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독립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의 자전적 수기Ⅵ - 코파수스에 체포당하다

비밀 레지스탕스 작전을 조직하기 위해 1991년부터 나는 수도 딜리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특별한 택시를 이용해서 몇몇 ‘안가’를 번갈아 다니며 적들의 눈을 따돌렸다. 우리는 1992년 말, 1년 전 인도네시아군이 자행했던 이른바 ‘산타크루즈학살’ 1주년을 맞아 추모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시민들에게 자리잡은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진행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의 여러 가지 행사를 꾸며나갔다.
사흘 밤낮으로 계속된 심문
이런 과정에서 1992년 11월20일 이른 새벽녘, 내가 머물던 딜리의 집이 30여명의 레드베레(악명높은 인도네시아 특수부대 코파수스)에 포위당했다. 적들에 포위당한 것을 알아차린 나는 저항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와서 나를 죽여라.”
밀림에서부터 늘 죽음의 순간을 준비해왔던 나는 당당히 그 시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적들은 나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나를 보호해주던 그 집 식구들과 딜리에 살고 있던 나의 가족 모두를 체포해갔다. 적들은 딜리 바닷가에 있던 코파수스사령부로 나를 데려갔고 그곳에서 트리 수트리스노 장군에게 1차심문을 당한 뒤, 나는 다시 동티모르를 관할하는 인도네시아군의 사령부가 있는 발리로 연행되었다. 나는 체포되고 난 뒤에 약물을 투입당하거나 직접적인 신체적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심문중 각종 잡음을 계속 일으키며 집중을 흐려놓았고 잠을 재우지 않아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곳에서 둘쨋날 밤부터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고, 사흘 밤낮으로 계속된 심문중에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게 만들며 탈진시켜갔다. 이걸 고문이라 말할 수 있을런지? 어쨌든 그들은 심문중에 “이제 가서 자도 좋다”고 말해 내가 자리에 누우면 즉각 다시 깨워 심문하는 잔인한 방식을 택했다. 세 번째 날 밤, 내가 인도네시아 시민권을 받겠다고 결심하자 그들은 즉각 이걸 인도네시아 전역에 방송했다. 그러나 사실 그 비디오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지명한 동티모르 주지사 아비리오 소아레스를 인터뷰한 것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그들은 나를 자카르타로 이송해서 약간의 휴식 기회를 주었으나, 다시 자카르타의 비아스(인도네시아 비밀경찰) 감방에서 재심문을 받는 동안 나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잠 안 재우기’에 시달렸다. 그들은 주로 티모르독립혁명전선(Falinti)의 정체와 전략에 대해서 집중적인 심문을 했다. 한편 인도네시아 당국은 나를 전쟁포로와 같이 분류해서 일체의 면회와 변호사의 조력조차 받을 수 없도록 했다.
당시 이에 대한 항의로 내가 단식에 돌입하자 인도네시아 당국은 상당히 당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무렵 나는 비아스의 작전을 눈치챘다. 이들은 나를 사형시키기보다는 적절히 이용하면서, 만약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를 합병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찬양만 해준다면 나를 석방시킬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얼마 뒤, 이들은 나의 감방 기록을 모두 바꾸기 위해 수갑을 채운 채 자카르타 시내 구경을 시켰다. 특히 이들이 나를 설득할 요령으로 황금으로 만든 인도네시아의 국민탑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간수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 국민탑의 장신구에 내 영혼도 내 국민도 결코 팔아먹은 적이 없다. 독립과 자유를 바라는 내 국민들의 희망을 결코 배신할 수 없다.” 그뒤부터 나는 ‘악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재판에 앞서 나를 다시 딜리의 경찰본부로 이감했다. 여기서 나는 비아스로부터 펜과 종이를 슬슬 훔쳐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명령을 잘 따르면서 간수들과 카드놀이도 하고 농구도 하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간수들에게 나는 쉴 수 있는 시간을 부탁했고 틈틈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변호 계획을 세웠다. 나는 마침내 완전한 문장을 작성했고 이걸 밖으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살인자·도둑들과 같은 감방에
1993년 1월26일, 체포된 지 두달이 지났고 재판이 시작되기 3일전 내 뜻과는 상관없이 변호사가 선임되었다. 1993년 2월1일 첫 번째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판과정이 인도네시아어로 진행된 탓에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재판의 많은 증언자들은 협박과 위협을 당했다. 증언자들은 영양실조와 공포에 질린 채 감방에서 곧장 재판정으로 끌려와 짜인 증언을 강요당하는 상태였다. 5월7일 내가 발언할 수 있는 날이 왔으나, 내가 변호문을 2장째 읽어나가자 재판장은 나의 말을 중단시켜버렸다.
이후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고 나는 종신형을 받는 것으로 재판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그들은 나를 서둘러 자바섬 중부의 세마랑감옥으로 나를 이감시켜버렸다. 그곳에서 나는 동티모르의 수형자들과는 모든 접촉이 차단된 채, 일반범들인 살인자와 도둑 그리고 심지어 정신 이상자들과 같은 방에 투옥당했다.
그리고 8월 들어 나의 형기는 20년으로 단축되었고, 9월부터 나는 감방 조건 개선을 내걸고 다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결국 인도네시아 당국은 나를 보안시설로 유명한 자카르타의 치피낭감옥으로 이송했다. 그곳의 간수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개인적이든 정치적이든 나를 모욕감과 분노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은 관찰되고 기록되었다. 한참 뒤 나는 팀팀관(동티모르)으로 이송되었고 이때부터 압박감은 조금 줄어들었다.
내 감옥생활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사건은 1997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를 만났던 일로 기억된다. 처음에 간수들이 만델라 대통령과 만날 수 있게 나를 데려간다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실현되었고, 나는 인도네시아 국빈관에서 만델라 대통령과 저녁을 함께했다. 나는 그의 천진난만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큰 이해심으로 듣기를 즐겼다. 이날 밤 만델라 대통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나는 우리 동티모르의 진실을 말했다. 우리는 ‘화해’에 대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험은 동티모르인들의 의지와 같은 것이며 동시에 동티모르인들이 인도네시아를 용서할 수 있도록 성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반독립파민병대가 용서를 구한다면…
감옥에서도 여전히 항쟁을 지도했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쓴 지난 7년 동안의 수감생활을 나는 가혹했다고만 여기지는 않는다. 수감중 나는 망명을 종용당하기도 했으나 스스로 감옥생활이 더 유익한 것이라 여기며 견뎌냈다. 덕분에 그곳에서 나는 많은 인도네시아 친구들도 사귀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이 친구들과 큰 공감대를 형성했던 일은 값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수하르토 정권이 몰락한 뒤 1999년 1월, 인도네시아의 후임대통령이었던 하비비는 내가 지난 10년 동안 요구해왔던 것처럼, 유엔의 관리 아래 동티모르 문제를 풀어가자는 제의를 했다. 그로부터 국제사회는 나의 석방을 위해 강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1999년 2월10일 나는 가택연금형식으로 치피낭감옥에서 살렘바감옥의 별채로 이감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알렉산더 도우너 외무장관 그리고 일본의 마사히코 코무라 외무장관을 비롯해 많은 국제사회 대표들의 방문을 받았다.
1999년 8월30일, 우리 동티모르 국민들은 조국의 독립을 결정하는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다. 나는 가택연금상태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같은 시간 위성전화기를 통해 동티모르 산악의 게릴라 동지들은 절규하며 간청해왔다. “인도네시아정부군과 그들의 지원을 받는 반독립파민병대들이 동티모르 전체를 불지르고 있으니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
나는 최악의 상태로 빠져드는 조국 동티모르의 소식에 울부짖었다. 나는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의 동지들에게 인도네시아정부군이든 반독립파민병대든 누구와도 전투를 벌이지 말기를 눈물로 요청했다. 당시 동지들은 우리 국민들이 살해당하고 있는데, 왜 냉정을 유지하며 싸우지 말기를 내가 요청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1999년 9월7일 나는 가택연금상태에서 풀려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이게 동티모르 침공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최후가 된 셈이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10월의 동티모르, 나의 조국은 큰 슬픔으로 나를 반겼다. 나의 조국은 인도네시아가 침공했던 지난 1975년과 똑같은 모습으로 파괴당해 있었다. 나는 두번 다시 똑같은 보복이 없기를 염원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들고 말했다.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나가자.” 그리고 간청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조국을 재건하자.”
우리 동티모르 국민들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저질렀던 그 길고도 잔혹했던 ‘분리정책’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두려움 탓으로 많은 이들이 투표에서 인도네시아를 지원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군의 지원 아래 그들의 조종을 받았던 동티모르 반독립파민병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다행스럽게 국민들은 자신들을 죽였던 반독립파민병대들을 오히려 우리 정치지도자들보다 더 쉽게 용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는 복수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판을 통해서도 인도네시아군에 조종당했던 이 형제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이 되돌아와서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의 게릴라 동지들이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빌 것임을 분명히 약속했다.
사나나 구스마오/ 티모르항쟁민족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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