 낮게는 20%에서 높게는 6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경제 상황이 실질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하루 15만~20만 배럴의 원유를 빼돌리는 관료사회의 부패가 판을 치고 있다.

“침공 총 비용 2조달러에 이를지도”

지난 3년 반 미국은 이라크의 미래를 위한 막대한 인적·물적 투자를 했다. 2006년 12월 현재 약 2900명의 미군이 이라크에서 전사했고, 중상자를 포함해 2만1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라크 전쟁 비용만도 4천억달러에 이르며, 매월 평균 전비만도 80억달러에 이른다. 베이커연구소는 “여기에 참전병사 원호와 손실 장비 대체 등 ‘후속 비용’도 수천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라며 “이라크 침공의 총 비용은 많게는 2조달러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모든 투자에도 이라크는 여전히 안정과는 거리가 멀고,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이른바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이라크 정부는 국정을 책임지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없다. 이라크인 스스로 자기들 미래를 책임질 의지도 없고, 주변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도 이라크 지원을 위한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베이커위원회가 “미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시간이 많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해법을 들어야 할 때다. 위원회가 제시하는 현황 타개의 방책은 뭘까? 위원회는 우선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수많은 방안을 주의 깊게 검토해본 결과 완벽한 해법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며 “그동안 제기된 모든 정책 대안마다 나름의 결함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전격 철군론’도, ‘현상 유지론’도, ‘병력 증강론’도, ‘이라크 3분할론’도 하나같이 ‘뾰족수’가 될 수 없다는 게다.

‘새로운 접근법’이란 이름으로 위원회가 제시한 첫 번째 권고안은 이라크 정부와 함께 현상 타개를 위한 포괄적인 외교적 노력을 조속히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6년 12월31일 이전”으로 시점도 구체적으로 밝혔다. 외교적 노력의 목적은 △이라크의 단합과 영토적 통합 유지 △불안을 조장할 수 있는 주변국의 개입 중단 △이라크 국경 안정화 △이라크 외부로 불안 상황 확산 방지 △경제 지원 및 무역·정치·군사적 지원 확대 등 10가지를 꼽았다.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변국가는 물론 이집트와 페르시아만 연안국가, 나아가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유럽연합으로 ‘이라크 지원그룹’을 구성하는 것은 이런 외교적 노력의 핵심이다. 위원회는 특히 레바논 문제로 얽힌 시리아와 핵 프로그램으로 갈등으로 빚고 있는 이란의 참여가 절대적이란 점을 강조했다. 베이커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냉전 시절 미국을 지구상에서 쓸어버리겠다던 소련과도 대화를 했다”는 말로, 이 두 나라와의 대화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미군의 주요 임무는 훈련·무장·자문으로

이라크 정부에 대한 중단 없는 지원을 통해 이라크 스스로 현상 타개 능력을 갖추게 해야 한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았다.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라크에 영구 군사기지를 건설할 생각이 없으며, 이라크 원유 자원을 통제할 의도도 없음을 재차 강조해야 한다”는 권고도 나왔다. 또 논란의 소지가 있는 현행 이라크 헌법을 재검토하고, 이라크 점령 초기에 추진했던 ‘탈바트당화’를 정치적 화해 차원에서 실천하며, 사담 후세인 정권 고위 공직자 출신을 제외한 능력 있는 공무원들의 재임용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군사전략상의 변화도 권고안의 주요 내용에 포함됐다. 군사력만으로는 이라크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베이커위원회는 이라크 주둔 미군의 주요 임무를 직접 전투 수행에서 이라크군 훈련·무장·자문·지원으로 변경할 것을 촉구했다. 현지 치안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긴 하지만, 이라크군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미군 전투 병력의 철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란 게다. 위원회는 이르면 오는 2008년 1/4분기까지는 대부분의 전투 병력이 이라크에서 철군을 마칠 수 있을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내비쳤다.

이 밖에 이라크 정유산업 인프라 확충과 재건·복구 노력 배가, 이라크 치안 인력에 대한 정보 제공 확대 등을 통한 안정화 방안도 보고서에서 중요하게 거론됐다. 요컨대 ‘마술 같은 공식’은 없지만 ‘해볼 만한 일’은 많고, 설령 이런 노력이 실패하더라도 대규모 미군이 무한정 이라크에 주둔할 수는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라크 정부가 부담을 가지고 자기 책임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이고, 미국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위원회의 권고다.

결국 ‘새로운 접근법’에 그다지 새로운 건 없었다. 보고서 작성자들이 자인한 대로 작금의 이라크 상황을 풀어낼 ‘마술 같은 공식’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보고서는 부시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수단을 제공했다. 바로 이라크 정책 변화의 ‘명분’이다. 민주-공화 양당이 추천한 인사들이 보고서 내용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니, 이보다 좋은 명분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시 대통령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그는 보고서가 발표된 다음날 워싱턴을 방문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라크 정책과 관련해) 좀더 유연하고 현실주의적인 고려가 필요하다”며 “(베이커위원회의 보고서는)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라크인의 반응 “허걱!”

“아랍어에 ‘허걱!’이란 단어가 없는 게 아쉽다. ‘허걱!’이야말로 베이커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반응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미 시사주간지 은 보고서 발표 직후 인터넷판에 올린 바그다드발 기사에서 “위원회의 보고서가 아니어도 이라크 상황이 심각하게 위험하지만 달리 해법도 없으며, 이란·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게 도움이 되며, 누리 말리키 총리 정부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라크인들은 없다”고 꼬집었다. 12월7일 이라크에선 여느 날처럼 총격전과 폭탄 공격이 이어지면서 7살 어린이와 대학교수 2명을 포함해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바그다드 외곽에선 무차별 총격을 당한 35구의 주검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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