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 사유지 보행권 일부 인정… 산책할 권리 찾는 ‘산보자’ 모임과 농촌 주민 대결 끝나지 않아
▣ 런던= 줄리안 체인 전문위원 joimsook@hotmail.com
“시골길을 개방하라.”
한국에서는 발걸음 내키는 대로 시골길을 걸어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이런 자연스러운 행위가 분쟁거리가 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다른 사람 소유의 토지나 산 등을 맘대로 가로지를 수가 없다. 외부인이 시골 정취를 즐기며 무심코 걸어가다간 예전엔 지주의 머슴들에게 혼쭐이 났고 심지어 총에 맞기도 했다. 지금도 무단침입자(Trespassers)란 딱지가 붙여지면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지주들은 아예 오솔길을 봉쇄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토지 소유 개념은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배타적이다. 근본적으로 사유화할 수 없는 자연까지 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즉, 하늘도 땅도 시냇물도 오솔길도 새들도 다 내 것이라며 울타리를 친다. 그래서 이른바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Ramblers)은 조직적으로 무단침입을 하면서 자연을 공유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펴왔다. 그 성과가 이제야 나타났다. 영국 정부가 2004년 9월부터 이용하지 않는 토지 위를 걸어다닐 수 있는 새로운 권리를 인정했다.
가수 마돈나 토지개방 반대 소송 걸어
일반인들이 산과 들을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스코틀랜드는 물론 남서부 그리고 북서부 영국을 기점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다. 전국상세지도를 만드는 국토조사부는 이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대중에게 개방돼 있는 곳을 표시한 새 지도를 만들고 있다.
농촌 주민들은 외부인들이 멋대로 침입해 가축들을 놀라게 만들고 작물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런 움직임에 반대해왔다. 특히 가수 마돈나는 유별나다. 남서부 잉글랜드 지방에 485ha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농림청의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토지개방 정책에 반대해 소송까지 제기해놓고 있다. 마돈나의 저택 근처는 산보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데도 그는 새 법 때문에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위협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이런 갈등은 11세기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침입했던 시절부터 존재했다. 당시 정복자인 노르만족은 피정복자들의 토지를 많이 빼앗았고 이의 상당 부분을 노르만족 최대의 취미 활동인 사슴사냥을 위해 따로 남겨두었다. 이들의 배타적 즐거움을 위해 토지의 무단침입은 엄격히 금지됐으며, 밀렵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중죄로 다스려졌다. 그 뒤 봉건제의 붕괴 등으로 사유화는 더욱 가속화되면서, 많은 공유지가 개인 소유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공유지는 소농에게는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여기에 가축을 방목하거나, 작은 야생동물을 잡거나 땔감을 마련하거나, 각종 야생식물들을 채집했던 것이다. 결국 많은 소농들은 몰락하고 대지주 아래의 농업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더구나 17세기 말부터 진행된 농업의 기계화와 현대화로 점점 노동력이 불필요해지면서 이들 대부분은 도시 노동자로 흡수되어 결국 농촌은 몇몇 부유한 대지주의 점령지로 남게 되었다. 더불어 산업화된 인구밀집형의 근대적 도시가 출현하면서 도농간 갈등이라는 새로운 문제와 긴장이 나타났다. 가난한 농민들을 몰아내고 통제하는 데 성공한 대지주들은 이제 도시인들로부터 도전받게 된다. 도시 생활에 지친 과밀한 슬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나 도시 주변의 부유한 시민들도 점차 도시를 둘러싼 농촌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농촌은 도시의 스트레스와 냉혹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낙원처럼 여겨졌다. 특히 런던은 ‘연기지대’로 불릴 정도로 대기오염이 심한 상태였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에는 귀농운동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산보자 연합 13만명… 길 들락날락하며 운동
19세기 초 옛길을 보존하고 법적으로 보호된 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산책클럽이 형성됐다. 몇몇 그룹들은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지식인들이나 시인들에 의해 조직됐고, 다른 몇몇은 노동자들에 의해 창설됐다. 이들은 단체행동을 함으로써 ‘산보자’(Rambler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노동운동의 출현과 동시에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은 더욱 조직화됐고 전국 단위의 ‘산보자 연합’(Ramblers Association)이 1935년 조직되어 이제 13만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하고 있다. 지주들이 시골길을 폐쇄하지 못하고 계속 시골길이 일반인에게 개방되도록 만들기 위해 뻔질나게 들락거리자는 것이 이들의 작전이다. 일반인들이 도시 녹지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며, 도시공원을 조성하는 캠페인도 전개한다. 산과 들을 누구라도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는 운동도 펼치고 있다. 지방 정부를 설득해 오솔길을 파내거나 막는 지주들을 처벌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 운동의 대표적 성과로서 정부는 피크 디스트릭(Peak district)이나 쇼도니아(Snowdonia)와 같은 산악지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했으며, 페나인 웨이(Pennine way) 같은 길은 산보자들을 위해 표시되어 있다. 점차 농촌이 관광지로서의 의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넓은 땅일수록 더 개방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도시인들이 시골에 집을 마련해 주말에 가 쉬거나 퇴직 뒤에는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려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도시의 부는 농촌으로 몰려들고 있으며, 그 옛날 땅에서 쫓겨난 농민의 후손인 도시인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 산책과 낚시 그리고 사냥을 즐긴다. 농촌 도로는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룰 정도다. 그러나 오염 없는 농촌을 찾는 도시의 관광객들의 이해와 정작 농촌에 사는 사람의 그것은 종종 충돌하게 된다. 환경운동가들은 농촌 개발에 반대하지만,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개발을 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경운동가들은 농촌에 도로를 건설하는 계획을 반대하지만, 농민들은 원하는 경우가 많다. 또 주말 별장 소유자들은 전망을 망친다는 이유로 농촌에 주택을 건설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땅값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가난한 농민들은 주택 건설을 환영한다. 도시인들이 농촌으로 들어오면서 가난한 농민들은 집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정작 지역 주민들은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또 주말 별장을 지닌 도시인들이 많아질수록 농촌엔 가게, 학교 그리고 병원이나 버스 등 지역 서비스가 부실해지고 있다. 농촌의 가난한 이들과 노인들은 이런 서비스로부터 더 소외받게 되었다. 동물 애호가들은 여우사냥 금지를 열렬히 지지하지만, 농촌에 사는 가난한 사냥 도우미들은 사냥이 금지될 경우 심각한 경제적인 타격을 입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몇년 전부터 ‘농촌주민연맹’(Countryside Alliance)이 조직되어 농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런던에서 몇 차례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한때 25만명이 모인 군중집회를 열기도 했다. 또 보수당과 연대해 사냥금지법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도 전개했다. 최근 일부 열성 회원들은 여우사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상원 회의장에 난입해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정반대의 해석을 낳기도 했다. 농촌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에 대한 배타적인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실력 행사라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위기에 처한 농촌 주민들의 생존 투쟁의 성격을 지닌다는 견해도 있다.
농촌 사람들은 개발이 좋다?
어쨌든 주말마다 수만명의 산책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농촌으로 줄지어 몰려가고 있다. 언젠가는 농촌에 집을 사서 일년 내내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탁 트인 공간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지난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지주의 횡포로 자신의 토지를 포기하고 떠났지만, 이제는 도시인의 유입으로 가난한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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