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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깨졌다, 밤비노의 저주!

등록 2004-11-04 00:00 수정 2020-05-03 04:23

베이브 루스의 이적 뒤 86년간 수렁을 헤맨 보스턴 레드삭스가 눈물로 쓴 2004 월드시리즈 우승사

▣ 박원식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pwseek@hani.co.kr

보스턴. 1897년부터 100년 넘게 계속돼온 국제마라톤대회로 널리 알려진 인구 60만의 도시다. 미국의 경제·상업·교육·문화의 중심지이고, 세계 최대 항만도시 중 하나다. 1765년의 인지세법 반대와 73년 보스턴 티 파티(tea party) 사건 등으로 미국의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19년, 명문팀의 추락이 시작되다

이런 도시에 뿌리를 내린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팀이 오랜 세월 동안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해 숱한 ‘야사’(野史)를 낳았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꺾고 86년 만에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챔피언 반지를 끼게 된 지난 10월28일은 월드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개기 월식 현상이 나타나 새로운 ‘야사’의 탄생을 예고했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정설로 굳혀진 ‘밤비노의 저주’가 86년 만에 깨진 것이다.

보스턴 선수단은 지난 10월31일(한국 시각) 펜웨이의 보일스톤가와 킬마녹가의 교차로에서 시작해 시청 인근 케임브리지가에서 끝나는 대대적인 환영 퍼레이드를 펼쳤고, 토머스 메니노 보스턴 시장과 래리 루치노 레드삭스 회장은 “월드시리즈 제패를 꿈도 꾸지 못했지만 모두 함께 모여 축하할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901년 미국 프로야구 아메리칸리그 창설 멤버로 출발한 보스턴은 초기 20년 동안 6번의 리그 우승과 함께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단숨에 명문 팀으로 떠올랐다.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을 연고로 원래는 보스턴 필그림스라는 이름으로 창단됐으나 1907년 구단주가 보스턴 레드 스타킹스로 팀 이름을 바꾸고, 그 뒤 언론이 보스턴 레드삭스로 줄여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잘나가던 보스턴에 저주가 붙은 것은 1919년 12월 겨울부터. 1918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비롯해 그때까지 15번의 월드시리즈에서 5차례나 우승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명문 구단이었던 보스턴은 1919년 시즌이 끝난 뒤 당시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던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팔아넘겼다.

새로운 구단주인 뉴욕의 연극재벌 해리 프라지가 이적료 12만5천달러를 받기 위해 팀의 최고 스타를 팔아치운 것이다. 베이브 루스의 애칭을 딴 이른바 ‘밤비노의 저주’(Curse of Bambino)의 시작이었다. 보스턴은 월드시리즈 우승 이듬해인 1919년 아메리칸리그 5위로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1933년까지 단 한번도 승률 5할을 넘긴 적이 없었다. 최고의 명문 팀에서 하루아침에 승률 5할을 넘기지 못하는 하위 팀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보스턴 팬들은 우연한 불운의 연속 정도로 여길 뿐 80여년간 저주가 계속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보스턴이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것은 1946년. 1918년 우승 뒤 무려 28년 만이었다. 그러나 강타자 테드 윌리엄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세인트루이스에게 3승4패로 패하며 분루를 삼켰다. 현재 86살의 노인 조 페스키는 누구보다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페스키는 1946년 월드시리즈 때 보스턴에서 유격수를 맡았다. 3승3패로 맞선 7차전 8회 수비 때 홈 송구를 잘못해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후 페스키는 ‘저주를 지속시킨 장본인’이라는 질타를 받아가며 숨어지내다시피 했다. 보스턴이 마지막 우승을 차지한 1918년에 태어난 그는 “보스턴이 우승하는 것을 보지 않고는 절대로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1946년, 1986년, 어이없는 패배들…

보스턴이 월드시리즈에 다시 진출한 것은 21년 뒤인 1967년. 그러나 공교롭게도 정상에서 맞닥뜨린 팀은 21년 전에 아픔을 준 세인트루이스였고 보스턴은 상대 에이스 밥 깁슨에게만 3패를 당하는 수모 끝에 또다시 3승4패로 우승 문턱에서 넘어졌다. 보스턴은 1975년 신시내티 레즈와의 월드시리즈에서 5차전까지 2승3패로 뒤졌으나, 6차전에서 극적인 연장 역전 홈런으로 승부를 7차전으로 몰고 갔다. 저주를 깰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3-0으로 앞서며 우승 샴페인을 터뜨릴 순간만 남긴 보스턴은 뒷심 부족으로 3-4로 역전패해 또다시 분루를 삼켜야 했다.

저주를 깰 기회는 1986년에도 찾아왔다. 약체로 평가받는 뉴욕 메츠와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것이다. 에이스 로저 클레멘스(휴스턴)를 앞세워 5차전까지 3승2패로 앞선 보스턴은 이번만큼은 저주를 깰 것으로 확신했다. 6차전에서 연장 10회 5-3으로 앞서며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에 설다. 그러나 10회 말 2사 뒤에 저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5-5 동점에서 2사 2루서 메츠의 무키 윌슨이 친 타구를 1루수 빌 버크너가 가랑이 사이로 빠트리는 ‘끝내기 알까기’라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 시리즈는 다시 3-3. 결국 보스턴은 7차전에서도 5회까지 3-0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5-8로 거짓말 같은 역전패를 당했다. 이번 월드시리즈 4차전이 끝나고 세인트루이스 홈구장인 부시스타디움엔 보스턴 팬들이 ‘우리는 버크너(?)를 용서한다’는 문구가 적힌 펼침막을 내걸기도 했다. 버크너는 지난 10월29일 라디오 스포츠 토크쇼인 ‘댄 패트릭 쇼’에 출연해 “지금 나를 용서한다는 것은 30년 동안 옥살이를 시킨 뒤 ‘이제 당신이 무죄라는 증거가 밝혀졌다’며 석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지난 1999년과 2003년에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밤비노의 저주’의 장본인인 뉴욕 양키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2003년 양키스와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7차전에서는 그래디 리틀 감독이 힘 빠진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8회에도 마운드에 올려 결국 연장 11회 애런 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아 패하고 말았다.

저주를 풀기 위한 보스턴의 몸부림은 처절했다. 지난 2002년 최연소로 보스턴 단장에 오른 예일대 출신의 테오 엡스타인(30)은 지난해 시즌이 끝난 뒤 그래디 리틀 감독을 해임하고 테리 프랑코나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오클랜드에서 코치로 활약하던 44살의 젊은 지도자 프랑코나가 보스턴을 새로운 분위기의 팀으로 만들 적임자로 판단한 것이다. 또 엡스타인 단장은 정상을 차지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투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애리조나의 커트 실링 집으로 찾아가 ‘삼고초려’ 끝에 그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마무리 투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특급 소방수 키스 풀크도 데려왔다. 지난 시즌 중반에는 당대 최고의 유격수로 꼽히는 노마 가르시아파라를 버리고 수비력이 뛰어난 올란도 카브레라를 영입하는 깜짝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이 트레이드는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엡스타인은 “내 선택이 절대 틀리지 않다”고 자신감을 보였고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프랑코나 감독은 보스턴을 개성이 강한 팀으로 조련했다.선수들에게 최대한 자유와 개성을 보장하면서 자발적으로 팀이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보스턴은 지난 9월 주포 매니 라미레스의 타구에 맞은 한 소년의 치아 2개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막판 10연승을 달렸다. 이 소년은 놀랍게도 베이브 루스가 1916년부터 10년 동안 살았던 서드베리 더튼로드 558번지에 살고 있었다. 이 사건이 저주가 풀릴 조짐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보스턴은 마침내 양키스와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3연패 끝에 4연승을 거두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파죽의 4연승을 거둬 월드시리즈 우승에 이르렀다.

보스턴은 지난 10월18일 뉴욕 양키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에서 8회까지 3-4로 뒤져 4연패로 탈락 위기에 몰렸다. 이날 경기에서 9회 말에 극적인 동점 적시타를 때려 팀을 벼랑 끝에서 구출한 주인공은 8번 타자 빌 뮐러였다. 뮐러의 동점타 이후 보스턴은 거침없는 8연승을 내달렸고 마침내 대망의 월드시리즈 정상에 우뚝 섰다.

탈락 직전 9회 말 동점타!

보스턴은 걸출한 스타를 많이 배출한 명문 팀이다. 대표적인 선수는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승 기록을 세운 사이 영과 투수로 활약한 적이 있는 베이브 루스, 그리고 영원한 4할대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있다. 최근에는 지난 1999년 3천안타를 기록하고 은퇴한 웨이드 보그스와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이 영’상 3회 수상에 빛나는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있다. 보스턴은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팀이다. 이상훈(전 LG트윈스·은퇴)과 조진호(SK), 김선우(몬트리올 엑스포스)가 보스턴의 마운드를 지킨 적이 있다. 지금은 ‘핵잠수함’ 김병현이 보스턴의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이번 시리즈에서 단 한 차례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홈런포 타자를 몰라봤네


‘밤비노’는 이탈리아어로 ‘아기’를 뜻한다. 영어 베이브와 같은 뜻으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홈런 타자 조지 허먼 루스(George Herman Ruth)의 별명인 베이브를 빗댄 말이다. 1903년 월드시리즈에서 처음 우승한 이후 1918년까지 5차례나 우승함으로써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으로 확고한 위치를 굳힌 보스턴에는, 1916년과 1918년 월드시리즈에서 투수로 활약하다 같은 해 타격 자질을 인정받아 타자로 전향한 루스가 있었다. 그러나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는 루스의 자질을 과소평가해 1920년 그를 뉴욕 양키스에 팔았다. 이후 뉴욕 양키스는 루스의 가공할 만한 홈런포 덕에 메이저리그의 최고 명문 구단으로 부상해 2002년까지 총 26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보스턴은 뉴욕 양키스로 루스를 넘긴 이후 단 한번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언론은 이를 ‘루스(밤비노)의 저주’ 때문으로 해석했다. 이후 밤비노의 저주는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불운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지난 2002년 2월에는 보스턴의 극성스러운 팬들이 밤비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보스턴 근교의 윌리스 연못에 루스가 빠뜨린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를 건지는 행사를 가졌다. 이 피아노를 다시 연주한다면 저주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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