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 최고조… 노동당 · 보수당 등의 진부한 정책에 유권자 표심 떠나
▣ 런던= 줄리언 체인 전문위원 joimsook@hotmail.com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얼마 전 자신의 노동당 당수 재임 10주년을 자축했다. 하지만 바로 그의 리더십 때문에 노동당은 최근 잇따른 선거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라크전과 관련해 열린 두 차례의 공개 심의와 국회 특별위원회는 블레어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나 대부분의 국민은 그가 국민을 속여 전쟁을 밀어붙였다고 생각한다. 이라크 무기 사찰관이었던 켈리 박사의 죽음을 조사한 허튼 조사위원회 보고서가 지난 1월 발표된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대다수는 그가 사임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노동당 우경화 정책에 노조 등 돌려
이미 지난해 말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도 노동당은 1석을 빼앗긴데다 최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20%의 부동표가 제3당인 자유민주당에 쏠리면서 노동당은 1석을 더 잃었다. 전통적으로 노동당이 강세인 지역에서도 가까스로 면피를 할 수 있었다. 지난달에 열린 지방선거에서는 보수당, 자유민주당 다음으로 3위를 해 지난 100년 동안 가장 참담한 성적을 기록했다.
노동당의 중추 세력이랄 수 있는 노동조합도 토니 블레어의 우경적인 정책에 심한 불만을 갖고 등을 돌리기 시작하고 있다. 노동당 창당 멤버의 하나였던 철도노조가 노동당에서 탈퇴해 노동당뿐 아니라 다른 당에도 자금을 대기로 결정했고, 전국소방노조도 노동당에 더는 자금을 대지 않기로 결정했다. 영국의 최대 노조 세 군데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시정조합(Municipal Workers)도 일부 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에게 자금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 밖에 현재 완전 국유로 운영되는 의료 시스템을 사유화하는 조처로 의심을 받고 있는 재단병원 추진, 대학 학비 인상 등 핵심 정책도 노동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에서조차 가까스로 부결을 면하는 사태를 맞고 있다. 나아가 정부는 도로세 부과, 국민건강과 교육 서비스의 사유화 확대를 공언해온 터라 앞으로 더욱더 갈등이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 몇번이나 정치적 위기를 넘긴 블레어는 거센 사임 여론에도 버티기 작전으로 일관하고 있다. 심지어 두 차례의 스캔들로 모두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고 믿었던 ‘블레어맨’ 피터 만델슨을 새삼 무덤에서 끄집어내 유럽연합위원으로 고집하는 등 독선적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이는 대처 총리가 권력 말기에 보였던 증세과 흡사하다.
노동당도 날로 인기를 잃어가고 있지만 야당인 보수당의 사정은 더 나쁘다. 보수당은 지방선거와 유럽선거에서 이겼으나 지난 세 차례 보궐선거에서 모두 3위로 밀려났고, 여론조사에서 이미 노동당에 밀리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은 노동당도 불신하지만 보수당은 더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보수당은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다. 몇몇 보수당 중진들이 반란표를 던져 유럽연합 선거에서 반유럽 노선을 취하고 있는 영국독립당을 미는 바람에 이 문제가 새삼 불거지게 됐다. 유럽연합 선거에서 영국독립당은 16%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12석을 차지하는 등 예상을 뛰어넘는 선전을 했다. 만약 내년 총선에서 같은 보수주의 노선을 걷는 영국독립당이 조금이라도 보수당 표를 갉아먹는다면 보수당은 심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투표율 떨어지고 무소속 약진
보수당의 고민은 이뿐이 아니다. 노동당이 우경화하면서 보수당 정책의 알맹이를 계속 빼먹고 있다. 노동당은 과거 전통적인 보수당 상징인 ‘법질서 유지’라는 슬로건을 정책의 전면에 내걸고 있다. 더 밉살스러운 것은 소비자에게 서비스의 선택권을 주자는 명분으로 공공 서비스를 사기업에 개방해야 한다는 보수당의 정책이 이제 노동당의 주요 정책으로 둔갑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보수당은 아직도 저속하고 극단주의적이며 분열적이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당수 마이클 하워드는 그런 구태의연함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다.
현재 집권 노동당은 국민에게 인기가 있어서라기보다 야당인 보수당이 워낙 약하고 분열돼 있다 보니 그 반대급부로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대처 총리 시절의 보수당과 비슷한 모습이다. 또 노동당이 선거에서 실적이 저조하고 체질이 약화되는 바람에 도리어 블레어의 독선적 리더십이 먹혀들고 있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제3당인 자유민주주의당에 고개를 돌려보자. 노동·보수 양당에 견줘 그 진부함에서 별로 나을 게 없으나, 다만 이라크전을 반대해 두 정당이 잃은 표를 거둬들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하지만 대개 총선에서는 표가 원래 자기가 밀던 당에 돌아가는 게 관례이고, 여론조사 결과도 모든 점에서 자유민주당은 노동당과 보수당에 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당은 다음 총선에서 20자리 정도를 얻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제 국민들의 기성 정당에 대한 혐오감은 정치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투표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최근 약간 늘어난 경향을 보이긴 했어도 전반적으로 투표율이 떨어지고 있어 대중이 현실 정치에 얼마나 식상해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1세기 만에 처음으로 총선의 투표율은 60% 이하를 기록하고 있다. 그 밖에 다른 선거에서는 겨우 40%의 투표율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노동당이 다음 총선에서 전체 투표율 60% 가운데 겨우 35% 정도의 표를 얻을 것이며, 이 정도로 국회 다수당 지위를 차지할 것 같다고 본다. 그러나 전체 국민을 감안하면 지지율이 아주 낮은 것이다. 두 번째 현상은 무소속이 지역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거 약진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지방선거에서 세 주요 정당 외의 군소정당이 전체 35%까지 투표하는 경향을 보였다.
국민들의 현 정치판에 대한 불신은 무기 사찰관 켈리 박사의 사인을 두고 정부의 책임을 밝힌 허튼 조사위원회의 결과를 국민 다수가 압도적으로 환영한 모습이나, 이와 대조적으로 이라크전 추진을 ‘집단적 책임’으로 얼버무린 버틀러 조사위원회의 보고를 외면하는 국민들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영국 국민들은 이제 그전에 자기가 애착을 가졌던 전통 여당 혹은 야당을 버리고 군소정당이나 무소속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구국가주의당과 지역당, 소수민족그룹 등의 등장이 이제 군소정당 정치시대 출현의 모체가 되고 있다.
거대 정당의 정치 지배 끝날 듯
지금의 소선거구제는 거대 정당들의 정치 과점을 허용하고 있다. 이로써 역대 총리들은 다수당을 끼고 있는 점을 이용해 당과 내각을 지배하는 통치 스타일을 구사해왔다. 하지만 많은 유권자들은 이런 권력 남용 때문에 정치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난 유럽연합 선거와 몇몇 지역선거 등은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면 군소정당들이 얼마나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물론 아직은 조심스러운 진단이나 아마 블레어 정부를 끝으로 한두개의 거대 정당이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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