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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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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협약은 너희랑 상관없어”

등록 2006-06-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3년여 투옥됐던 아프간 출신 파슈툰 형제와의 만남…“짐승같은 대접 속에 34명이 고문으로 숨져… 미치지 않기 위해 시를 썼다”

▣ 페샤와르=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턱수염을 길게 기른 파슈툰 사람들을 중심으로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테러리스트’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관타나모에서 석방된 파슈툰을 아는 듯했으나 얼버무렸다. 그는 “(아프간 국경지대인) 페샤와르로 가서 수소문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괜히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기 싫어하는 눈치였고, 파키스탄 정보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인구 400만의 대도시인 페샤와르로 가서 알아보라는 건 서울 가서 김 서방을 찾으라는 얘기와 마찬가지였다.

“파키스탄 정보부가 우릴 팔아넘겼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 전쟁을 피해 100만 명 이상의 아프간 난민들이 페샤와르로 모여들었다. 파슈툰족은 한때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던 탈레반 정권의 주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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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성전(지하드)의 기치를 내걸고 미국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페샤와르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지역의 소도시 디르에서만 1만 명의 ‘용사’가 아프가니스탄의 전장으로 달려갔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페샤와르는 여전히 반미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도시였다. 페샤와르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아프간 남부 지역에서는 최근에도 탈레반과 미군이 교전을 벌였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페샤와르까지도 전쟁의 총성이 들리는 듯했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모든 사람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다닐 정도로 전운이 감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관타나모에서 석방된 아프간 출신의 파슈툰 형제를 만날 수 있었다. 동생은 3년, 형은 3년 반을 복역했다. 형 도스트(44)는 시인으로, 동생 바드르(36)는 언론활동을 통해 현지 아프간 사람들 사이에선 꽤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들이 사는 집에는 외국 취재진이 인터뷰를 하러 온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많은 친지들이 관심을 갖고 모여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동생 바드르가 “그들이 우리를 미국에 팔아넘겼다”며 탄식조로 말했다. 그는 “우리를 증오하는 파키스탄 정보부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거짓정보를 흘렸다. 그들이 우리가 오사마 빈 라덴과 연결됐다고 밀고하는 바람에 관타나모까지 가는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이들이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로 이주해온 것은 1980년대 말 아프간 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도스트와 바드르는 소련의 침공에 맞선 지하드에 참전했던 ‘무자헤딘’ 출신이다. 전쟁이 끝난 뒤 형제는 파슈툰 민족의 통일된 독립국가를 꿈꾸며, 3개의 월간지를 발행하는 한편 출판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이들의 활동은 파키스탄 정부의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파키스탄의 영토를 한 부분 떼어갈 ‘분리주의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9·11 동시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미국에 대항해 싸우다 잡힌 무슬림이나 알카에다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해 관타나모에 세운 포로수용소에 가뒀다. 이 일을 처리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조직이 바로 파키스탄군 정보부였다. 도스트와 바드르 형제도 파키스탄 육군 정보부에 의해 체포됐다.

‘빈 라덴’과의 관계를 되풀이해 취조

“지금까지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2001년 11월17일 자정 무렵이었다. 순식간에 파키스탄군 정보부 소속 차량 6대가 에워싼 뒤 군사작전을 벌이듯 우리 집을 점령한 뒤 집 안에 있던 남자들은 모두 체포해갔다.

큰형과 우리 그리고 손님 한 사람, 이렇게 넷을 체포해갔다. 큰형과 손님은 열흘 뒤에 풀려났다. 당시 정보부에서 우리 집을 수색하면서 귀중품과 현금, 값어치 있는 것들은 모두 쓸어갔고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우리는 출판사업과 보석상을 겸하고 있었는데, 보석과 현금을 합쳐 약 30만달러어치를 압수해갔다.” 파키스탄 정보부는 당시 압수해갔던 현금과 귀중품들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형제는 페샤와르에 있는 파키스탄군 정보부에 끌려간 뒤 두 달간을 완전히 고립된 채 독방에서 지냈다. 이들은 매일 파키스탄군 정보요원들에게 뭇매를 맞으며 조사를 받았다. “투옥된 지 일주일이 지나면서 미국인들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빈 라덴’과의 관계를 되풀이해 물었다. 빈 라덴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미국인들은 우리가 빈 라덴을 위해 일한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파키스탄군 정보부의 감옥에서 80여 일을 보낸 뒤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기지로 이송됐다.

이송될 때 다리에는 쇠사슬이 감겼고 두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두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진 상태로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비행기 안에서도 꼼짝달싹할 수 없게 수갑으로 몸을 고정시켰고, 군용견까지 그들을 향해 계속 짖어댔다. 바그람에 있는 미군기지의 감옥으로 이송된 형제들은 혹독한 추위와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도스트는 “바그람에서는 정신적인 고문을 주로 당했다. 우리 눈앞에서 미군들은 의도적으로 이슬람 성서인 코란을 던지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들은 바그람 미군 교도소에서 2주를 보낸 뒤 칸다하르에 있는 미군기지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살인적인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바드르는 “내 인생에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 곳이고, 갇혀 있는 동안 아프간 사람 34명이 고문으로 죽어나갔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다”며 치를 떨었다.

미군 병사들은 가혹한 구타와 잠 안 재우기, 천장에 매달기 등의 고문들을 자행했다. 그들은 체포된 수감자들을 향해 “더러운 테러리스트”라고 불렀고, “너희는 인간이 아니니 인권도 없다”는 말을 내뱉으며 뭇매를 가했다. 포로의 권리를 규정한 ‘제네바 협정’도 무용지물이었다. “제네바협약은 인간에게나 해당되지 인간이 아닌 너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만 수없이 들어야 했다. 도스트는 “때리고 고문했던 미군 병사들은 우리가 정말로 빈 라덴과 결탁한 사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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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반년을 파키스탄과 아프간에서 보내고, 2002년 5월1일 이들은 다시 비행기에 태워졌다.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손발이 묶이고 눈은 가려졌고, 기내 벽에 수갑 찬 손을 고정했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이었다. “장시간의 비행이었는데 (미군 병사의 말에 따르면) 터키에 착륙했고 몇 시간 그곳에 머물다가 다시 이륙했다”고 말했다. 관타나모까지 24시간 이상 비행했지만, ‘테러리스트’들에겐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3년 지나서야 ‘아주 우스운 재판’

도스트 형제는 수용소에 도착한 뒤 곧바로 제1캠프에 수용됐다. 바드르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 대해 긴 설명을 시작했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7개의 캠프로 이뤄졌다. 외부에 공개된 오렌지색의 죄수복을 입은 수감자들은 1, 2, 3캠프에 수용됐는데, 그들은 조사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곳의 수감자들에게는 항상 취조와 고문이 뒤따른다.” 관타나모에서 가해진 구타와 고문은 아프간의 미군 감옥보다는 강도가 덜했다. 이미 한 차례 ‘걸러서’ 왔기 때문에 취조를 해봐야 더 나올 게 없는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관타나모에선 직접적인 매질보다 지능적인 고문이 주로 사용됐다는 게 형제의 설명이다. “두 시간에 한 번씩 감방을 옮겨 전혀 잠을 잘 수 없게 만든다. 가장 힘든 고문은 15시간가량을 찜통처럼 무더운 곳에 방치한 다음 다시 사나흘 동안 강한 에어컨을 가동시키는 곳으로 옮겨 추위에 떨게 만든다. 이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대부분 병이 들어 자리에 드러눕게 된다.”

제4캠프는 조사 단계에서 무죄로 판정받은 사람들이 수용된다. 형제는 조사 단계에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뒤 이곳으로 옮겨졌다. 미군 병사들은 “당신들은 결백이 증명됐다”는 말로 수감자들을 위로하는 척했다. 그럴 때마다 “결백하다면 석방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면 “지금 죄수들을 호송할 비행기를 제작하는 중”이라는 농담만 반복했다.

관타나모에서는 결백이 증명됐다고 석방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석방될지 모르고 마냥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애가 탄다.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보통 사람이 견디기는 여간 힘겨운 게 아니다. 당연히 많은 재소자들이 정신적으로 병들게 된다. 도스트는 “제4캠프에 수용된 이미 무죄가 증명된 사람들은 300명이 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수감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들 형제도 이곳에서 1년 반 이상을 보내야 했다.

관타나모기지에 수감된 이른바 ‘테러리스트’들은 재판이라는 절차가 생략된 채 붙들려 있는 상태다. 바드르는 단 한 번도 재판을 받은 적이 없고, 형 도스트는 수감된 지 3년이 지나서야 ’아주 우스운 재판’을 받았다. “법정에서 모든 절차를 생략한 채 군 법무관이 ‘당신은 무죄’라고 한마디하고는 재판을 마쳤다”는 것이다. 국제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압력에 마지못해 형식적인 재판을 시도했던 것이다.

“제5캠프는 테러범으로 유죄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수감된다. 우리가 수감됐을 당시 제5캠프에 45명이 갇혀 있었다. 물론 이들이 테러나 다른 범죄를 저질렀다는 물증은 전혀 없다. 그저 미군 당국에서 이들을 테러범이나 다른 범죄자로 단정했을 뿐이다.” 수용소 안에서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도 이곳에 수감되곤 했다는 게 도스트의 설명이다.

제6캠프는 주로 조직의 지도자를 비롯한 거물급이 수감된다. 이곳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있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제7캠프는 죄가 없는 것으로 판정된 수감자들이 1주일에 한 차례, 네 시간씩 머물 수 있도록 허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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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 및 운동 시설이 갖춰졌고, 수용소 안에서 가장 경비가 느슨한 곳이라고 형제는 입을 모았다. 영어에 능통한 바드르는 이곳에서 미군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7개의 캠프 말고도 지하에 비밀캠프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군 병사들조차도 출입이 제한된 비밀감옥으로 미군 병사들은 이곳을 ‘캠프 아메리카’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

미군 고위 장교여, 시를 돌려달라

인터뷰 말미에 형 도스트가 “끝으로 꼭 할 말이 있다”며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언젠가 미군 고위 장교가 와서 우리가 쓴 글을 보겠다며 써놓은 시를 압수해가서는 돌려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당시 쓴 시를 돌려받고 싶다.” 끝 모르게 이어지는 복역 기간에 형제들의 영혼을 지켜준 것은 시를 쓰는 일이었다. 시인인 도스트는 “당시 관타나모에선 40~50명이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다. 비참한 현실이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미치지 않기 위해 시를 써나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지금 미군 감옥과 관타나모에서 겪었던 일을 회고하는 책을 써나가고 있다. 헤어질 무렵 도스트는 당시 자신이 쓴 시의 일부를 들려주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육체의 어두운 내부에서 심장이 박동하듯/ 철창 안이지만 삶은/ 여전히 박동을 지속한다/ 용기와 명예를 버린 자들은/ 자신들만의 자유를 생각하지만/ 그들은 노예다/ 나는 생각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 비록 철창 안일지라도/ 나는 그들보다 자유롭다.”



다시 폭발한 ‘잊혀진 전쟁’


탈레반 은신처 습격한 미군, 아프간군에는 대량으로 무기 공급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땅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는 언제쯤 찾아올까? 2001년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크고 작은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아온 아프간에서 또다시 참극이 빚어졌다.
지난 5월21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 사이 미군은 탈레반 ‘잔당’이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시 외곽 아지지 마을을 겨냥해 강력한 공습을 단행했다. 작전을 마친 뒤 현지 미군 당국은 성명을 내어 “탈레반 잔당 20여 명을 사살했고, 6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며 ‘전과’를 밝혔다. 하지만 외신들은 미군기가 폭격을 퍼부은 곳은 “이슬람 학교와 흑벽돌로 지은 주택가”였으며, 이날 공습으로 적어도 17명의 민간인이 애꿎은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ap>은 5월22일 “미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고 있는 아지지 마을 부근에선 최근 일주일 새에만 아프간 무장세력과 미군 등 다국적군 병사, 민간인 등 모두 286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2004년 12월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주권정부’가 들어섰지만, 탈레반은 남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회복해가고 있다. 도처에서 미군과 탈레반 사이의 유혈 충돌이 이어지면서 이라크 침공과 함께 ‘잊혀진 전쟁’이 돼버린 아프간에선 지금도 전쟁 아닌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뿐 아니라 아프간 역시 미국에는 빠져나오려 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어가는 수렁이 돼버린 것이다.
이 때문일까? 미군 폭격기가 아지지 마을을 난타하던 날, 영국 일간 는 흥미로운 보도를 내놨다. 미 국방부가 아프간군에 막대한 양의 무기를 공급하기 위해 이달 초 러시아 군수업체와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는 차기 미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할 경우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것에 대비한 조치라는 게 이 신문의 지적이다.
‘AK-47 자동소총용 탄화 7800만 발, 로켓추진수류탄 10만 발, 전차포탄 1만2천 발….’ 는 “미 국방부가 러시아 국영 무기중개업체 로소보론에 의뢰한 군수품은 약 4억달러 규모로, 이 정도의 물량은 영국군이 한 해 필요로 하는 양의 15배에 이른다”고 전했다. 신문은 한 군수업계 관계자의 말을 따 “실제 주문량은 다소 변동이 있겠지만, 가격 협상이 마무리되고 관련 최종 계약을 맺을 경우 이르면 올해 말부터 아프간군에 무기가 공급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는 (부시 행정부가) 자기들이 예산을 집행할 수 있을 때 아프간을 최대한 무장시켜두는 게 목적일 것”이라고 전했다.
역사는 짓궂은 방법으로 되풀이된다. 1980년대 옛 소련이 아프간을 점령하고 있을 때, 아프간 ‘무자헤딘’은 미제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로 무장하고 소련군에 맞섰다. 그들의 후예인 탈레반 소탕을 위해 미 국방부는 막대한 양의 러시아산 무기를 구입해 카르자이 정권을 무장시키려 하고 있다. 지독한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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