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크스바겐 브뤼셀 공장 ‘골프’ 라인 철수 계획으로 5명 중 4명 실직 위기에 몰려…새 CEO는 2009년 아우디 A1 라인 대체를 시사했으나 대량 해고는 피할 수 없을 듯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오랜만에 맑고 쾌청한 날씨였다. 지난 11월26일 일요일, 낡고 오래된 100여 대의 폴크스바겐 자동차들이 모여 브뤼셀 시내를 함께 누볐다. 자동차나 모터사이클을 좋아하는 동호회 깃발도 눈에 많이 띄었는데, 이를테면 ‘자동차 튜너 동호회’ ‘폴크스바겐 골프 동호회’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행렬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은 흔히 ‘딱정벌레차’로 부르는 70~80년대형 ‘비틀’이었다.
해직 직원 가족까지 1만3천이 생계 위협
겉보기엔 자동차 동호회원들의 한가한 나들이쯤으로 보였지만, 행사에 참여한 ‘벨기에 딱정벌레차 동호회’ 코엔 드 스메트 회장의 일성은 뜻밖이었다. “우리는 폴크스바겐 공장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이렇게 모였다.” 행사에 참여한 한 트럭에는 “내 일자리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나붙어 있었다.
지금 벨기에에선 유럽 최대 자동차 업체인 폴크스바겐의 브뤼셀 포레스트 공장이 대규모 인력 감축을 할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11월6일 폴크스바겐이 성명을 통해 중국·러시아·인도 등 신흥 시장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서유럽 완성차 공장들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처음 발표한 데 이어, 11월20일에는 폴크스바겐 브뤼셀 공장 노조가 연방정부 노동부를 통해 회사가 인력 감축을 예정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음으로써 불똥이 브뤼셀로 튀었다. 또 이튿날에는 회사 이사회가 유럽 내 최고 인기 차종인 ‘골프’의 생산 라인을 브뤼셀에서 철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해 대량 해고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언론에서도 거의 1주일째 머리기사로 예외 없이 ‘포레스트’ 소식을 전하고 있다.
현재로선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 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노조와의 협상이 중요한 고비가 되겠지만 대세는 이미 대량 해고 쪽으로 기울었다. 브뤼셀 공장에는 총 5300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대략 5명 가운데 4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알려졌다. 즉, 기술직 노동자 3500명과 사무직 500명 등 총 4천 명이 새 일자리를 찾아야 할 처지다. 벨기에 양대 노조 중 하나인 기독노조연맹(CSC) 쪽은 해고 직원의 가족까지 합치면 약 1만3천 명이 생계에 위협을 받을 상황에 놓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을 경우의 사회적 파장을 예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지난 1997년 1월 브뤼셀 북부 소도시 빌보드에서 르노 공장이 문을 닫은 사례를 돌이켜보면 금방 추측이 되기 때문이다. 벨기에 일간지 는 르노 공장 폐업 뒤 행적이 알려진 노동자 2925명 가운데 1764명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고, 393명은 르노에 재고용됐으며, 640명은 아예 은퇴해 연금 생활자로 남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그나마 일자리를 찾은 사람들도 평균 13주간 실직자로 생활했으며, 재취업 뒤 임금도 이전 직장보다 20~30% 정도 낮아진 것으로 드러났다. 지역 경제 쇠퇴는 물론이고 드러나지 않은 무형의 것들, 이를테면 실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새 직장을 얻기 위한 노력 등은 수치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회적 손실이다.
르노 공장 폐쇄 뒤 겪은 사회적 손실
사실 이번 사태는 몇 년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돼왔다. 지난해에도 회사 쪽은 “브뤼셀 공장 노동자의 평균 노동 시간이 주당 35시간밖에 안 되면서 급료는 40시간 근무하는 독일 공장의 노동자들과 똑같이 받아간다”며 대규모 구조조정을 언급한 바 있다. 폴크스바겐의 대량 해고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접한 기 베르호프스타트 벨기에 총리는 11월21일 성명을 내어 “지난해 이뤄진 구조조정과 공장 혁신으로 브뤼셀 공장은 유럽 다른 공장들에 비해 가장 생산력이 높은데 이를 폐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독일 본사의 정책은 (독일 공장을 먼저 살리고 기타 유럽 공장은 배제하는) 국익에 따른 것으로 생각한다”고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좀더 신중한 입장이다. 집행위원회는 “어려운 때일수록 더 책임 있는 태도로 최선의 관행을 찾아줄 것”을 촉구하는 중립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물론 일부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다. 벨기에 출신으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개발 및 인도주의 원조 담당 집행위원인 루이 미셸은 11월26일 국영TV 에 출연해 “이번 폴크스바겐 사태는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것”이라며 “보호주의는 특혜를 원한다”고 말해, 사실상 회사 쪽 조처를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체코 출신의 블라디미르 스피들라 고용 및 사회적 권리 담당 집행위원은 11월23일 폴크스바겐 독일 본사에 직접 보낸 편지에서 “사회적 충격에 대비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뜻을 전하며 신중한 자세를 취해줄 것을 당부했다.
대량 해직 사태의 서막이 열렸지만, 희망의 불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폴크스바겐 계열 아우디 최고경영자(CEO)인 마틴 윈터콘은(그는 2007년 1월1일부터 폴크스바겐 CEO를 맡을 예정이다) 독일 시사주간 과의 인터뷰에서 브뤼셀에서 철수하는 ‘골프’ 생산라인 대신 곧 공개될 예정인 새 모델 ‘아우디 A1’을 대체 라인으로 투입해 브뤼셀 공장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물론 여기에는 “노조가 타협안을 내놓아야만 할 것”이라는 단서가 붙었다고 은 전했다.
그러나 문제점은 여전히 남는다. ‘아우디 A1’ 생산라인이 들어올 경우 구제될 수 있는 인력은 고작 1500명가량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4천 명의 해고 인력 중에 1500명만 구제된다면 인원 선정 작업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생산 가능 시기는 2009년쯤이나 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그때까지 남는 인력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다. 윈터콘은 이 문제를 노조와 벨기에 당국에 넘겼다. 그는 언론을 통해 “조만간 기 베르호프스타트 벨기에 총리를 만나 2009년에 아우디 생산라인을 가동하기까지 벨기에 정부가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마련해줄 대책이 무엇인지 물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책 마련은 노동자와 사회의 몫으로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베르호프스타트 총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는 총리실 관계자의 말을 따 “총리는 폴크스바겐의 노조 및 회사 관계자들과 다양하게 접촉하고 있으며,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반면 노조 쪽은 의 보도에 대해 일단은 긍정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기독노조연맹의 파스칼 반 코우엔베르그 의장은 “폴크스바겐으로부터 차분히 공식 입장을 기다리겠다”며 “또 유럽철강 노조 대표들과의 회동에서 이 문제를 의논해보겠다”고 밝혔다.
어떤 식이 되든 대량 해고와 실직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느냐는 노동자와 사회의 몫이다. 벨기에인들의 관심은 여기에 있다. 11월26일 폴크스바겐 시가 행진에 참석한 드 스메트 딱정벌레차 동호회장은 “오늘 행사가 큰 것을 이뤄낼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4천 명을 해고하겠다고 밝힌 독일 본사의 결정에도 변화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폴크스바겐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연대 의지는 충분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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