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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국주의는 착했다고?

등록 2006-01-06 00:00 수정 2020-05-03 04:24

“북아프리카에서의 긍정적 역할 인정하도록” 한 역사화해법 제4항 논란
좌파의원들은 폐지 요청,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종교가 아니다” 반발

▣ 파리=이선주 전문위원 koreapeace@free.fr

최근 프랑스의 소요사태는 프랑스 내 이민자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 계기가 됐다. 지금 프랑스의 정계와 역사학계는 이민자들의 출신국의 역사를 좌우하는 ‘기억과 역사’에 대한 논쟁으로 뜨겁다. “해외,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 때문이다.

먼 옛날의 ‘재외국민’ 노고까지 치하

문제의 법은 지난 2005년 2월23일에 법제화돼서 ‘2월23일법’이라고도 불리는데, ‘국민과 재외 국민의 노고를 인정한다’는 취지의 총 13개 조항으로 구성됐다(n° 2005-158). 그런데 프랑스가 왕년에 식민제국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국민’과 ‘재외 국민’이 내포하는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도대체 ‘어디까지’ ‘누구까지’가 새삼스럽게 법으로 노고를 인정해야 하는 영역일까? 이 법의 제1, 2항에는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인도차이나와 그 외 이전에 프랑스 주권이 행사된 영토에서 프랑스를 위해 싸우거나 희생된 남녀들… 북아프리카의 재외 국민들, 알제리전쟁 당시나 1962년 3월19일의 에비앙조약(알제리 독립을 기약한 조약) 이후 행해진 수탈이나 학살로 희생된 시민들과 실종된 이들…” 등을 일컫는다고 쓰여 있다. 다시 말해 이전 프랑스령에서 식민전쟁이나 기타의 이유로 공헌한 군인들이나 프랑스인들뿐 아니라,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식민국들의 국민까지를 가리킨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까지 ‘재외 국민’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에 따른 기념관 개설이나 보상금 내역까지 구체화한 이 법은 일명 ‘역사 화해의 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화해’만이 아니라 한술 더 떠 “프랑스의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법의 제4항이 특별히 문제시된다.

제4항은 “학계 연구 프로그램들은 해외에서,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에 대해 역사적으로 적절한 위상을 부여한다. 학교 프로그램들은 해외,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긍정적인 역할을 특별히 인정하고, 이들 지역에서 프랑스군의 희생과 얘기에 각별한 위상을 부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익 의원이 과반수를 이루는 현 프랑스 국회에서 2004년에 무난히 통과된 이 법안은 상원의 승인을 받아 지난해 2월에 정식으로 법제화됐다. 이후 역사학계와 정계, 과거 식민국가들, 특히 알제리에서 논란이 되어왔다. 지난해 11월 일부 좌파 의원들이 제4항의 폐지를 요청하면서 다시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논쟁이 뜨거워지자 드빌팽 총리는 “역사는 정치인들이 쓰는 게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작업이다”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교육부 장관 질 드 로비앙도 이 법이 학교의 역사 교육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지로 “정계의 공문으로 수업을 하는 게 아니므로 학교에서 이뤄지는 수업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게 대부분 교사들의 생각이다. 사실 프랑스의 학교 교재 편찬은 국가가 아닌 사설 전문 출판사들이 담당하며, 교사는 다수의 교재들 중에서 자율적으로 선택해 사용한다. 이 법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어떨까?

“역사는 종교가 아니다. 역사가는 어떤 도그마도 용납하지 않고 어떤 금지도 존중하지 않으며, 터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는 도덕이 아니다. 역사학자는 찬미하거나 규탄하는 역할을 하지 않으며, 설명할 뿐이다. …역사는 뉴스의 노예가 아니다. …역사는 기억이 아니다. …역사는 법적인 대상이 아니다.”

위는 지난해 12월13일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19명이 관계 법조항의 폐지를 요청하며 <리베라시옹>에 발표한 성명의 주요 내용이다. 학자들은 ‘역사를 위한 자유’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역사 연구에 “이데올로기의 개입을 반대”하고 “정부의 반민주적인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과거사는 끊임없이 재고가 필요하며 어느 시기에 ‘공식적인 역사’로 종결짓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역사 연구와 법의 무관함을 주장하는 정부의 방침과는 대립된다.

서인도제도 방문이 무산되다

역사학자들의 연구 작업에 ‘금지, 터부, 도그마’의 소용돌이가 만든 쓰라린 경험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10여 년 동안에도 여럿 찾을 수 있다. 인종차별과 반유대인적 행위 금지와 연관된 ‘역사 부정’을 반대(1990년·게소법)하고, 1915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정(2001년)하고, 노예제가 반인륜적임을 인정(2001년)한 법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학자들이 성명에서 예로 든 법들이다. 역사학자들은 법 명분의 옳고 그름을 떠나, 특정 정권에서 정치적인 의도를 담아 과거의 사건들에 특정 태도를 취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러한 법이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법 중에서 특히 게소법의 여파로 ‘2차 대전 유대인 학살’은 인종차별적인 이념을 가진 극우 진영의 연설에서 언급되거나, 뜻있는 학자들 사이에는 역사부정주의자라는 낙인을 각오하고 해내야 하는 어려운 연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역사 연구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이 법은 일종의 유대인들의 마지노선이 돼버린 아이러니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지난 12월 초 서인도제도의 프랑스령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던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일정이 취소됐다. 최근의 소요사태나 친식민주의적 법안에 대한 정부의 방침 때문에 방문의 여파를 예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르티니크나 과들루프를 포함하는 프랑스령 서인도제도는 프랑스의 식민주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노예제의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인간노예라는 아픈 역사를 겪은 뒤, 프랑스인, 프랑스로 유지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민혁명의 전통으로 집단주의보다는 ‘시민’이라는 개인에 기반해서 속인주의뿐 아니라 속지주의 전통을 꾸준히 이어온 나라, 그래서 우리의 ‘민족’에 해당하는 ‘프랑스인’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라, 그런 프랑스에서 다양한 프랑스인 각자의 정체성을 존중하지 않은 채, 프랑스의 역사가 존중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프랑스인인 게 자랑스럽다! 프랑스 만세!” 12월14일, 해당법 제4항에 대한 논란이 벌어진 국회에서 드빌팽 총리가 나타낸 반응이다. 그 만세의 저편으로 “프랑스를 사랑하든지, 프랑스가 싫으면 떠나라”는 프랑스의 한 극우당 당수의 구호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식민주의 역사를 직시하라”

[인터뷰_ 좌익급진당 크리스티안 토비라 의원]

역사화해법 제4항은 프랑스 정계의 식민주의적 향수를 반영하는 것



크리스티안 토비라(Christiane Taubira·53)는 프랑스 해외령 귀안(Guyanne) 좌익급진당(PRG)의 현직 국회의원이다. 1993년부터 계속 당선됐다. 2002년에는 프랑스에서 유색인종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노예제는 반인륜적’임을 호소하는 법 제정의 기수 역할을 했다.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

=이 법의 제4항은 일부 프랑스 국회의원들의 식민주의적 향수를 반영하고 있다. ‘인종’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인간’이 있을 뿐이고, 타 국민보다 우등한 국민은 없으며, 모든 문화는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조항은 프랑스의 정계 일부가 식민주의적 몽상가들과 야만적인 신화, 그리고 유혈적이고도 무능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보여준다. 4항은 폐지돼야 한다. 그대로 두면서 이후 가능한 타협을 염두에 두어서도 안 된다. 이건 진실과 정의, 존엄성의 문제다.
프랑스 소요사태를 어떻게 지켜봤는가.

=근간에 일어난 소요사태는 그동안 방리유(대도시 외곽지역)의 현실을 몰랐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던 프랑스인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대도시들이 ‘시테’로 둘러싸여 있으며, 거기서 행해지는 특정 민족에 대한 격리가 교육·직업·주거 문제에서 차별을 심화했으며, 용모에 따라 시민들을 검문하는 차별이 이뤄지는 토양이 됐다는 사실 말이다.
소요사태와 이번 법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어떻게 진단하는가.

=프랑스 국가는 이러한 불의를 하루빨리 시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방리유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피땀 흘리는 노력을 하며 이제껏 해온 대로 그들 또한 희생돼야 한다는 걸 더는 용납하지 않는다. 프랑스가 식민주의 역사를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감수하지 않는 한, 프랑스는 국가적·국민적인 정체성을 이해할 수도, 또 대중적 정책들을 만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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