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셰비치 이유의 유고, 클린턴 이후의 미국… 발칸반도는 아직도 물음표에 묶여 있다

“우리가 지난 90년대 초 세르비아와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유고연방에서 떠나려 한 것은 우리 손으로 우리 삶의 질을 높이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만약 그대로 유고연방에 남아 있었다면,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민족주의에 휘둘려 지금 같은 경제성장은커녕,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속에 경제제재나 당했을 것이다.”(크로아티아 국회의원 즈덴코 프라니치)
“보스니아내전과 코소보전쟁을 비롯해 밀로셰비치가 90년대 발칸정치무대에서 악역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이었지, 악한이 아니었다. 세르비아민족주의의 논리에 따라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주역배우가 코슈투니차로 바뀌었다고 발칸반도에 긴장이 사라질 걸로 보는 것은 안이한 견해다. 코슈투니차의 향후 행보를 지켜봐야 한다.”( 보스니아 외무차관 후세인 지발류)
“말이 유고연방이지, 실체는 세르비아다. 우리가 유고연방이란 족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실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이다. 연방에 남아 있어 봤자 득보다 실이 크다. 해외투자가들이 안심하고 이곳에 투자하려면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이 선결과제다.”(몬테네그로 대통령보좌역 미오드라그 부코비치)
“불행하게도 세르비아의 민주화세력이라는 사람들도 코소보에 관한 한 밀로셰비치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가능한 이른 시일 안에 총선을 치르고 제헌의회를 구성해 독립국가로 나아갈 것이다.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 되는 게 우리의 꿈이다.”(코소보 정치지도자 이브라힘 루고바)
벨그라드 정권변화, 환영 속 경계 눈길
발칸지역 정치인 4명의 화두는 모두 세르비아에 모아진다. 91년부터 유고연방에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잇따라 떨어져 나오면서 유고연방은 이름만 남았다. 밀로셰비치는 위대한 세르비아 건설을 정치구호로 내걸고 연방 탈퇴를 꾀하는 이웃 나라의 세르비아계들을 부추겨 잇따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전쟁범죄자란 낙인과 세르비아 영토 안으로 밀려든 70만명의 난민뿐이었다.
워낙 세르비아민족주의에 덴 까닭일까, 발칸 이웃나라들은 올해 10월 들어 극적으로 일어난, 밀로셰비치 퇴장과 코슈투니차 새 정권의 등장을 긍정적인 변화로 보면서도 마음을 쉽게 놓질 않는다. 세르비아민족주의에 관한 한 코슈투니차도 밀로셰비치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서다. 어려운 경제여건 아래서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를 발칸의 군사대국으로 키워놓았고, 휴화산 마냥 잠복해 있는 발칸반도의 종족간 분규가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계의 눈길을 보내는 세르비아 이웃 국가들을 의식해 코슈투니차는 집권 뒤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를 잇따라 방문해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자”고 강조했다. 그러나 후세인 지발류 보스니아 외무차관의 말대로 “아직은 지켜보겠다”는 게 주변 국가들의 태도다. 90년대 전반기의 혹독했던 전쟁을 잊기엔 상처가 아물지 않은 까닭이다.
보스니아는 내전이 끝난 지 5년이 지났건만, 국제사회의 보호령에 가까운 모습으로 빈곤탈출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다. 84년 올림픽을 치렀던 수도 사라예보 시내 곳곳에는 내전으로 파괴된 많은 건물들이 흉한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 슬로베니아와 보스니아 사이에 있는 크로아티아도 연방 탈퇴과정에서 밀로셰비치 정권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 곳곳에 상흔을 지니고 있다. 수도 자그레브의 현대적인 건물들을 보면 제법 뭔가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세르비아 접경 부코바르 마을 등에 가보면, 많은 건물들이 파괴된 채 그날의 갈등을 증언하고 있다.
코스투니차 끌어안은 미국

세르비아는 그리스정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톨릭, 보스니아는 회교도와 그리스정교다. 종족도 다르고 따라서 문화와 정서도 다르다. 사는 수준도 다르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를 지닌 나라들이 2차대전 이후 40년 넘게 유고연방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티토의 강한 정치적 구심력 때문이었다. 80년대 초 그의 죽음 이후 그만한 정치력을 보인 정치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유고연방은 내부 갈등을 보였고, 80년대말 동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비에트연방 해체는 연방 해체의 결정적인 촉매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티토가 90년대 초까지 살아서 응집력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가설적인 물음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정치력과 티토의 그것이 너무나 대조적인 면모를 보이기 때문에 나온다.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민족주의를 자극해 자신의 집권에 이용했다.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급기야는 인종청소를 하려 들었다. 유고연방에서 슬로베니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90년대 전반기에 하나둘씩 떨어져 나간 것은 바로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민족주의에 경계심을 느낀 때문”이라는 게 발칸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풀이다.
발칸 주변국가들의 정서와는 달리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는 코슈투니차를 일단 끌어안는 모습이다. “유고연방은 91년 유고연방 해체를 끝으로 해소됐다”며 공식적으로 유고연방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왔던 미국은 물론이고, 지난 99년 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공습의 한 주역이었던 영국 등 서유럽국가들도 경제재제 해제를 시작으로 벨그라드 정권과의 관계개선 및 사회재건을 위한 재정적 원조에 적극적이다. 세르비아는 유고연방의 이름으로 11월1일 국제연합(UN) 회원국으로도 복귀할 수 있었다. 미국과 벨그라드 정권과의 관계개선에선 미국쪽의 클린턴 대통령이 서두르는 데 비해 오히려 코슈투니차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고 한발을 빼는 상황이다. 세르비아인들에게 클린턴은 “나토 침공의 상징인물”인 게 사실이다.
바로 이 대목에 발칸 이웃 나라 지식인들은 눈길을 준다. 크로아티아 최대일간지인 의 외신담당 국장 토미슬라브 드르지치는 “비록 밀로셰비치를 민중혁명으로 몰아내긴 했지만, 세르비아 국민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여전히 세르비아민족주의 선상에 있고 코슈투니차도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코슈투니차는 클린턴 이후 정권과 거래를 하겠다는 것일까. 대선 토론과정에서 부시 후보는 발칸에서 미군병력을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현재 보스니아와 코소보에 주둔중인 국제평화유지군 6만5천명 가운데 미군은 1만명에 이른다. 부시의 이같은 발언은 1차세계대전 뒤 국제연맹에조차 가입하지 않았던 미국의 고립주의를 떠올린다. 부시의 외교정책 보좌역 콘돌리자 라이스는 부시의 발언에 대해 이른바 역할분담론을 꺼냈다. “유럽국가들이 지상병력을 맡고, 미국은 첨단장비 쪽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의 인명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이런 발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1999년 코소보전쟁에서 지상군을 보내기 앞서 미국은 78일 동안 공중폭격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다. 아무튼 클린턴 행정부를 포함한 미국의 기본 발상은 “유럽 문제는 유럽이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미국의 영향력 축소를 뜻한다 할지라도 인기없는 해외파병은 될수록 줄이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움직임과 관련, 15개국으로 구성된 유럽연합(EU)은 2003년까지 6만명의 신속배치군을 구성해 국제평화유지군으로 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 6만명 속에는 물론 미군은 포함돼 있지 않다.
아직도 남은 숙제, 코소보

선거혁명에 좌절한 민중의 봉기를 통해 벨그라드 정권의 새 실력자로 나선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가 풀어야 할 큰 정치적 과제의 하나는 코소보다. 코소보는 지난 10·27지방선거를 통해 시장을 비롯한 지방행정부서장 선거를 치렀다. 물론 코소보의 소수계인 세르비아인들이 불참한, 200만 코소보 알바니아인들만의 정치축제였다. 이번 선거에서는 온건파 지도자 이브라힘 루고바의 정당 코소보민주연맹(LDK)이 30개 행정단위 가운데 27개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코소보해방군 지도자로 코소보전쟁의 불길을 당겼던 32살의 젊은 영웅 하심 타치가 이끄는 코소보민주당(PDK)의 참패였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나토군이 코소보를 점령한 이래 처음 치러진 이 지방선거가 코소보 자치를 넘어 독립국가로 가는 첫걸음으로 여긴다. 말하자면 이번 선거를 통해 누가 코소보 독립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잘 닦을 적임자인가를 뽑는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이브라힘 루고바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이브라힘 루고바의 한 측근은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코소보는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른 시일 안에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실시,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독립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가도록 노력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문제는 코슈투니차 자신이 코소보 문제에 관한 한 밀로셰비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충적인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코소보의 정치적 운명에 관한 한 코슈투니차는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는 온건파가 아니다. 코소보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라이플 총을 휘두르며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는 밀로셰비치가 코소보 위기를 불러일으킨 점을 비판했지만, 아울러 코소보에 대한 나토의 무력개입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밀로셰비치가 1995년 데이튼평화협정으로 보스니아내전을 끝내려 하자,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입지를 옹색하게 만든다고 밀로셰비치를 비판했을 만큼 세르비아민족주의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코슈투니차가 야당연합의 대선 후보자로 추대된 주요한 배경이 바로 코소보였다. 그러나 코슈투니차는 국제사회의 고립을 벗어나고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서인지 코소보문제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 자극적인 발언은 삼가는 모습이다.
대알바니아 건설에 주변국들 신경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들, 특히 당사자인 세르비아와 이웃 마케도니아가 경계심을 보이는 부분이 바로 대알바니아(great Albania) 건설론이다. 대알바니아론은 뿌리가 깊다. 지난 1912년 유렵 열강들이 발칸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코소보를 신생 알바니아공화국에 주지 않고 세르비아쪽에 안겨주었다. 그때 이래 코소보는 알바니아민족주의의 큰 관심사였다. 이웃 마케도니아에도 200만 인구 가운데 4분의 1 가까이가 알바니아계다. 이들이 어떤 정치적 계기를 타고 대알바니아 국가건설운동에 기울 경우 국가존립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코소보 정치인들이 대알바니아론을 꺼내지는 않는다. 그걸 말할 단계가 아니다. 오로지 독립을 말할 뿐이다.
코소보의 미묘한 장래에 얽힌 삽화 하나. 붉은 바탕에 독수리가 크게 그려져 있는 깃발, 바로 알바니아 국기다. 필자가 지난 6월 나토군의 코소보 진주 1년을 맞아 코소보 제1도시 프리스티나에서 열린 코소보인들의 기념식 행사장을 찾았을 때, 그곳은 온통 붉은 독수리깃발이었다. 알바니아 국가가 울려퍼질 때는 10만 관중이 모두 일어섰다. 그러나 200만 코소보인들은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알바니아 국기를 휘두를 수 없었다. 국제법상 현재로서는 코소보가 유고연방(사실상 세르비아)의 주권 아래 속하는 영토로 보는 국제연합(UN)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이 코소보 안에서 알바니아 국기를 휘두르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벨그라드 정권의 변화를 큰축으로 발칸정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 상황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강경파가 퇴조를 보이고, 온건파가 득세하는 흐름이다. 최근의 코소보가 그렇고, 크로아티아가 연초에 그런 쪽으로 정권교체를 이뤘다. 11월11일에 치러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총선에서도 강경파인 세르비아민주당(SDS)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서방세계에 우호적인 세르비아사회민주당(SNSD)의 지지율이 높아졌다. 보스니아의 총선을 관리하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현지 책임자인 로버트 베리 대사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발칸지역 유권자들도 이제는 극단논리의 정치보다 경제발전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며 극단세력들이 점차 퇴조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슬로베니아도 지난 10월 중순 총선을 통해 보수파인 안드레이 바유크가 물러나고 중도좌파로 개방론자인 야네즈 드르노프섹이 지권했다. 1인당 구매력이 1만달러(1999년)를 넘는 슬로베니아는 발칸국가들 가운데는 EU 가입 0순위로 손꼽히는 국가다. 그러나 보스니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발칸 국가들이 낮은 국민소득, 높은 실업률 속에 허덕이고 있다.
발칸의 큰 그림을 그린다면, 일단은 희망적인 무지개쪽이다. 이들 발칸국가들 모두의 구호는 경제발전과 사회재건이다. 큰 가닥은 돈줄을 쥔 서유럽과 미국의 주문대로 개방과 국영기업 매각을 통한 사유화다. 이들 발칸 국가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유럽연합(EU)의 정회원이 되는 것이다. 발칸의 봄은 이렇게 오는 것일까.
글·사진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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