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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아들 '불난 집에 부채질'

등록 2000-07-19 00:00 수정 2020-05-02 04:21

고입시험 뒤 만취상태로 경찰에 연행돼… 최근 곤경에 빠진 노동당 정부 “힘 빠지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수난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영국은 블레어 총리의 맏아들인 유안 블레어(16)의 음주사건으로 며칠째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유안은 한국의 고입 연합고사에 해당하는 GCSE 시험이 끝난 지난 7월5일 밤 11시, 런던의 번화가인 레스터 스퀘어에서 만취한 상태로 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더욱이 그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이름은 유안 존, 나이는 18살이라고 속이고 옛날 주소를 대 자신이 총리의 아들임을 은폐하려고 했다.

아버지되는 게 총리보다 어려워

이 소식이 온 장안에 번져나가면서 가장 난처해진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토니 블레어 총리. 갓 태어난 막내둥이 리오와 함께 포르투갈에서 출산휴가를 보내다 급히 돌아온 그는 부인 셰리와 함께 켄싱턴경찰서에 불려가는 참담한 수모를 겪었다. 그날 블레어 총리는 와의 회견에서 “우리 가족이 모든 면에서 높은 기준을 만족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 아들이 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것이 내가 믿는 바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면서 사뭇 당당한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그도 흑인교회지도자대회에서는 준비한 원고를 뒤로 미루고 즉석 연설을 통해 “총리란 직업은 어렵다. 하지만 아버지가 되는 것은 더 어렵다”고 토로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블레어 총리가 더욱 난처해진 것은 그가 며칠 전에 주창한 현장벌금제도가 바로 아들의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불거지기 일주일 전, 그는 음주의 심각성을 경고하면서 앞으로 술꾼들(drunken yobs)에 대해서는 발견 즉시 현장에서 벌금을 받는 제도를 강구해 보겠다고 밝혔다. 이 제안은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경찰 총수는 즉각 이 제도가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이며 실행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한밤중에 만취한 사람을 근처 은행 현금창구로 끌고 가 현금을 찾게 해서 벌금을 받을 만큼 경찰이 한가하지도, 유능(?)하지도 못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런던 번화가에서 만취한 상태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블레어 총리는 음주 벌금제도가 아들을 위해서 만들려던 제도냐는 비아냥까지 듣게 된 것이다.
언론이 이런 얘깃거리를 가만 놔둘 리가 없다. 평소에 노동당을 싫어하던 등 보수적 신문들의 논조는 매우 신랄하다. ‘수신제가’도 못하면서 ‘치국’을 하려 한다는 자격 시비에서부터,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기 전에 동정만을 구하려 한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며칠에 걸쳐 사설과 기사, 여론투고함에서 이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늘어지고 있다. 어떤 신문은 유안에게 “술취한 사람을 그냥 두고 가는 친구들은 친구가 아니다”며 친구를 잘 사귀라는 충고까지 곁들였다.
같은 중도적 신문들은 유안이 16살이면 아직 배울 것이 많은데 너무 나무라지 말라, 다만 음주자에 대한 현장벌금제도는 실행되기도 어렵고 인권침해요소도 있으니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등 평소에 블레어 총리에게 동정적인 신문들은 ‘더욱 힘내라’고 다독인다. 하지만 이 신문들도 블레어 총리의 리더십이 와해 수준이라는 따가운 지적은 잊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블레어 총리는 사상 유례없는 높은 인기를 누려왔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인품에다가, 7년째 계속되는 경제 호황으로 총리 취임 이후 3년 동안 그의 개인적인 인기와 당의 인기는 계속 보수당을 앞질러왔다. 집권 1년 뒤면 집권당의 인기가 야당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통상적인 패턴이었기에 이런 현상은 매우 예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연이은 악재, 태평성대는 갔다

하지만 이런 태평성대는 지난달 이후 잇단 악재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6월10일, 막내아들이 태어난 뒤 처음 연설을 행한 여성대회장에서 블레어 총리는 참석자들로부터 여성정책이 겉돌고 있다는 심한 야유와 조롱을 받았다. 이어 유로2000 축구대회에서 영국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유럽축구협회로부터 앞으로 영국팀의 경기 참가를 금지할지도 모른다는 경고 조처를 받으면서 야당은 정부의 훌리건 대책 부재를 거세게 공격했다.
더욱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영국의 휘발유값이 앞으로 더 오를 것이라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블레어의 절친한 친구이자 노동당 모금담당이었던 거부 켄 폴렛마저 블레어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정도였다. 게다가 7월4일에는 영국이 하루빨리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영국 제조업이 와해된다는 보고서가 발표돼 유럽연합 가입을 놓고 미적거리던 노동당 정부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7월5일 밤, 블레어 총리가 연설문 준비로 씨름하고 있는 동안 아들은 런던 대로상에서 만취한 채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아무래도 2000년은 블레어 총리에게 악몽 같은 한해로 기억될 것 같다.

옥스퍼드=주미사 통신원lamess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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