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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치로를 향해 박수칠 때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주장의 퍼포먼스였던 ‘30년 발언’… 불필요한 악감정으로 일본 스타플레이어 대하는 게 손해
등록 2015-06-12 21:57 수정 2020-05-03 04:28

한국에서 가장 오해(또는 왜곡)된 스포츠 기사 중 하나는 스즈키 이치로의 이른바 ‘30년 발언’이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직전, 일본팀의 주장 이치로는 “한국이 향후 30년간 일본 야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겠다”고 인터뷰한 것으로 국내 언론에 소개되었다. 이 발언으로 이치로는 한국의 공적이 되었고 한국 선수들은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에 2연승을 거두며 일본을 이기는 데 고작 일주일이 필요했음을 입증했다. 이치로에게 사구를 던진 배영수는 일명 ‘배열사’가 되었고 한국에 당한 2연패로 이치로는 한국과 일본 팬 모두에게 조롱을 당했다.

마이애미 말린스의 스즈키 이치로가 지난 5월6일(현지시각) 미국 내셔널스파크 야구장에서 열린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경기에서 안타를 치는 모습. REUTERS

마이애미 말린스의 스즈키 이치로가 지난 5월6일(현지시각) 미국 내셔널스파크 야구장에서 열린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경기에서 안타를 치는 모습. REUTERS

30년 발언의 정확한 워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미국 'ESPN'에서 방송된 이치로 인터뷰의 영어 번역문은 “I want to make (Korea and Taiwan) see that they will not be able to beat Japan in the next 30years”이다. 해석상의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이치로는 ‘한국과 대만’이라는 목적어를 생략했음을 알 수 있고(하지만 아시아 예선을 앞둔 시기였으니 한국과 대만임을 짐작할 수는 있고), 그들보다 30년 먼저 프로야구를 시작한 일본 야구의 자신감을 피력한,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발언 가능한 수위의 퍼포먼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인의 민감한 반응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런 장외 신경전은 프로스포츠만의 중요한 재미 중 하나이고 이 정도 수위의 도발과 반응이 불가하다면 스포츠는 재미없는 체육시간에 불과하다.

3년 뒤, 제2회 WBC에서는 ‘봉열사’가 탄생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슈퍼스타가 된 이치로를 1루 주자로 두고, 한국 투수 봉중근은 견제구를 던지는 척하는 포즈로 이치로의 민망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귀루를 2차례 끌어냈다. 이치로에게 선사한 2번의 ‘굴욕’으로 봉중근은 봉열사로 칭송받았지만, 사실 나는 민망한 상황을 겪고도 2번이나 온몸을 날려 슬라이딩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경기에 집중하는 1루 주자 이치로의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이치로에 대한 우리의 비아냥엔 이 위대한 일본인에 대한 경외감과 질투가 변이돼 표현된 감이 있다.

사실 일본의 스타플레이어가 가장 과소평가받는 곳이 한국이다. ‘30년 망언’ ‘입치료’ 등으로 조롱받은 이치로의 사례처럼 아시아 최고의 왼발 혼다 다이스케는 거듭된 빅클럽으로의 이적설에 한국인들에게 ‘혼다의 세계일주’라 놀림받았고, 도르트문트 시절 ‘차범근’급 활약을 보인 가가와 신지는 맨유 이적 뒤 ‘유니폼팔이’라 비하되었다. 한국과 일본 스포츠팬들의 유사 깊은 경쟁 심리가 낳은 적폐였지만 사실 이들은 아시아인의 어떤 한계를 개척해나간 선수들이다.

지난 6월1일, 우리 나이로 43살인 이치로는 메이저리그 통산 2877안타를 때려내며 역대 40위에 올라섰다. 미국과 일본에서의 합산 4천 안타는 이미 2013년에 달성되었고, 내년까지 선수 생활이 이어진다면 대망의 메이저리그 3천 안타 고지에 올라설 것으로 보인다(해낼 것이다, 이치로니까). 올해로 메이저리그 15년차이니 말하자면 이치로는 매년 평균 200안타를 때려낸 셈이다. 지난해 한국 프로야구에서 서건창이 한 시즌 200안타 고지를 처음 넘어서는 데 33년이 필요했지만, 200안타를 메이저리그에서 15년간 평균으로 때려낸(게다가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10년 연속 때려낸) 아시아인이 이치로다.

1995년 한-일 프로야구 선발팀 간의 한-일 슈퍼게임에서 당시 한국의 슈퍼스타 이종범과 악수를 나누던 23살의 소년 이치로. 43살이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메이저리그 선수다. 하나의 일을 누군가의 나이보다 오래 해온 사람을 장인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 야구 장인의 20년 동안의 전진을 보는 것은 한-일 정서를 떠나 야구팬의 기쁨이기도 하다. 일본 선수라는 불필요한 악감정으로 이치로를 놀리는 데 몰두하느라, 정작 이 작고 마른 선수가 저 짐승 같은 메이저리그를 어떻게 폭격해왔는지, 어떤 노력으로 스스로를 이겨왔는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야구팬으로서의 손실이다. 이제는 한국인도 그에게 박수를 쳐줄 때가 되었다.

김준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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