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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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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는 악마가 아니다”

등록 2004-12-31 00:00 수정 2020-05-03 04:23

과잉 생산에 내수 감소 겹친 프랑스 포도주… 업계 종사자들 정부의 과음 예방 정책에 맞서 시위

▣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2004년도 저물어간다. 크리스마스에 송년회까지 겹친 프랑스의 12월은 그야말로 모두가 들뜬 축제 분위기다. 도시마다 거리를 장식하는 장식등이 켜지고, 집집마다 편지함엔 상품 카탈로그들이 수북이 쌓인다. 연회에 쓰거나 선물로 선택되기 위해 즐비한 상품들이 줄 서 있다. 그 가운데 유독 포도주는 서럽다.

신세계 포도주들의 공습

12월8일 보르도를 비롯해 프랑스의 주요 포도주 생산지들에서 시위가 있었다. 2004년만 해도 여러 차례 포도주 생산업계 종사자들은 거리로 나가 분노를 표출했다. 이날 보르도에서만 자그마치 1만여명이 참가했다. 전국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열린 전례 없는 규모였다. 시위자들이 외친 주요 구호는 이랬다. “위기의 포도주 생산업을 정부가 구출하라.” 이 구호를 이해하려면 꽤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이번 난국은 2004년에 너무 많은 포도주가 생산됐다는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최근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2004년 생산된 포도주는 모두 587천만ℓ로 평년에 비해 평균 9%나 증가했다. 좋은 기후 덕분에 드물게 풍년을 맞이한 포도 생산으로 넘쳐나게 된 포도주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즉, 포도주의 과잉 생산으로 최근 들어 프랑스 포도주는 내수와 외수 모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다.

‘포도주 하면 프랑스’라는 명성을 얻어 1990년만 해도 세계 시장의 40%를 독점하던 프랑스가 1999년에는 30%로 시장이 줄어드는 등 난고를 겪고 있다. 세계 포도주 시장에서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기존의 경쟁국 외에도 19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포도주 산업 이주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발전한 오스트레일리아, 남아공, 칠레, 아르헨티나 등 이른바 ‘신세계’에서 생산되는 포도주가 해외 시장에 널리 보급되어 상품의 질이나 가격 면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같은 포도주 시장의 세계화 여파로 제조와 관리 절차가 남달리 까다로운 프랑스산은 제품이 너무 다양하고, 제품명도 부르기 어렵다는 게 세계 시장에서 듣는 일반적인 비평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프랑스 문화에서 포도주의 역사와 지역적 특색을 살려 만들어내는 ‘프랑스적 특성’이 외국에선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다는 얘기다.

이에 반해 신세계의 포도주들은 설탕 농도를 비롯한 감미 및 제조법에서 훨씬 융통성을 보이고 있으며, 포장이나 명칭도 간단해 대중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게다가 늘어나는 회원국들의 균등한 발전을 지향하는 농업정책을 펼치는 유럽연합쪽의 결정은 유럽 내에서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 와중에도 프랑스는 샴페인을 비롯해 중·고가 포도주 시장의 챔피언 자리를 고수해오고 있으나, 저가의 대중적 포도주 시장에선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주로 영세하고 신규 생산자층에서 받는 타격이다. 이런 현실에서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리는 외수 시장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도주 생산업계쪽의 현대화와 대중화가 필요한 판국이다. 그래서 프랑스 포도주업계는 ‘전통 고수’와 ‘상업성에 중점을 둔 현대화’를 어떻게 조율해나가느냐는 과제를 안고 있다.

국회 ‘에방법’ 통과에 분노

보르도와 보졸레의 적포도주는 두드러지는 과다생산 품목이다. 생산과 판매의 균형이 맞춰지지 않다 보니 기존의 포도밭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판매율이 저하되는 시장에서 풍작이 오히려 고충이 되고 있는 현실에다 국내 시장의 여건도 악화되고 있어서 설상가상이다. 이런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줄어드는 국외 소비를 국내 소비가 보충해주어야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포도주를 많이 마시기로 소문난 프랑스인들의 소비량 또한 최근 몇년간 부쩍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정기적인 포도주 음주자들이 절반으로 줄었는가 하면, 비소비자들의 수는 남성의 28%, 여성의 45%로 각각 10% 이상씩 늘어났다. 30년 전 전체 알코올 소비의 75%가 포도주였으나 지금은 60%만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왜 나날이 포도주를 덜 마시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에 그동안 정부가 펼쳐온 과도한 ‘반알코올’, 특히 ‘반포도주’ 정책 때문이라는 게 분노에 찬 생산업자들의 답변이다. 프랑스는 1991년부터 ‘에방(Evin)법’으로 과음과 흡연 예방책을 실시해왔다. 국민건강을 위한다는 취지에서 당시 보건부 장관의 이름을 따서 지은 법이다. 알코올과 관련해서는 특히 연소자를 보호하고 과음을 예방하기 위해 알코올을 할인촉진 판매하거나 미화하는 상업광고를 줄이면서 알코올의 위험성을 알리는 홍보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보건부가 반알코올 홍보작업에 앞장서왔다.

자동차 사고율을 줄이기 위해 다소 강경한 정책들을 실시하고 있는 현 정부는 자동차 사고와 음주의 관계를 특별히 다루면서 안전을 강조하는 논조를 펼치고 있다. 11월에 새로 나온 도로안전 공익광고에서도 적포도주의 붉은색을 피로 이미지화한 내용이 실려 있다. 또 12월 연말의 축제기간에는 ‘반음주 포스터’가 곳곳에 대대적으로 나붙을 예정이다.

이에 반발한 포도주 생산자들은 이런 정부의 움직임에 맞불을 놓고 있다. “보건부 장관은 음주를 금지하지 말고 완화하라.” “포도주를 악마화하지 마라.” 포도주 생산자들은 정부의 포도주 금주 정책이 대중에게 포도주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심는 구실을 하며, 필요 이상으로 소비를 떨어뜨린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다른 술에 비해 포도주는 알코올 농도가 그다지 높지 않을뿐더러 화학주가 아닌 자연 음료이므로 적당한 음주는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포도주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 아닌 오해를 ‘포도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라고 일컫고 있다.

지난 10월 국회에서는 ‘에방법’을 변용하여 알코올 광고 미화 방지를 완하한다는 법안이 절대 다수의 찬성을 얻어 통과됐다. 그동안 포도주 생산업계가 정부 차원에서 열심히 벌여온 로비의 결실이었다. “지역 발전을 도모한다”는 논지로 받아들여진 이 법안으로 판매자쪽에서 해당 알코올의 장점과 특색을 살릴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포도주 영세업자들보다는 오히려 위스키 같은 대규모 판매단체들이 이 법안을 남용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어서, ‘에방법’의 고수와 강경화를 주장하는 반알코올 단체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이처럼 포도주 생산자들은 건강과 상업적 목적을 흐리며 다소 애매모호한 논거를 이용하여 당면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원산지 농부들의 자부심은 살아 있다

사실 포도주는 전통이나 문화의 이미지뿐 아니라, 하나의 산업으로 프랑스의 경제 분야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 농업 생산량의 14%로, 곡류 다음으로 높은 생산량을 차지하는 포도주는 전체의 3분의 1을 수출하고 있다. 그래서 포도주는 수출 농산물 분야에서는 1위이며, 전체 수출 품목에서는 늘 10위 안에 들고 있다. 2000년에는 총 54억유로의 수출 매출액을 달성했다. 이 금액은 103대의 에어버스나 500대의 테제베(TGV)의 수출량과 맞먹는다. 또 포도주 생산에만 연간 약 20만명의 일자리를 만들고 있고, 3만6천여명이 포도주 중개판매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례 없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땅에 남아서, 우리의 직업을 보전하길 원한다”라는 포도주 생산업자들의 외침에는 생존의 몸부림과 더불어 자부심이 배어 있다. 그리고 이 소리는 세계 도처에서 원산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농부들의 소리를 닮았다. 2004년에 펼친 포도주 생산업자들의 노력으로 정부쪽과는 1월 중에 몇 가지 협상이 있을 예정이다. 프랑스 보건부와 맞서서 협상할 때는 포도주 생산업자들도 과음을 자제하고 즐기는 포도주 예술의 논리를 펼쳐야 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국내외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 포도주 생산업자들을 지켜보니 연말 축연의 식탁 위에 놓인 포도주의 맛이 전에 없이 애절해 보인다.

참조: 435호(2002년 11월28일치 ‘프랑스 포도 침공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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