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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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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에어컨, 미스터 무어

등록 2004-08-20 00:00 수정 2020-05-03 04:23

상영을 둘러싼 아랍인들의 반응… “다 아는 내용이지만 자존심을 달래준다”

▣ 암만=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새로울 것도 없네요. 이미 다 아는 내용들을 대강 엮어서 만든 반부시 영화가 아닌가요?” “영화 속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우디 왕실은 부시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아닌가.” 중동에서도 적잖은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영화 의 관전평(?)이다. 만들어진 영화 자체보다 그 영화를 대하는 개인과 정부의 입장이나 태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연합·오만·바레인·카타르·레바논 상영 허가,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상영 금지, 요르단 부분 삭제 논란 끝에 무삭제 상영 허가….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제의 영화를 둘러싼 아랍국가들의 ‘상황판’이다. 중동 각국 정부의 영화 상영 허가와 금지에도 다 사연이 있고, 말도 많다.

상영 금지한다고 못 보나

별다른 레저 문화가 없는 중동에서 영화나 드라마는 시간 보내기에 가장 효과적이고 대중적인 수단이다. 아랍인들이 이 영화에 적잖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영화감독의 유명세나 출연 배우의 지명도와도 무관하다. 영화는 미국이 9·11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과 부시의 유착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도 진행형인 이라크인들의 고통스런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실 1991년의 걸프전쟁과 지난해 터진 이라크 전쟁은 적지 않은 아랍인들에게 굴욕감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상실해가는 아랍의 대의와 정치 지도자들의 미국 편들기에 대한 회의, 명분 없는 전쟁 앞에서 아랍인들의 무력감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아랍인들에게 은 대리만족을 주는 것 같았다.

지난 7월21일, 쿠웨이트의 신문로(사하파 거리)에 있는 한 영자 신문사를 찾았다. “이 상영 금지됐다는 보도를 봤습니까?”라고 묻자 한 관계자가 “정말인가요? 무슨 이유라고 합니까?”라며 오히려 필자에게 반문했다. 이미 쿠웨이트 당국이 영화를 심의 중인 것을 알고 있던 터였다. 혹시나 했던 이들은 상영 금지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영화관에서 상영이 금지돼도 볼 사람은 다 보는데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하는 분위기들이었다. 쿠웨이트 당국이 영화 상영을 금지한 이유는 이 영화가 부시 행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우디 왕가를 모욕했다는 것이다. 쿠웨이트 법에는 우방국을 모욕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다. 쿠웨이트 당국은 중동 전역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도 상영을 금지한 바 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나,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서는 이 영화가 이미 상영 중이다. 7월 중순의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관객 중 다수는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이다. 최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는 밀려드는 사우디아라비아인들로 인해 쾌재를 부르고 있다.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사우디아라비아보다 인접한 바레인에 거주하며 사우디아라비아로 출퇴근하는 사우디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해안 도시 담맘까지는 국경 통과 시간을 포함해 30~40분 안팎이 걸려 출퇴근에 부담이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런 까닭에 바레인 영화관에서 을 관람한 관객들의 다수는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이다.

영화 보며 대리만족 느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상영이 금지됐다고 해서 영화 감상을 못하란 법은 없다. 바로 DVD 버전 덕분이다. 7월14일 중동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 직후 DVD 버전은 중동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다. 한여름 50도에 육박하는 더위를 피해 요르단이나 시리아, 레바논 등지로 두달 안팎의 피서를 떠난 사우디인들도 사우디 밖에서 이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은 미국 정부가 9·11 테러 직후 사우디아라비아의 고위층을 미국 밖으로 빼돌렸다고 주장한다. 사우디가 9·11 테러와 연관이 있음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암시한다. 이런 시각은 대다수 아랍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우디 왕가는 이를 반박했다. “무어 감독은 사우디가 오사마 빈 라덴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충분히 조사하지 않았다. 사우디는 9·11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통해 9·11 테러 연루 혐의를 완전히 벗었다.” 압둘라 사우디 왕세자의 이복형제로 9·11 테러 당시 사우디 정보기관을 맡고 있었던 영국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투르키 알 파이살 왕자의 주장이다. 최근 발표된 9·11 보고서는 사우디인 출국에 백악관이 정치적으로 개입한 사실에 대해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투르키 왕자는 9·11 공격 이후 사우디인들이 서둘러 미국을 떠난 데 대해 “빈 라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테러 발생 이후 미국에서 겪게 될 어려움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우디 밖에서 을 관람한 사우디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왕실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막연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 있었다.” “무어 감독은 반부시 운동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우디 왕실에 대해 근거 없는 비방을 늘어놓은 것 아닌가?” 다양한 의견이 표출된다. 어쨌든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상영을 허가한 중동 국가는 대개 친미 경향의 나라들이다. 사실 정부는 친미라고 해도 국민들은 반부시 정서가 강하다. 이 와중에 불분명한 이유로 영화 상영을 금지했을 때 맞닥뜨려야 할 국민들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예상해보면, 영화 상영을 허가하는 것이 더 안전했는지 모를 일이다.

영화가 상영 중인 나라들도 이 영화가 반미·반부시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주의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영화 포스터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어떤 자극적인 문구도 들어가지 않고 차분하다. 부시 대통령과 마이클 무어 감독이 다정하게 손잡고 포즈를 취한 패러디 포스터가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배려에도 아랍인들의 반미 정서는 강해진다. 8월13일 바레인에서만도 1만5천여명이 미군의 이라크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반미·반부시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아랍 정서를 대리충족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랍 신세대들도 통쾌함 느껴

아랍 신세대들에게도 이 영화는 화제가 되고 있다. “내 시야를 열어준 영화이다. 9·11 사건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미국 부시 행정부의 비뚤어진 정책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아니 현직 대통령을 이렇게까지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나?” 미국인의 손으로 만든 반미 영화를 통해 미국 바로알기를 경험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은 9·11 사건이나 이라크 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무어 감독 자신도 말했듯이 부시 대통령이 얼마나 무능하고 악의적이며 선동적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미 대다수의 중동 아랍인들은 무어의 시각에 거부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적지 않은 아랍인들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음모라며 고갯짓을 했다.

은 무어의 노골적인 반부시 의도와는 무관하게 아랍인들의 반부시 정서를 반영하여 대리만족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슴겨진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뜨거운 열사의 땅에, 영화를 보며 열을 받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랍 관객들 다수는 시원함과 통쾌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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