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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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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와히드3] 수하르토에게 시달리다

등록 2004-05-28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3]

<font color="maroon">무슬림 조직에서의 내 영향력을 거세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 지식인 규합해 민주화 포럼을 결성하다 </font>

▣ 압두라만 와히드(Abdurrahman Wahid)/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 구술정리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 시사주간지 기자

1971년 5월4일, 나는 아랍과 유럽 유학을 끝내고 인도네시아로 되돌아왔다. 그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학문뿐만 아니라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에서도 많은 경험을 했고, 또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인도네시아로 돌아와서는 좀방의 테부 이렝 대학 종교근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가 창간되면서부터 이슬람, 국가, 사회를 주제로 삼아 본격적으로 칼럼을 썼다.

왜 나는 한쪽 눈을 쓰지 못하게 됐나

1973년부터는 삼촌을 도와 테부 이렝 페산트렌(무슬림 기숙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사회교육정보조사연구소(LP3ES)라는 비정부기구(NGO)를 결성했다. 하비비 대통령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아디 사소노(Adi Sasono)와 다왐 라하르조(Dawam Rahardj), 아스왑 마하신(Aswab Mahasin) 같은 이들과 함께 결성한 LP3ES는 197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비정부기구 출현의 시발점이 됐다.

그렇게 의욕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던 나는 1978년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 눈에 장애를 입고 말았다. 그 사고는 오늘날 내가 한쪽 눈을 쓰지 못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데나냐르 페산트렌 부근에서 스쿠터를 몰고 가던 나를 자동차가 들이박았다. 뼈가 부러지거나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왼쪽 눈의 망막 일부가 떨어져나갔다.

안과의사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회복할 수 있다고 충고했지만, 불행하게도 조급증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세미나를 준비하며 눈을 혹사하고 말았다. 결국 내 망막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안구 수술을 받고자 여러 차례 자카르타를 오가면서 자카르타로 터전을 옮길 때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79년 자카르타로 옮긴 나는 첫 번째 일로 남부 자카르타 지역에 치카뉴르 페산트렌을 세웠다. 그리고 1년 뒤인 1980년 인도네시아 최대 무슬림 조직인 나들라툴 울라마(Nadhlatul Ulama)의 종교자문위원회 부의장에 선출됐다.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종교, 종족, 계율 같은 사안을 중심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 그 시절 내 안에 꿈틀거리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어떤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열심히 문화판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1983년 자유주의 지식인, 저술가, 예술가들은 나의 영화와 문학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인정했는지, 나를 ‘자카르타 예술위원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 직책은 무슬림 서당 격인 페산트렌 출신자로서는 매우 특이한 자리였다. 사람들은 내가 전국적인 무슬림 조직인 나들라툴 울라마 지도자라 해도 그런 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심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나는 한술 더 떠 1987년 ‘인도네시아 필름 페스티벌’ 심사위원을 맡기까지 했다. 이것은 무슬림 전통 가치관을 고집하는 보수적인 이들에게 공격의 표적이 됐다.

그러면서 정치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나는 정치운동을 지식인의 의무로 여겼다. 1982년 총선이라는 현실정치에서 나는 연합개발당(PPP)을 적극 지원했다. 연합개발당이 내키진 않았으나, 수하르토 정권이 자신의 골카당(Golka)과 인도네시아민주당(PDI) 그리고 연합개발당, 그렇게 오직 세 정당만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던 시절이라서 어떻게든 두 야당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현실정치 속에서 두 야당을 키워야만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다고 믿었던 셈이다.

수하르토에 대한 이중전략

그 무렵, 내 정치적 판단은 1977년 총선에서 누르초리시 마뒤드(Nurcholish Madjid)가 베착(삼륜차)에 비유한 이른바 ‘베착 논쟁’과 궤를 같이했다. 누르초리시는 1977년 연합개발당을 지원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바퀴 세개 가운데 하나가 바람이 빠진다면 베착은 굴러갈 수 없다. 바람을 넣기 전에는 절대로.” 하지만 누르초리시가 1977년 연합개발당을 지원했을 때는 놀라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으나, 1982년 내가 연합개발당을 지원하고 나서자 많은 이들이 크게 놀라며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 내 정치적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건 1978년 ‘수하르토맨’인 댜엘라니 나로(Djaelani Naro)가 연합개발당 지도자가 되면서 당내에서 나들라툴 울라마 출신 정치가들이 큰 곤욕을 치르는 가운데 내가 1982년 연합개발당을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경찰과 악연을 맺기 시작했다. 야당을 지원하면서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당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밀선을 통해 인도네시아군(ABRI·TNI의 전신) 본부에 있던 친구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도움을 받았다. 군부쪽에 있던 친구들은 늘 효과적으로 나를 석방시켰다. 당시 군부 내에는 ‘온건 이슬람주의’ 철학을 통해 사회를 개발하겠다는 내 뜻을 깊이 이해하고 지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1984년 12월 나는 나들라툴 울라마 제27차 총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러자 이듬해 1월 수하르토는 자신이 공식적인 판차실라(인도네시아 국가 기본이념 5개항) 사상가로서 또 국가통치자로 인정받는 대신 나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건 전략적으로 따져보면 중요한 제의일 수도 있었지만, 현실은 양쪽 모두에게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나는 이 제안이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합법적으로 판차실라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수하르토의 야욕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는 판차실라를 민주주의와 책임 있는 정부 운영 그리고 개인이 지닌 양심의 자유 보장으로 읽어왔다. 말하자면 판차실라를 놓고 수하르토와 나의 해석법이 달랐던 셈이다.

아무튼 나는 수하르토에게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는 대원칙 아래 내가 의장으로 있는 동안 정부 특히 군과 관계를 개선해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수하르토에게 일정한 지위를 약속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강도 높은 비판을 하는 이중전략을 택했다. 그러면서 수하르토의 정부 운영을 하나씩 하나씩 물어뜯었다.

수하르토 정권과 내가 ‘허니문’을 즐기는 듯 보였지만, 나는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첫 번째 5년 임기를 채우기도 전에 수하르토는 내가 쏟아내는 정치·사회적 비판을 참아내는 데 이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수하르토가 나를 직접 공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비록 수하르토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날리고는 있었지만, 회원을 수천만명 거느린 무슬림 단체인 나들라툴 울라마에서 터져나올 거센 반발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즈음 사회 각 분야를 모두 제압한 수하르토가 의견이 다른 나를 불만스럽게 여겼지만, 나의 온건 이슬람주의와 비폭력 혁명노선만은 존경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 몸에 흐르는 아랍과 중국의 피

나는 나들라툴 울라마라는 거대조직을 통해 인도네시아 사회 내부의 인종·종교 차별 반대운동에도 왕성한 정력을 바쳤다. 고백하건대 내 핏줄은 소수인종 출신이었고 그건 내 태생적 비밀이기도 했다. 내 몸에는 아랍과 중국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선대 할아버지는 아랍에서 그리고 할머니는 중국에서 온 이민자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1989년과 1994년 연속해서 나들라툴 울라마 의장에 선출됐다. 그 과정에서 1994년 수하르토는 나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수하르토는 나와 의장직을 놓고 경쟁했던 아부 하산(Abu Hassan)을 지원하며 나들라툴 울라마의 내분을 획책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사람들이 나를 전폭 지원하는 것으로 끝났고, 아부 하산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게로 되돌아왔다.

그 무렵 수하르토는 나의 비판을 아니꼽게 여기며 1990년대 초부터 보수적 무슬림 지식인 단체인 인도네시아 무슬림지식인협회(ICMI)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ICMI는 수하르토 시절 부통령을 지낸 하비비 전 대통령이 의장직을 맡아 이끌던 단체다. 수하르토와 ICMI에 참가했던 내 친구들은 나를 ICMI로 끌어들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나는 그것이 수하르토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종교적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술책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단호히 거절했다. 물론 나는 대부분의 ICMI 회원들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들임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이들을 존중했다. 그러나 일부 분파주의자들이 ICMI를 사유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나는 경고했고, 결과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대신 나는 종교와 사회 부문을 통틀어 지식인 44명을 규합해 민주화 포럼(Forum Demokrasi)을 결성했다. 나는 이 조직을 통해 소수정예 사회운동을 펼쳤다. 너무 거대한 조직인 나들라툴 울라마를 통한 운동은 수하르토 정권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고, 나는 잠시도 조용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결국 수하르토의 적이 되고 말았다.

내가 세 번째 나들라툴 울라마 의장에 선출되던 날, 회원들은 회의장 앞에서 외치기 시작했다. “수하르토 물러나라.” “수하르토 물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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