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으로 육상 보는 걸 좋아하지만 시합 장면보다 시합 준비 장면을 더 좋아한다. 맥주 한 캔 들고 앉아서 긴장감 넘치는 트랙과 필드 보는 걸 좋아한다. 선수들이 쭈그려앉아 신발끈 매는 장면 보는 걸 좋아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실 때 부풀어오르는 가슴 보는 걸 좋아하고, 출발 직전의 스타트라인에 서서 뻐근한 목과 팔을 휘휘 돌리는 장면을 좋아한다. 육상의 묘미는 역시 출발 직전의 긴장감이지! (아무렴!) 100m 달리기 경기는 10초 이내에 끝나고, 포환을 아무리 멀리 던져도 허공에서 1분 이상 머물 수는 없다. 육상경기는 준비 장면과 시합 장면과 환호 장면을 모두 합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육상경기 중계는 하이라이트로도 충분하다. 뭐하러 경기를 다 보나.
시합 준비 장면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긴장이 얼마나 숨막히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물론 100m를 9초대에 뛰는 선수들의 긴장과 13초대에 뛰었던 나의 긴장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달라도 한참 다르겠지만) 긴장의 강도만큼은 내가 훨씬 우위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100m 달리기 : 그래도 멀다
초등학교 때 나는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키는 컸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설펐고, 목표를 향해서 죽기 살기로 달리기보다는 시합의 과정을 즐기는 아이였다(고 좋게 포장해보자). 한눈도 팔고, 사람들 관찰도 하는 아이였(고 그래서 소설가가 되었던 것이지, 라고 좋게 포장해본)다.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내 달리기 모습은 가관이었다.
“얼마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는지 몰라. 엄마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거지. 달리기하면 꼴찌는 따놓은 거니까 엄마가 안 보면 좋은데, 안 보면 좋은데, 창피하니까 자꾸 엄마를 찾은 거야.”
어허, 내가 그렇게 섬세한 아이였구나, 싶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장면과 함께 출발선에 섰을 때의 긴장감이 떠오른다. 다 생각난다.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고, 손발이 찌릿했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결국 꼴찌일 건데 뛰어서 뭐하나 싶었다. 뛰고 또 뛰어도 100m는 너무 멀었고, 영원히 닿지 못할 것 같았다. 결승점은 멀었는데 팔과 다리에는 힘이 빠졌고, 사람들의 소리가 아득하게 멀리서 들렸다. 그 긴 거리를 선수들은 10초 만에 달리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400m 달리기 : 마라톤
고등학교 때 달리기에 재능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때는 매번 꼴찌를 했고 중학교 때도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는 좀 달렸다. 100m 달리기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1천m 달리기 성적도 중간 정도였는데, 400m는 잘 달렸다. 나도 좀 신기했다. 내가 전력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400m였다. 400m를 달리고 나면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400m 달리기는 내게 마라톤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 최선을 다해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 ‘사백 미터 마라톤’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발표했는데, 거기에 이런 문장을 적어놓았더라.
“녀석의 말대로 빠르거나 느리거나 그런 게 소용없는 거라면 뭐, 어떻게 뛰어도 상관없는 거니까. 그냥 전력질주하면 되는 거니까. 내 스피드를 찾으면 되는 거니까. 그건 단순한 거니까.”
어쩌다 이런 문장을 쓰게 됐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다시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자신의 스피드를 찾는 게 중요한 거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포환던지기(Shot Put) : 형의 재능
집안 내력인 것 같은데, 힘은 넘쳐 흐르는 반면 순발력은 좀 떨어진다. 체형으로도 그걸 알 수 있다. 가슴팍이 무척 두껍다. 아버지도 그렇고 형과 나도 그렇다. 이런 체형을 ‘(축구선수) 웨인 루니 체형’이라고 해야 하나. 조카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인데 가슴팍이 놀라울 정도로 두껍고 축구나 미식축구 선수의 체형을 축소해놓은 것 같다. 3대가 나란히 앉아 있으면 이건 뭐, 럭비팀이 따로 없다. 가족 중에서도 형은 중학교 때부터도 힘이 참 좋게 생겨서 (나는, 섬세하게 가슴팍이 두껍다!) 체육 선생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형은 체육 선생의 권유(라고 써놓고 강제라고 읽는다)로 포환던지기에 도전해본 적이 있다. 형은 며칠 만에 기권을 선언했고, 체육 선생도 순순히 형을 보내주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포환던지기에 재능이 없었던 거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포환던지기에도 재능이 필요한 거다.
해머던지기(Hammer Throw) : 누군가의 재능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어떻게 발견할까?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직업이 있고, 수많은 스포츠 종목이 있는데,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을 어떻게 발견할까? 포환던지기나 창던지기, 해머던지기, 원반던지기 같은 투척경기를 보면서,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 저 선수들은 어쩌다가 포환이나 해머를 던지게 됐을까?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커다란 포환을 발견하고 심심풀이로 멀리 던졌는데, 우연히 길을 가던 포환던지기 코치에게 발견되어 ‘길거리 캐스팅’된 것일까? 길을 가다가 커다란 쇠공에 줄이 달린 걸 발견하고 심심풀이로 빙글빙글 돌리며, 이거 아무리 돌려도 어지럽지 않네, 하며 웃고 있는데, 우연히 길을 가던 해머던지기 코치에게 발견된 것일까. 그들의 사연이 궁금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다는 사실이 참 놀랍다. 물론 서른이 넘어서도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누구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누군가에게 하나씩의 재능은 준다. 포환던지기에서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형은 지금, 동화책 일러스트레이터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가슴팍이 두꺼운, 체력이 좋은 일러스트레이터라서 일도 참 많이 한다. 포환던지기와 동화책 일러스트의 커다란 간극 사이에 수많은 재능이 존재한다.
멀리뛰기(Long Jump) : 멀리 뛰는 대신 넓게 뛰기
고등학교 체력장에서 내가 가장 자신 없어 하던 종목은 제자리멀리뛰기였다. 가슴팍 못지않게 엉덩이도 튼실해서 멀리 뛰는 데는 영 자신이 없었다. 달려와서 멀리 뛰는 건 그럭저럭 했는데, 제자리에서 멀리 뛰기는 쉽지 않았다. 제자리멀리뛰기 할 때마다 중력의 놀라운 법칙을 실감하곤 했다. 제자리에서 멀리 뛰려면 일단 높이 뛰어올라야 하고, 높이 뛰자마자 멀리 뻗어나가야 하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멀리뛰기’라는 말 대신 ‘넓이뛰기’라는 말을 썼는데, (주변에 물었더니 잘 모르네, 어, 우리 학교만 그랬나? 네이버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멀리뛰기를 ‘넓이뛰기’라고도 한다, 라고 적혀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 참 이상하긴 하다. 멀다는 건 거리를 뜻하는 거고, 넓다는 건 면적을 뜻하는 건데,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넓이뛰기라는 새로운 종목을 만들면 어떨까? 멀리뛰기와 똑같은 경기장에서 펼쳐지지만, 이건 멀리 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선수가 발구름판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가 모래에 철퍼덕 엎어지는데, 얼마나 넓은 면적의 모래가 움직이는가에 따라 승부가 결판난다. 나처럼 가슴팍이 두껍거나 몸무게가 많이 나가 스포츠를 포기한 사람들도 도전할 수 있어서 스포츠 인구를 확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모래판에 엎어진 사람들의 모습도 참 재미있지 않을까. 하하하.
육상(陸上) : 뭍 위
육상을 영어로 표현하면 ‘athletic’이나 ‘track and field’ 정도가 되겠지만 한자의 ‘육상’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간단명료하게 ‘육상경기’의 진수를 설명해준다. 육상이란 땅 위란 얘기다. 땅 위에서 달리고 구르고 던지고 뛰는 경기란 얘기다. 육상은 땅 위에 서서, 중력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다. 높이 뛰거나 멀리 뛰거나 빨리 뛰거나 멀리 던지는 인간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같은 인간이니까) 어쩐지 마음이 뭉클하고, 콧날이 시큰해진다. 숙연해진다. 저들은 어쩌자고 저렇게 달리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유가 다르겠지.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보면서 나는 그들의 달리는 이유와 재능의 사연을 내 마음대로 상상할 거다. 달리고 뛰어넘고 던지는 그들의 아름다운 몸을 즐기면서, 한편으론 땅으로 떨어지고 달리다 넘어지는 그들의 몸을 보면서 안타까워할 것이다. 대회가 기다려진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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