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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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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을 위한 재교육’ 승려들의 분노

등록 2006-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티베트 탈출난민 동행기②- 망명 택한 정치범들은 말한다
중국 공안의 일상화된 고문은 베이징 올림픽의 짙은 그늘

▣ 다람살라=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다람살라 중심가 ‘매클레오드 간즈’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우체국 바로 아래 티베트 사람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가 나온다. 이곳이 나왕 상치(29)의 일터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티베트에서 망명한 정치범들은 일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의 사촌동생도 함께 가게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그와 사촌동생은 모두 티베트에서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정치범들이다. 티베트에서 이들은 승려였다. 출옥한 뒤 승려의 신분에서 벗어나 속인으로 살아왔다.

사찰로 돌아갈 수 없었던 나왕 상치

그가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된 것은 1996년 8월이다. 당시 그는 티베트 캄 지역 수도원 승려였다. 중국 정부의 종교탄압을 견디다 못한 그는 마침내 사촌동생과 함께 수도원 정문에 대자보를 붙이고 유인물을 수도원 곳곳에 몰래 뿌렸다.

그와 사촌동생은 곧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교도소에서 일상화한 잔인한 고문과 구타로 그는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그는 만 3년의 형기를 채운 1999년 출옥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공안의 방문은 매일처럼 계속됐고, 수도원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중국 공안은 그가 머물던 수도원과 다른 수도원에 그의 이름과 사진을 돌리고, 그를 받아들이면 수도원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어느 수도원도 그를 받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함께 출감한 사촌동생과 인도로 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티베트의 중국 감옥은 승려와 비구니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은 소문으로 그치지 않는다. 티베트의 중국 교도소에 정치적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 가운데 70%가량이 승려 출신이다. 승려들 사이에서 반중국 저항이 거센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티베트 불교에 대한 중국 당국의 집중적인 탄압이 주원인이다. 중국 당국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부당한 간섭은 티베트 불교를 말살하려 한다는 의구심까지 자아낼 정도로 극심하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침공한 1959년부터 불경만 읽던 승려들을 대상으로 마오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강제로 학습시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는 수많은 유서 깊은 수도원들을 아예 불살라 파괴하고 승려들을 무차별 학살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티베트 불교에 대한 가장 심각한 탄압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애국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이다. 중국 정부가 발행한 4권의 책을 티베트 승려들에게 나눠주고선 몇 차례에 걸쳐 세미나를 진행하고, 세미나가 끝나는 시점이 되면 시험을 치른다. 물론 4권의 책은 모두 중국 정부의 관점에서 티베트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티베트인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가령 <티베트의 역사>라는 책에는 ‘수천 년 전부터 티베트는 항상 중국의 한 부분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교육 과정에서 가장 승려들의 반발을 자아내는 것은 달라이 라마를 ‘분리주의자’로 비판하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대목이다. 교육시간 중 반발하는 승려들은 강제로 수도원에서 퇴출시키는 조치를 하기도 하며 심지어 구속시킨 사례도 있다.

달라이 라마 사진 소지하면 징역 5년

중국 정부에서 최고의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승려들이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품속에 넣고 다니는 행위다.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소지했다가 적발될 때는 5년 정도 감옥행은 물론, 승려가 거주하는 수도원이 경찰의 수색으로 쑥대밭이 되기 예사다. 티베트 승려들이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품에 넣고 다니는 것은 수백 년간 이어져온 티베트의 전통이었다.

다람살라에서 만난 전비구니승인 담최 돌마(30)는 대표적인 ‘애국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 희생자다. 그는 17살 되던 해 비구니 사찰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티베트 불교의 상징적인 건물들이 모두 파괴됐다. 당시 사찰에선 파괴된 건물들을 새로 지을 계획을 세우고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인근 마을로 다니며 사찰 재건축 계획을 알리면서 모금을 시작해 어느 정도 재정이 확보되자 젊은 비구니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건축에 나섰다.

시간이 지나 사찰이 완공될 무렵, 중국 당국에서 기관원들이 사찰로 찾아왔다. 이들은 사찰 재건축 활동이나 이를 위한 모금활동을 금지하고 사찰을 건축하는 대신 ‘애국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던 사찰 사람들의 정원도 91명에서 85명으로 일방적으로 제한했다. 승려들이 분노에 휩싸인 것은 당연했다.

이 사건 뒤 반중국 저항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어갔다. 1994년 초 그가 있던 사찰 출신의 다섯 승려가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면서 사찰은 저항운동의 근거지로 낙인찍혔다. 중국 공안당국은 승려들의 가족을 사찰로 불러모은 뒤 반중국 시위가 다시 벌어질 경우 가족들까지 모두 체포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뒤 ‘애국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중국인 관료 30명이 사찰로 파견됐다. 그럼에도 돌마를 비롯한 8명의 승려는 다시 라싸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이들은 1994년 12월 말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라싸로 향했다.

중국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 때문에 아침에는 시위를 벌이지 못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시장거리로 나가 시위를 시작했다. “자유 티베트 만세!” “달라이 라마 만세!” 시장에 있던 상인들도, 장을 보던 중국인과 티베트 사람들도 모두 달아나기 시작했다. 15분 남짓 시위를 벌이던 이들은 곧 중국 경찰에 체포돼 유치장에 갇혔고, 그날부터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승려들을 체포한 중국 경찰은 가족들에게는 아예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딸들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던 가족들이 나서 중국 공안을 매수한 뒤에야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되기까지는 7개월이 걸렸다.

교도소에서 중국어와 중국 국가 강요

그사이 시위를 벌였던 승려들은 변호사도 없는 상태에서 일사천리로 재판을 받아 ‘분리주의자’란 죄목으로 각각 6년형에 처해졌다. 드립치 교도소로 이송된 뒤에도 고문과 구타는 끊이지 않았다. 1998년 7월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중국어와 중국 국가를 배울 것을 강요했다. 이를 거부하면 전기봉으로 심한 고문을 했고, 정신을 잃으면 징벌방에 가뒀다. 돌마의 아버지는 아예 고향을 떠나 라싸에 머물면서 옷수선 일을 하며 그의 옥바라지를 했다. 형기를 마치고 출감해 함께 고향으로 내려간 그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그 역시 투옥 이전에 생활하던 사찰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인도로 망명하는 것밖에 없었다.

티베트 인권상황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티베트 센터’ 활동가 타쉬 푼촉(29)은 “티베트의 인권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며 “지난해에만 정치적 이유로 25명이 구속됐고, 132명의 티베트인들이 정치적 이유로 구속돼 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로 구금돼 있다”고 밝혔다. 중국 공안에 의한 고문과 구타는 정치범 출신 티베트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천장에 두 손을 매달고 끓는 물을 뿌리거나, 알몸에 불을 가까이 대는 등의 고문 방식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이 밖에 전기봉이나 쇠파이프로 때리거나, 겨울철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담요나 매트리스조차 주지 않고 시멘트 바닥에서 재우는 등의 고문도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티베트 인권 현실에서 또 다른 문제점으로 꼽히는 건 중국 공안당국의 직권남용이다. 티베트의 중국 공안당국은 조금의 의심만 있어도 티베트인들을 거리에서 영장 없이 체포해 구금한 뒤 가택수색을 벌인다.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나 의심을 살 만한 인쇄물만 있어도 이를 구실로 여러 해 가둘 수 있는 게 티베트의 현실이다. 당연히 티베트인들은 공안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굽실거려야 하고, 특히 인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티베트인은 대부분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혀 지속적인 감시를 받으며 언제든지 중국 공안에 체포될 수 있다.

루카 삼(35)은 1994년 7월 인도로 건너가 학교에서 1년을 공부하고 티베트로 돌아왔다가 그를 감시하던 중국 공안에 어느 날 체포됐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책자 때문에 스파이 혐의와 반혁명 그룹을 이끈 혐의로 8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가혹한 구타와 고문으로 나중에는 몸무게가 30kg으로 줄 정도였다. 두 달간 매일 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받았으나, 별 차도가 없어 거의 숨질 정도로 쇠약해졌다. 중국 당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석방했다. 몸을 회복한 그는 1997년에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해왔다.

중국 스스로 ‘약한 고리’를 끊어라

빠른 경제 발전으로 새롭게 발돋움하고 있는 중국의 이면에 가려 1959년 이래 압제에 신음해온 티베트의 현실은 거의 묻혀왔다. 그럼에도 인도의 다람살라로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해온 수십 명의 정치범들은 티베트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중국 공안과 교도관들이 저지른 고문과 구타는 강대국 중국을 멍들게 하기도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도 티베트의 유치장과 감옥에선 구타와 고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마오쩌둥의 말을 빌린다면 티베트 문제는 중국의 “가장 약한 고리”다. 중국 스스로 이를 끊을 때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티베트를 너무 모른다”

33년간 옥고를 치른 팔덴 게야초 인터뷰

팔덴 게야초(75)는 중국이 점령한 티베트의 감옥에서 33년 동안 옥고를 치른 장기수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이 시작된 1959년 3월 수천 명의 시민들과 함께 거리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그는 감옥에서 청춘을 보낸 뒤 1992년 61살이 돼 석방됐다. 그 뒤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한 그는 옥중수기 <눈 아래의 불꽃>을 출판해 티베트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지난 2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기간에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12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투옥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1961년 혹독한 기아가 찾아왔을 때 가장 힘들었다.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수감자 가운데 70%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매일 아침 곁에서 자던 동료들이 싸늘한 주검이 돼 있었다. 3년이 지나면서 음식 공급이 조금씩 나아졌으나 여전히 충분하지 않아 굶주림에 시달렸다. 1970년이 되면서 수감자들이 가족을 면회할 수 있었다. 내 경우 가족을 10년 동안 만날 수 없었다.
-고문당한 이들이 많은데.


=나도 고문에 시달렸다. 두 손을 천장에 매달고 다리를 동여맨 다음 끓는 물을 퍼붓기도 하고 불을 들이대기도 했다. 1990년이 되면서 전기봉을 갖고 와 전기쇼크를 주는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장기수인 나에게도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여성 수감자에게는 수치심을 주기 위해 전기봉으로 성기를 고문했다. 교도관들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라는 말을 할 때까지 고문을 계속했다. 고문할 때마다 “너희는 희망이 없어. 티베트 독립은 불가능해. 우리가 하는 말을 받아들여!”라는 말을 반복했다.
-왜 33년이나 갇혔나.
=처음 갇혔을 때 7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나중에 교도소 탈출을 시도해 성공했다가 곧 라싸에서 붙잡혔다. 그 뒤 탈옥에 대해서만 따로 8년형이 선고되면서 15년으로 형기가 늘어났다. 15년형을 마친 해인 1975년 다시 강제노동수용소로 이감됐다. 그곳으로 간 뒤 가족과 연락이 두절됐다. 노동수용소는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 부실한 음식과 힘든 노동에 시달렸다. 거기서 틈틈이 티베트의 역사를 나름대로 기록해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이런 내용을 담은 팸플릿이 발각돼 형기가 추가됐다.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 단식투쟁을 벌였다.
=젊은이 2명과 함께 12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다. 단식투쟁을 하는 동안 세계가 티베트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심지어 티베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그 전에 중국 정부가 티베트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걸 보고 싶다. 이른바 ‘애국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철폐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옥에 갇힌 모든 승려와 정치범들을 석방하기를 바란다. 이런 요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시 단식투쟁에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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