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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쟁, 이제 끝냅시다”

등록 2004-02-25 00:00 수정 2020-05-02 04:23

카렌민족연합의 전설적 게릴라 지도자 보먀 장군과 버마 최고 실권자 킨 장군의 비밀회담 필름 단독입수

이 기사는 지난 1월16일 랑군 총리 공관에서 버마 군사정부 최고실권자 킨 장군(Gen. Khin Nyunt)과 카렌민족해방군(KNLA) 최고사령관 보먀 장군(Gen. Bo Mya)이 휴전회담 때 나눈 대화다. 언론이나 외부에 단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이 대담 내용은 ‘아시아 네트워크’가 밀선을 통해 입수한 기록필름을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아시아 네트워크’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최고정치가 회담의 한 단면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버마 상황을 읽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 기사를 싣는다. -편집자

버마-타이 국경 카렌민족해방군 6여단 지역=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2004년 1월16일 랑군, 검정색 귀빈용 도요타자동차가 총리 공관으로 들어섰다. 현관에서는 군복을 걸친 수많은 ‘별’들이 초조한 얼굴로 귀빈을 기다렸다. 자동차 문이 열리자 알루미늄 지팡이에 기댄 100kg 노구가 내렸다. 그 늙은이는 1948년 버마가 독립한 뒤 55년 만에 랑군을 찾은 전설적인 게릴라 지도자 보먀 장군이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질긴 분쟁 기록을 세운 카렌 해방투쟁의 살아 있는 증인인 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별들과 어색한 미소로 악수를 나눈 보먀 장군은 카렌민족연합(KNU) 대표단과 버마 정부 대표단이 마주 앉은 회담장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지난해 총리로 취임한 버마군사정부 최고 실권자 킨 장군이 등장했다. 두 ‘적장’은 보란 듯이 두 손을 맞잡고 우의를 과시했다.

“쁘라티, 잘 지냈습니까?”

킨 장군은 대뜸 보먀 장군을 아저씨(Pla Htee)라 부르며 첫인사를 던졌다.

킨 장군은 카렌 대표단과 악수를 나눈 뒤, 버마 정부 대표단 킨옹 소장(Khin Aung)·탄툰 소장(Than Tun)·라옹 소장(Hla Aung)·초한 소장(Kyaw Han) 등을 일일이 소개했다.

킨 장군이 좀 들떠 있었다면, 보먀 장군은 굳어 있었다. 인사를 마친 두 사나이는 대표단을 향해 있던 상석 의자 둘을 돌려 서로 마주 본 채 1시간 넘게 이야기를 해나갔다.

킨: 어젯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여기(랑군) 머무는 덴 아무 문제가 없었지요?

보먀: 몸이 좋지 않아 방콕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누가 찾아와서 랑군에서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하더군요. 50년 넘게 끌어온 카렌-버마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달려왔지요. 내가 랑군 간다고 하니 반대도 만만찮았지요. 군인 독재자를 믿을 수 없다고.

킨: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보먀: 어떤 이들은 “킨을 믿을 수 있나?”라고 묻기도 했지요. 그래서 “난 그를 믿는다. 서로 만나 신뢰를 쌓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지…. 보족 킨, 이렇게 서로 만났으니 문제를 풀어내야겠지요(보먀 장군은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킨에게 버마어로 장군이란 뜻을 지닌 ‘보족’(Bojoke) 호칭을 명확히 붙였다).

킨: 쁘라티, 우리가 이렇게 어렵사리 만났는데… 우리가 형제처럼만 여긴다면 모든 건 풀리리라 믿습니다. 쁘라티는 내게 큰 형님 같기도 하고… 내가 쁘라티보다 어리니(킨은 끝끝내 보먀를 장군으로 부르지 않았다. 최고 정치 책임자가 공식회담 자리에서 상대를 ‘아저씨’나 ‘형님’으로 불렀다. 카렌민족연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용어인 듯).

보먀: 그렇지요. 반드시 형제처럼 문제를 풀어야지요. …한데 당신은 역사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군요. 우리가 그동안 요구했던 건 카렌의 정당한 지위였는데.

킨: 이렇게 마주 앉은 순간 우리는 형제입니다. 과거가 그들의 시간이었다면 현재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과거를 돌아보지 맙시다. 이 만남으로 이미 역사적인 버마연방을 세운 셈입니다. 그동안 나는 17개 소수민족 무장투쟁 세력들과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카렌이 빠져 있었어요. 내 마음은 어떻게든 카렌과 평화협정을 맺겠다는 건데…. 그러자면 절대로 외세가 끼여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외부의 간섭 없이 형제끼리 우리 힘으로 평화를 이뤄냅시다.

보먀: 내가 바라는 건 오늘부터 당장 카렌과 버마 사이에 전투를 멈추자는 거지요.

킨: 아무 문제 없습니다. 사실은 외세가 문제를 과장하고 확대시켜왔을 뿐이지요.

보먀: 나는 회의나 대중연설 때마다 카렌의 적은 버마인이 아니라는 걸 강조해왔습니다. 지난 50년간의 투쟁에서 우리가 싸운 대상은 버마 군인들이 쥐고 있던 군사적 주도권과 버마 중심 민족주의였고(보먀 장군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두드리며 말했다).

킨: 독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린 평화를 위한 7단계 ‘로드맵’을 제시한 뒤 그 준비작업을 해왔고, 곧 민주주의로 갈 겁니다. 나를 믿어주십시오. 나는 쁘라티를 믿습니다. 내가 쁘라티를 믿고, 쁘라티가 나를 믿는다면 모든 건 끝납니다(킨 장군은 등받이에 기댄 자세를 버리고 엉덩이만 의자에 살짝 걸친 채 탁자 앞으로 바짝 다가앉아 대화에 임했다).

보먀: 만약 당신이 문제 해결을 원한다면 단순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길을 택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경험했어요. 1950년대 말 우누(U Nu) 시절 카렌 사람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또 통보도 없이 버마 정부가 독단적으로 카렌주를 만들어버렸고….

킨: 우누는 이미 사라졌고, 당시의 반파시트인민자유동맹(AFPFL)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없습니다. 자꾸 그런 과거만 돌이킨다면 미래도 힘들어져요.

보먀: 그래도 과거를 봐야 합니다.

킨: 예, 좋은 것들만 보자는 뜻이지요. 우린 정치가들이 아니잖아요. 군이 잠정적으로 권력을 잡았을 뿐, 독재자가 아닙니다. 우리 군인들은 국가와 헌법을 세우기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보먀: 당신의 의견이 나와 다르군요. 버마의 현실 속에선 지금 군인도 정치가입니다. 군인들이 정치와 관련된 모든 일을 하고 있잖아요.

킨: 현재만 놓고 본다면, 그렇긴 하지요. 우리 군인들도 정치가가 맞습니다(겸연쩍은 듯 그는 웃음소리를 높였다). 이젠 좀 쉬면서 젊은이들에게 회담 과정을 맡기세요.

보먀: 만약 당신이 평화를 구축한다면, 악동이 아니라 좋은 이름을 남기게 될 겁니다.

킨: 옳고 그름은 역사가 말해주겠지요. (킨은 느닷없이 대표단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당신들은 우리가 지금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합니까? (대표단 폭소) 카렌 말로는 형제를 어떻게 부릅니까?

보먀: 로푸웨(Law Phoo Wei)라고 말합니다.

킨: 그럼 쁘라티와 로푸웨 가운데 어느 걸로 불러드릴까요?

보먀: 둘 다! (대표단 폭소) 모두들 기뻐할 거요. 이렇게 친밀하게 나눈 대화를 알게 되면.

킨: 모든 이들이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겠지요. 당신도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결국 안락한 삶을 지닐 수 없었잖아요. 이제 모든 걸 잊고 여기서, 방문자가 아니라 조국에 돌아온 기분으로 편안하게 쉬세요.

보먀: 우리가 산속에다 살 집을 지어놓으면 당신이 모두 불태워버렸으니….

킨: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대표단 폭소)

보먀: 포토(Pho Hto·버마어로 ‘조카’란 뜻을 지닌 호칭으로 킨을 부르는 말임), 늘 외세 개입을 비난하면서도 당신들은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왔지요?

킨: 중국한테 얻은 게 아니라 필요한 걸 구입한 겁니다. 미국이 봉쇄한 상황에서 대안이 없으니까요. 미국은 버마에 허수아비 정부를 세워 중국을 압박하겠다는 전략을 세웠어요. 모든 게 잘 풀리면, 나도 카렌을 찾아가겠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다른 소수민족들에게는 편지를 보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에게만은 두번씩이나 편지를 보냈으니….

보먀: 언제부터 휴전이 시작되는 건가요? 모든 게 확실하다면, 그걸 서명하는 게 좋겠는데.

킨: 그건 이미 모두가 인정한 것이고….

보먀: 내가 듣기론 탄쉐 장군(Gen. Than Shwe)과 몽예 장군(Gen .Maung Aye)은 인정하지 않았다던데?

킨: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게 결정되면 탄쉐 장군을 직접 만나게 해드리지요. 당신도 그를 만나길 원하겠지요?

보먀: 물론이지요.

킨: 그러니 카렌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모든 걸 확실하게 끝냅시다.

보먀: 나도 그렇게 되도록 애쓰겠어요. 한 가지, 만약 ‘민족대표자회의’에 민주카렌불교도군(DKBA·카렌민족연합에서 이탈해 버마 정부군과 손잡은 분파)이 참여한다면, 우리는 불참할 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둡니다.

킨: 그런 건 지금 결정하지 맙시다.

보먀: 나는 카렌쪽에서 여러 그룹들이 민족대표자회의에 참여하는 건 인정하지 않습니다. 카렌민족연합만이 유일한 대표성을 지녔으니….

킨: 좀 의견이 다르지만,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대화를 마친 보먀 장군과 킨 장군은 대표단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이걸로 날 때리려는 건 아니지요?”

킨 장군은 보먀 장군의 지팡이를 들고 농담을 나누며 보먀 장군을 현관에서 배웅했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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