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프랑스 번영 30년간 시행된 평등정책으로 오히려 게토가 된 이민자들의 땅
인종차별에 대한 그들의 좌절과 소외를 해결할 새 통합모델이 절실한 시점</font>
▣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소요·방화로 연일 불에 타고 있는 프랑스의 모습이 전세계의 언론을 탄 지 10여 일이 지난 11월9일, 폭력사고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을 프랑스 언론들이 앞다퉈 실었다. 그 전날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공식적으로 발동해, 공권력이 사태 진압을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 까닭일 것이다. 이번 사태가 ‘사태 진압을 위한 비상 조치’라는, 1955년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래된 법령까지 필요할 만큼 심상찮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1월9일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1면 기사가 명기하고 있듯이, 긴급조치 아래 깔린 ‘분노’와 ‘증오’는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10년전 영화 <증오>를 아십니까
폭력, 차별, 소외, 인간 쓰레기, 내란, 정치적 이기심, 무슬림, 사회 통합, 치안, 이민등, 이 사태를 묘사하는 국내외 언론의 단어와 표현들이 현란하다. 외관상으로는 10월27일 파리 근교 도시 클리시수부아에서 경찰의 검문을 피해 도망가던 15살, 17살의 두 청소년이 감전사한 사건을 계기로 분노가 퍼져나가면서 비롯된 것 같지만 이번 소요의 뿌리는 깊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와 비슷한 상황을 묘사한 프랑스 영화가 있다. 1995년 칸영화제와 세자르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은 영화 <증오>다. 실업, 소외, 좌절, 마약, 경찰 검문, 폭력의 원천지인 파리 외곽지역에서 생활하는 이민계 2세 청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증오>가 10년 전에 오늘을 예기한 건 아니다. 그 영화도 실제 상황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10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엄연히 존재해온 프랑스 사회의 어두운 현실이다. 영화는 24시간을 담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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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이자 이번 소요 사태가 일어난 지역들을 프랑스에선 ‘시테’라고 부른다. 비슷한 유형의 집단 거주지를 칭하는데,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에펠탑이나 샹젤리제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멋없고 밋밋하게 우뚝 솟은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서민지역이다. 파리 외곽뿐 아니라 프랑스의 대도시 외곽지역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단지들이라 프랑스의 전형적인 대도시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서민아파트(HLM)들이다. 고층 아파트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별 거부감 없이 와닿을 수 있지만,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프랑스에선 정치적 의도가 결부되어 사회적 고정관념을 담은 경계 지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지역 거주인들의 대다수가 이민 계층 서민이고 그들 중 다수가 아프리카 출신이다. 따라서 시테와 그 거주민들을 흔히 뭉뚱그려 일정한 사회적 범주로 일컫기도 한다. 이 지역들은 방리외(대도시 외곽지역)라고도 불리며 지역에 따라 ‘뜨거운’ ‘빈곤한’ ‘어려운’ 등의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면 ‘평등의 화신’을 자처하는 프랑스가 왜 이렇게 시각적으로도 현저히 구별되는 ‘민감한 지역 집단’을 만들어놓은 것일까?
자유, 평등, 박애의 공화국 이념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는 사회 속에 다양한 평등논리를 펼쳐왔다. ‘사회적 주거지’도 그중 하나다. 형편이 어려운 서민들에게 저렴한 월세로 거주지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특히 1954년부터 활성화되어 주로 대도시 외곽지역에 대거로 건설됐다. 기존의 도시 형태를 완전히 바꿔놓은 새로운 도시계획이었다. 프랑스의 고층 아파트들은 이런 맥락에서 건설됐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뚝 서 있다.
좌·우익 어느쪽도 해결못한 게토
프랑스의 이민 노동자 계층은 대개 이전 프랑스의 식민지 출신으로, 정치·경제적 이유로 프랑스에 이주해왔다. 그들의 대다수는 20세기 후반 2차 대전 이후부터 근 30년간 이루어진 재건과 번영에 참여했다. 이 기간을 번영의 30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공식적인 노동자 이민정책은 막을 내리고 떨어져 있는 가족을 병합하는 수준의 이민정책만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이민 노동자들은 영세 아파트의 주요 거주자가 되었다. 1995년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자료를 보면, 프랑스의 오래된 영세민 아파트의 거주자들은 프랑스인과 스페인, 포르투갈 출신이 각각 7%를 차지한다. 알제리 출신이 30% 정도를 헤아리고 북아프리카 출신은 그보다 월등히 많다.
따라서 시테는 번영의 30년 동안 이루어진 사회민주주의정책의 산물다. 평등을 지향해 어려운 층에 더 많이 베푸는 식으로 활성화됐다. 하지만 번영의 시대가 지나고 정착한 이민자들이 가족을 늘려가면서 시테의 상황도 바뀌었다. 대개 세금 면제 계층이라 자연히 지역경제가 빈곤하고, 이민자 출신이 밀집되다 보니 수준 향상을 위해 학교와 주변 문화활동에 지원금을 대거 지급했다. 그런데 그런 식의 입지와 지원은 진정한 의미의 사회 통합을 이루기보다는 비슷한 사회계층을 대거로 모아놓은 일종의 게토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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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실업률은 최고 30%에 달한다. 프랑스 평균 실업률의 세 배다. 주민들의 학력이 낮은 탓도 있지만, 고학력자인 경우에도 기업들의 인종차별 고용정책의 희생자가 적지 않다. 파리 외곽의 한 시테에서 오랫동안 직업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코린(38)은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직업을 찾도록 교육하고는 있지만, 당장은 이들을 대상으로 공급되는 직업이 없다. 그래서 교육받는 쪽에서도 좀체 희망을 가지기 힘들다. 게다가 이런 보조협회에 대한 정부지원금이 급격히 줄어들어 가르치는 사람도 힘들다.”
그런데 이렇듯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은 명분상 평등을 지향하는 프랑스에서 평등의 강박관념에 묻혀 감춰졌다. 좌익 정치인들은 그 지역에 투자되는 발전기금을 자랑했고, 우익 정치인들은 치안 개선을 선전하기 위해 시테 경찰들의 강경 대응을 요구했다. 그 어느 쪽도 게토 현상을 개선하지 못했다. 긍정적·부정적 차이를 더할 뿐이었다.
시테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실업과 좌절이 위험, 범죄, 마약 등의 소식과 섞여 언론에 실렸다. 이런 젊은이들은 이민 2, 3세인 프랑스인이다. 프랑스 사회 서민계층의 좌절과 소외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언론은 이들 집단을 논할 때 “프랑스인”이라고 하지 않고 “방리외의 젊은이들”이라거나 ‘사회통합의 어려움’과 결부시켜 “북아프리카 이민자 출신”이라는 표현을 쓴다. 특히 9·11 사태 이후로는 이슬람 문제와 결부되어 언급됐다. 이렇듯 늘 부정적이고 격리된 이미지로 언론에 오르내리는지라 이들 지역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주민들이 상당한 거부감을 보인다.
그렇게 이민, 치안, 실업, 범죄, 마약 등 프랑스 사회의 모든 문제점들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시테이다 보니, 정치적 구호의 적절한 소재이기도 하다. 현 내무장관 니콜라 사르코지는 시테를 중심으로 범죄에 대한 ‘톨레랑스 제로’를 내걸어 경찰력을 강화하면서 감시 검문 등 강경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사르코지는 10월 말 파리 북쪽의 한 시테를 검찰하러 나서 ‘인간 쓰레기’라는 표현을 사용해 소요자들에게 사임을 요구받기도 했다. 물론 이런 배경이 이번 소요의 폭력성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오랜 상처가 곪아 터졌다”는 식의 표현을 이해하게 한다.
우익정부가 국가보조금도 줄여
11월8일 이번 사태 수습을 위한 국회 모임에서 드빌팽 총리는 그동안의 차별을 인정하면서, 평등을 지향하는 교육 및 직업 권장정책을 활성화할 것을 선언했다. 사실 2002년에 들어선 우익 정부는 시테에 기존하는 다양한 문화협회들에게 지원되던 국가보조금을 대폭 줄인 바 있다. 게다가 의무교육 때문에 16살 이전엔 공식적으로 직업실습을 받을 수 없는 현행 교육법에서 그 한계 나이를 14살로 내려 직업 알선을 양성화했다. 이는 1975년 전까지는 보편화된 정책이었다. 오히려 새로운 제도를 실시해 과거로 돌아가는 셈이다.
이번 사태로 서둘러 프랑스식 통합모델의 실패까지는 논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그들의 통합모델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회통합은 공권력이 특정 계층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닌, 사회 전체가 동원되어 함께 이루어야 할 것이다. 영화 <증오>의 마지막 대사처럼 “아직은 괜찮아! 중요한 건 추락이 아니라 착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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