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 선수가 6월28일 새벽(한국시각) 독일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의 러시아월드컵은 막을 내렸다. 1승 2패로 다시 조별 예선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독일 경기가 끝나자 어떤 아쉬움도 없이 선수들에게 힘껏 박수를 보내고 나 자신도 한껏 충만해졌다. 어찌 나뿐이랴. 스포츠(‘월드컵’이 아니다!)로 어떻게 우리 삶이 고양될 수 있는지를 경험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월드컵을 다시 생각한다.
2002년 월드컵,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이 열린 대전 월드컵 경기장. 한국 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는 응원석에 “Again 1966”이라는 카드섹션을 펼쳤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때 북한은 조별 예선 마지막 3차전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Again 1966”은 우리가 그 승리를 재현하자는 것이었고 마침내 2-1로 극적인 역전승을 이루어냈다.
그렇다면 월드컵 4강의 대성공을 거둔 “Again 2002”는 가능한가? 나는 이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이 개최국인데다 히딩크의 대표팀은 그전에도 없고 그 후에도 없는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았다. K리그까지 중단하면서 장기간 합숙훈련을 했다. 앞으로도 그런 지원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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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나라들은 대체로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인적·물적 축구 인프라가 구축됐고, 수많은 사람이 축구팬으로서 자기 팀을 응원하며 생활 속에서 축구를 즐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는 4년마다 한 번,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의 성적에만 관심을 가졌다.
나는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경기 전부를 실외에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 대형 스크린으로 보았다. 믿을 수 없는 투지와 열정을 보여준 경기 내용에 감동받고 열광했다. 그와 함께 나를 정녕 고양한 것은 경기가 끝난 뒤 벌어진 거리 축제였다.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포르투갈에 1-0으로 이겨 16강 진출이 확정된 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나는 그때부터 마지막 경기까지 경기가 끝나면 늘 사람들이 몰려나온 거리에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15년 만에 밟아보는 아스팔트였다. 당시 젊은 세대에게는 생애 처음 경험하는 자유로운 아스팔트였을 것이다.
나에게도 대표팀 승리에서 비롯된 민족적 열광이 없진 않았을 테지만, 그때 경기와 거리에서 느낀 감정은 굴레에서 벗어난 해방감, 영혼의 엔진을 살아 숨 쉬는 에너지로 가득 채우는 열정 같은 것들이었다.
포르투갈 경기가 끝난 날에는 ‘아, 내가 이 경험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16강 이탈리아전, 8강 스페인전의 승리로 축제가 거듭될수록 ‘이 열정으로 앞으로 10년은 버티겠구나’라는 예감으로 거리에 나갔다. 그때 내가 보고 느낀 것은 ‘모두가 하나 되는 경험’이 아니라 생동하는 인간의 삶의 열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군중을 지배한 것은 국가주의적 광기였다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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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 벌어지는 모든 경기도 국가대표 경기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모든 팀이 국가대표고 모든 선수가 나라를 대표한다. 그래서 우리는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을 응원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받는다. 그러나 올림픽에서는 월드컵처럼 열광하고 목매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올림픽에는 종목마다 대표팀이 있지만 월드컵에는 단 하나의 대표팀, 축구 대표팀만이 있다. 당연히 올림픽에서는 관심이 분산되고 월드컵에서는 집중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축구라는 스포츠의 특수성이 있다. 축구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원시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스포츠보다 역동적이다. 그 힘이 모이면 단숨에 화산처럼 폭발하는 격정의 스포츠이자 비장한 슬픔이 준비된 스포츠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스포츠다. 국가 간 경기에서 국민의 응원을 끌어내고 결과에 따라 터져나오는 열광과 비탄을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경기다. 생각해보라. 개인과 단체를 불문하고 축구만큼 환호와 비탄이 쏟아지는 경기가 있는가?
독일전에서 두 번째 골을 넣은 손흥민 선수의 표정이 기쁨으로 터질 듯하다(위). 우루과이의 세계적인 스타 에딘손 카바니의 ‘작은 예의’에 감동받는다. 그는 6월26일 새벽 3-0으로 이기는 후반 추가 시간에 교체될 때 재빨리 달려나가 러시아팀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팀이 무엇인가를 객관식으로 물어보자. 1) 축구 국가대표팀 2) 야구 국가대표팀 3) 기아 타이거즈 4) 전북 현대, 선택지를 아무리 더 추가하더라도 압도적 다수가 축구 국가대표팀을 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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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가 생기기 전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고교야구였고 실업축구의 관중은 그야말로 미미했지만, 그 시절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팀은 단연 축구 대표팀이었다. 격정적이고 역동적인 스포츠로서의 특성과 한국민의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맞물려 축구 대표팀은 늘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팀이 돼왔다. 월드컵에, 정확하게는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경기에 쏟아지는 압도적인 관심과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엄청난 열광과 비난도 그 때문이다.
열렬한 축구팬인 나도 당연히 우리 대표팀을 응원한다. 물론 다른 나라 경기들도 진지하게 본다. 독일 경기 전까지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우루과이와 러시아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있었다. 우루과이의 스트라이커 에딘손 카바니가 후반 45분에 우루과이의 세 번째 골을 넣은 뒤 추가 시간 2분을 남겨두고 교체됐다. 정확한 교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승부가 완전히 결정된 상황이어서 시간 소비용 교체는 아닌 듯했다. 보통 한 점 차이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시간에 선수가 교체될 경우, 교체 선수는 빨리 나가라는 심판의 재촉에도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나온다. 그러다 시간 지연으로 옐로카드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카바니는 자신이 교체 대상임을 알자 재빨리 뛰어나왔다. 3-0으로 승패가 사실상 결정된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하기 위해 걸어나온다는 것은 상대 팀에 예의가 아니다. 작은 행동이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그의 태도는 세계적 스트라이커에 걸맞은 품격마저 갖추고 있었다.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이처럼 월드컵 경기에는 우리가 감동할 사건이 널려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독일과의 경기로 돌아와보자.
“선수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랑스럽다. 16강에 올라가진 못했지만 선수들의 의지를 확인했다. 후회 없는 경기를 했다. 자랑스럽다. 창피한 거 하나 없다. 밤마다 응원해주셔서 잘할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희망 드린 거 같아서 감사하다.”(손흥민)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잘해줘서 고맙다. 너무나 준비 많이 했고 고생한 만큼 결과를 가져왔다. 감사하다.”(김영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나와서 행복하다. 김승규, 김진현이 나가도 잘했을 거라 생각한다. 제가 잘한 게 아니고 저희 골키퍼가 다 잘한 것이다.”(조현우)
“경기에 대한 열정, 열정을 플레이로 구현해내는 힘과 기량의 연마, 팀과 동료에 대한 헌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용기, 판정에 대한 승복, 팬과 선수의 공감과 연대, 상대방에 대한 존중.”
앞의 인용은 독일과의 경기 뒤에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뒤의 것은 내가 늘 쓰는 표현으로, 우리가 축구 경기에서 보기를 원하는 모습이고 축구가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표현만 다를 뿐 완전히 같은 내용이다.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우리가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은 선수들이 경기에서 보여준 열정과 투지와 용기와 헌신에 깊이 공감하고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어게인 2002’가 아닐까. 스포츠가 우리에게 주는 미덕이다.
그동안 우리는 국가대표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축구라는 스포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대표로 상징되는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적 열정을 소비해온 것이 아닐까. 나는 월드컵을 축구 ‘국가’ 대항전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나라마다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출전해 벌이는 ‘축구’ 경기로 보고 즐기고 싶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월드컵은 끝났지만, 남은 경기에서도 계속 이어질 ‘카바니의 작은 예의’와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선수들의 열정과 용기와 헌신에 한껏 감동받고 싶다. 독일전 처럼 정말 내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경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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