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군이 동원된 타이 친위쿠데타의 희한한 풍경, 몇달 전부터 이상기류 감지… 무슬림 출신 손티 장군의 남부 무슬림 진압작전 거부도 계기로 작용했다고
▣ 방콕=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나른한 금요일 오후,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렇다. 교통지옥으로 악명 높은 그 길들은 여전히 막히고, 조금 지쳐 보이면서 움직임이 빠른 수도 시민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다. 시장도, 백화점도, 은행도, 관공서도 모두 보통 때처럼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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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탱크 몇 대가 정부청사 들머리에 앉아 있고, 몇몇 군인들이 주요 길목을 잡고 있지만, 어디에도 긴장감은 없다. 탱크마다 장미꽃이 꽂혀 있고 시민들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어대고 있다.
제압은 안 당했지만, 자유롭지도 않은
쿠데타 3일 뒤, 방콕은 그렇다. 호기심을 갖고 신문이나 방송을 굳이 좇지 않는다면 쿠데타는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쯤이나 될 정도다. 잔뜩 ‘기대’를 안고 몰려들었던 외신들도 그림 없는 풍경 탓에 헛물 켜고 빠지는 모양새다.
쿠데타 세력들이 쏟아내는 포고령도 시민들에게 그리 압박감으로 와 닿는 내용들이 없다.
‘5명 이상 정치적 집회 금지’ ‘언론사의 자율적 검열’ 같은 조항이 눈에 거스를 뿐, 전통적인 쿠데타 세력들이 날렸던 살벌한 포고령에 비한다면 만만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포고령 제5호 ‘학생들의 정치행위 참여를 인정하며 학생들의 정치개혁에 대한 의견을 환영한다’는 매우 이색적인 조항마저 들어 있고 보니.
어쨌든 1932년 서양식 교육을 받은 일단의 청년 장교와 관료들이 쿠데타로 왕정을 뒤엎고 입헌군주제를 설립한 뒤부터 따져 공식적으로만 17번씩이나 쿠데타를 경험한 타이 시민사회는 15년 만에 다시 등장한 18번째 쿠데타에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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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통한 서양식 민주주의만이 다는 아니다. 민주주의란 건 색깔과 모양과 성격이 각기 다르다.” 진보적 정치관을 펼쳐왔던 티띠난 퐁수디아락 교수(출라롱콘대 정치학)는 간접적으로 이번 쿠데타를 지지했다.
“내가 짐을 챙겨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게 이번 쿠데타와 그 전 쿠데타의 차이다.” 1947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핀 춘하완 장군 손자로, 또 1991년 쿠데타로 쫓겨난 찻차이 춘하완 총리 아들로 기구한 정치적 운명을 지닌 채, 입바른 소리로 사회운동 진영을 대변해왔던 전 상원의원 끄라이삭 춘하완은 “탁신이 저지른 권력 남용, 인권 유린, 부정부패가 이번 쿠데타의 뿌리다”며 현실론을 들이댔다.
탁신 정부의 정치놀음을 제압하지 못한 한쪽 책임자들인 제1야당 민주당 총재 아비싯 자지와나 전 민주당 의원이자 외무장관이던 수린 핏수완 같은 이들도 “민주당은 원칙적으로 쿠데타를 인정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탁신 정권이 언론을 장악한 채 남용했던 권력구조를 달리 해체할 방법은 없었다”고 실토함으로써 쿠데타 현실을 인정했다.
이처럼 쿠데타 발생 뒤 3일 동안 만나 취재했던 정계·학계·사회운동 진영 사람들은 저마다 에둘러 이번 쿠데타를 용인했다.
“타이 언론은 알아서 긴다”
언론사들도 거들고 나섰다. 방콕 시민 81.6%를 비롯해 타이 전역에서 83.98% 시민들이 이번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대대적으로 퍼뜨렸다. 현재 언론은 쿠데타 세력들에게 제압당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유를 구가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임을 놓고 보면 그런 여론조사 결과가 순수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비록 수도 방콕에서 마주치는 시민들 반응이 대체로 이번 쿠데타에 호의적이긴 하지만, 쿠데타 이틀 만에 기껏 2019명을 표본대상으로 삼아 전화로 조사한 결과를 곧이듣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탁신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유권자 1300만 명이 모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 볼 수도 없고.
“허니문 기간이라고 보면 되겠지. 쿠데타 세력의 정체를 아직은 속단하기 힘든 상태니….”
정치적 변혁기마다 진보 진영을 대표했던 방콕의 유력 영자신문 의 기자 프라윗은 편집책임자들이 특별한 검열을 하지는 않지만 “알아서 기는 상태”라고 현실을 비꼬았다.
이런 가운데, 쿠데타 감행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푸미폰 국왕이 이례적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육군총장 손티 장군의 혁명위원회 격인 입헌군주 내 민주개혁위원회(CDRM)를 추인함으로써 이번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완성된 셈이다. 그 나머지는 탁신이든 정부든 뭐든 할 것 없이 모조리 이미 역사가 되고 말았다. 현재 타이 사회에서 국왕에게 직접 반기를 들고 도전할 만한 인물이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시민들로부터 호감까지 얻은 이번 쿠데타는 잘 짜인 한 편의 정치극으로 기록될 만도 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직 이번 쿠데타의 성공을 낙관하기 힘들다는 조심스런 분석들도 나돈다. 끄라이삭 춘하완 전 상원의원처럼 일부 전문가들은 “탁신의 성격과 그 열광적인 지지자들 그리고 ‘10기’들”을 들며 카운터 쿠데타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물론 타이 현대정치사를 들춰보면 쿠데타에 카운터 쿠데타까지 튀어나와 정치판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경우가 허다했고, 특히 탁신이 군과 경찰 요직에 박은 예비사관학교 동기들인 이른바 ‘10기’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동안 탁신은 실질적인 군 동원력을 지닌 그 ‘10기’들의 충성을 배경 삼아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해왔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10기’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확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탁신 후원하던 10기들은 어디로 갔나
그러나 군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면 탁신의 카운터 쿠데타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거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미 탁신이 믿었던 그 ‘10기’ 가운데 일부는 손발이 모두 잘린 채 고립돼 있고, 일부는 결정적인 순간에 군대를 따르며 쿠데타군에 합류해버린 상태다.
특히 ‘10기’ 출신으로 탁신의 수호대라 자타가 공인했던 제2기갑 사단장 사닛 쁘롬맛 소장, 보병 제1사단장 쁘린 수와나다트 소장 그리고 대공사단장 루앙삭 통디 소장은 쿠데타 거사일인 9월19일 오전 손티 장군을 지원하는 병력 이동을 일상적인 훈련으로 여겼다가 일찌감치 제4기갑대대 병력 앞에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머지 ‘10기’ 충성파들도 모두 쿠데타군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10기’ 출신이면서 그동안 탁신을 반대해왔던 1군사령관 아누뽕 중장은 이번 쿠데타에 주력군을 끌고 손티 장군을 지원했다. 이 대목은 그동안 군 인사에서 압도적 특권을 누려왔던 ‘10기’들 사이에도 반탁신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던 소문을 현실로 드러낸 지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쿠데타는 타이 전군이 동의한 인상마저 강하게 풍기고 있다. 탁신의 출신지이자 정치적 요새인 타이 북부를 거점 삼은 제3군 사령관 사쁘랑 깔라야나미트 중장도 적극적으로 병력을 동원해 방콕 외곽을 차단하며 쿠데타를 지원했다. 그리고 타이 최대 갑부이자 총리였던 탁신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주며 포퓰리즘을 살포했던 제2의 정치적 고향 동북부를 거점으로 한 제2군사령부도 쿠데타군에 가세했다. 전통적인 반탁신 지역이자 무슬림분리주의 분쟁을 겪어온 남부 지역 주둔 제4군사령부도 손티 장군을 지원했다. 참고로 타이 역사에서 최초로 무슬림 출신 육군총장이 된 손티 장군에 대한 남부 무슬림 주민들의 기대는 남달랐다. 실제로 손티 장군은 탁신의 무력적인 남부 무슬림 진압작전을 거부한 채 ‘대화’를 강조하며 탁신과 마찰을 빚었고, 그 과정에서 탁신에게 받은 수모감이 이번 쿠데타 감행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군 내부 관계자들 말을 빌리면, 공군총장 차릿 뿍까숙 장군은 처음부터 쿠데타 계획에 핵심적으로 참여했지만, 탁신의 아내로 불리며 정치판을 휘둘렀던 포트자만과 가까운 해군총장 사티라판 께야논트 제독과 친탁신 경찰총장 꼬윗 왓따나는 마지막 순간 쿠데타군에 동참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번 쿠데타 과정은 탁신의 ‘10기’ 우대에 불만을 품은 ‘6기’ 출신 육군총장, 공군총장, 해군총장의 연대감이 중요한 뒷심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군 내부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타이 군부 내에서 유일한 카운터 쿠데타 세력이 될 만한 ‘10기’들은 이미 전멸했다고 보아도 지나침이 없을 듯싶다. 게다가 병력동원 능력을 지닌 중간 간부급들이 모두 지난 6월 군 인사이동 때 손티 장군의 손을 거쳐 임명된 인물이라는 사실도 카운터 쿠데타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줄여놓는 요소다.
추밀원 원장 쁘렘의 문지방이 닳더니…
이렇듯 타이 정치판의 미래를 진단해볼 수 있는 카운터 쿠데타의 가능성을 또 하나 결정적으로 제압해버리는 요소가 있다. 바로 입헌군주에 대한 충성이 이번 쿠데타의 가장 중요한 밑감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손티 장군이 쿠데타 뒤 조직한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입헌군주 내 민주개혁위원회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번 쿠데타는 처음부터 왕실 보호를 내건 ‘친위 쿠데타’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미 쿠데타설이 나돌던 몇 달 전부터 왕실 의사를 대변해온 추밀원 원장 쁘렘 띤수라논다 전 총리 집의 문지방은 국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각 군 지휘관들로 북적였다. 돌이켜보면 반탁신운동이 한창 달아오르던 2월부터 쁘렘은 정변의 핵심에 서왔던 인물이다. 타이 시민사회와 군으로부터 존경받아온 정치가인 쁘렘은 반탁신운동 진영이 국왕에게 탁신 추방을 탄원하는 창구 구실을 해오면서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반탁신 기운을 신장시켜왔다. 그리고 두어 달 전 그이가 느닷없이 군복과 베레모를 착용하고 사관학교 연설대에 서서 ‘군의 왕실보호 의무’를 강조할 때부터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손티 장군, 제1군사령관 아누뽕 중장, 공군총장 차릿이 사전에 쁘렘 추밀원 원장에게 의사를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친위 쿠데타설’에 무게가 실렸다. 물론 타이 사회나 언론이 그런 불경스런 표현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해서 9월19일 밤부터 시민 앞에 등장한 쿠데타군은 노란 머플러를 목에 둘렀고 또 총구와 탱크 포신에도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달아 국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과시했다.
현실적으로 타이 사회에서 신성을 지닌 국왕에 도전할 만한 세력은 없다. 말할 나위도 없이 지금까지 타이 현대사에서 국왕의 권위를 넘보는 이들이 살아남은 적도 없다. 그게 군인이든 종교지도자든 정치가든 누구든 간에. 이 명백한 사실을 놓친 탁신은 처음부터 잘못된 계산을 좇아온 꼴이다. 타이 최대 갑부로서 의회와 군부, 경찰, 언론까지 모조리 장악했던 탁신으로서는 지금까지 타이에서 그 어떤 정치가도 군인도 지녀보지 못했던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스스로 ‘환상’을 키워왔던 셈이다. 탁신은 포퓰리즘을 좇아 근본적인 정치적 모순을 통해 권력을 키우면서부터 이미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말았다. 2001년 탁신이 집권하면서 타이에는 흔치 않는, 특별한 세계사적 사건이 벌어져왔다. 타이 최대 자본가인 탁신은 눈에 띄게 돈을 뿌리면서 지방 빈민층의 폭발적인 지지 기반을 확보해 왕실과 대척점에 섰고, 오히려 진보세력들은 방콕 중산층에 기대어 반탁신을 외치면서 왕실을 좇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자본가와 빈민층이 묶였던 정치적 모순
말하자면, 자본가와 빈민층이 하나로 그리고 진보세력과 중산층이 다른 하나로 묶인 희한한 정치적 모순이 결국 탁신을 국왕에게 도전하는 인물로 만들어내면서 9월19일 쿠데타를 통해 결판나고 만 것이다.
이번 쿠데타를 통해 타이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정체는 여전히 왕실 아래 있는 피상적인 도구임이 분명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롭게 등장한 쿠데타 주역들과 시민사회가 어떻게 왕실 ‘아래서’ 재결합하느냐는 절차적 문제일 뿐이다. 쿠데타 세력들이 정치적 욕망을 접고 순조롭게 권력을 민간에게 넘긴다면 이번 쿠데타는 타이 현대정치사에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겠지만, 그 장군들이 길을 거꾸로 걷게 된다면 14년 전 1992년의 그 잔인한 핏빛 기억들이 다시 한 번 현실 속에 되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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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0일 랏차담런 녹 육군본부 강당에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내외신 기자 200여 명 앞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기자회견은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쿠데타 주역들과 기자들은 첫 만남이라 서로 ‘낯가림’을 하는 건지 긴장한 듯했고, 결국 질문도 대답도 민숭민숭하게 이어지며 약 25분 만에 기자회견이 끝났다. 쿠데타 주역들의 허파를 뒤집어놓을 만한 날카로운 질문은 고사하고, “신공항을 일정대로 오픈할 것인가?” 같은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심지어는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을 두고 “당신이 왜 민주개혁위원회 의장직을 수락했는가” 같은 이상한 질문까지 튀어나와 판을 깼다.
이 기자회견장에는 입헌군주 내 민주개혁위원회(CDRM) 의장 손티 육군총장을 중심으로 제1부 의장 루앙롯 마하사라논드 합참의장, 제2부 의장 사티라판 께야논트 해군총장, 제3부 의장 찰릿 뿍빠숙 공군총장, 제4부 의장 꼬윗 왓따나 경찰총장 그리고 사무총장 위나이 빠따리야 장군이 배석했다.
얼마 동안 임시총리직을 수행할 작정인가.
=2주다. 그 기간 동안 임시헌법 초안을 다듬을 것이다.
누가 그 초안을 다듬을 것인가.
=전문가 명단을 추리고 있는 중이고, 우선 위원회 의장을 뽑을 계획이다.
누가 다음 총리가 되는가.
=국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해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중립적인 인사를 찾고 있다.
누가 이번 쿠데타의 뒷심이었나.
=상황이 우리가 쿠데타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아무도 우릴 사주한 적 없고, 우린 시민들의 소리에 귀기울였다.
탁신의 재산을 동결할 것인가.
=법에 따라 범법자는 처벌받을 것이지만, 아직 그걸 다룰 위원회는 결성하지 않았다.
만약 탁신이 망명정부를 수립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건 미래에 결정할 일이다.
민주개혁위원회는 해외에 머물고 있는 탁신 정부 장관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일부는 귀국을 종용했다. 그들이 돌아온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민주개혁위원회는 일시적인 권력 장악을 보장할 수 있는가.
=2주 동안만 일을 하고 그 뒤엔 물러날 것이다.
민주개혁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임기를 얼마 동안 허락할 것인가.
=가능한 한 단축할 것이며 길어야 1년 정도가 될 것이다.
언제 당신은 쿠데타를 기획했나.
=이틀 전이다.
부총리 칫차이 와나사띠댜는 구속한 상태인가.
=우린 그이를 구속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그이를 만나자고 초대했을 뿐이다(현재 칫차이부총리는 육군본부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찻차이 부총리가 당신들의 초대를 자발적으로 수락했나.
=그렇다고 확신한다.
탁신 정부에서 문제가 된 연례 군 인사이동 계획은 민주개혁위원회가 처리할 것인가.
=아직 그 문제를 논의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 계획은 몇 가지 다시 점검해볼 생각이다.
다음 총선은 언제쯤으로 예상하고 있나.
=새 헌법 초안 작성은 1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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