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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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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때문에…

등록 2003-09-19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라크 추가 파병 압박받는 노 대통령의 고민… 결정 늦추며 정치적 부담 최소화 꾀해

미국의 이라크전 추가 파병 요구를 계기로 ‘노무현 외교’가 또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지난 4월 1차 파병 때의 혼선과 시행착오로부터 반면교사할지 여부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은 “상당기간 국민여론을 수렴한 뒤 어떻게 하는 것이 국익에 가장 적합한 것인지를 판단해 결정할 것”(9월13일 기자간담회)이라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또한 “국제관계, 특히 유엔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지, 다시 말해 평화유지군 성격을 분명히 하느냐가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지난 3~4월 1차 파병 때 노무현 대통령이 취했던 태도와는 일단 ‘속도감’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당시 노 대통령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서’ 전쟁 지지와 협력 의사를 밝힌 데(3월13일) 이어, 3월20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공병·의무병 파병 결정, 3월21일 국무회의 파병동의안 의결, 4월2일 국회 파병동의안 통과 등 일사천리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당시 노 대통령이 선택한 ‘신속 해법’의 성적표는 신통치 않았던 것 같다. 대선 당시 그의 주요 지지기반을 형성했던 시민사회 인사들이 대거 노 대통령을 비판하기에 이른데다, 민주당의 신주류 개혁 성향 의원들마저 ‘반전평화의원 모임’을 결성해 노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 표결로 맞섰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이 시민단체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을 수렴한다며 간담회를 갖고자 했으나, 시민단체쪽이 “결정을 다 해놓고 무슨 의견 수렴”이냐며 간담회를 보이콧하는 일도 벌어졌다.

파병 명분 약해… 당분간 관망 기류

당시 1차 파병은 그 직전의 대북송금 특검 수용 결정과 맞물리면서 노 대통령의 정치적 고립을 촉발했다. 노 대통령의 국정평가 지지율은 이 무렵부터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지지층은 이반하되, 정치적 반대계층은 붙어주지 않는 것으로 분석했다.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이라는 초보적 명제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노 대통령의 결정은 국제무대에서도 예상했던 수확을 가져다주지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박건영 교수(가톨릭대 국제정치학)는 “화끈하게 상대를 도와주면 상대방도 선의로 보답할 것이라는 센티멘털리즘이 노 대통령의 결정에 깔린 것 같았다”고 분석했다. 즉, 우리쪽이 먼저 호의를 보이면 미국이 당면한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의견을 적극 고려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렸지만, 결과는 그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부시 대통령은 5월 미국을 방문한 노 대통령에게 “이야기하기 편한 상대”라고 말했던 립서비스 외에, ‘손에 잡힐’ 과실을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고 보긴 어려운 상태다. 미 2사단 배치 문제만 해도 한-미 정상회담에선 ‘한반도 안보상황을 봐가며’라며 논의 유보쪽으로 가닥이 잡히는 듯했으나 그 뒤 재배치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북핵 문제도 한국 정부의 희망과 달리 부시 행정부는 나름의 대북 압박 수순을 한동안 밟아나갔다.

박건영 교수는 “한-미 동맹을 무시한 채 자주외교만을 고집하기 어려운 한계는 있다”며 “그러나 설령 미국을 돕더라도 국내 여론을 지렛대로 활용하며 밀고 당기기를 시도해야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존경받는 동맹 파트너로 인정받는 법”이라고 ‘1차 파병의 교훈’을 정리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당시 한술 더떴다. 방미 길에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을 만났을 때 노 대통령은 “이라크 사태와 관련해 유엔 내의 목소리가 통일되지 않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엔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동의하지 않았던 점을 두고, 미국을 대변해 유엔을 비판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그러던 끝에 문희상 비서실장이 오늘에 이르러 “유엔의 결의를 지켜봐야”라고 말하는 궁색한 처지의 단초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1차 파병의 실패 되풀이해선 안 된다”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인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동시에 벌이는 다자게임의 측면을 함께 갖고 있다. 그 과정에서 게임의 모든 주체들은 비용의 최소화와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게 돼 있다. 따라서 감상주의나 낙관주의, 어느 한쪽만을 고려한 치우친 결정은 경계해야 하며,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국면을 정교하게 끌고 나갈 자신감과 실력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우선 정부가 입장 결정을 서두르지 말고 국회와 시민사회의 논의, 국제사회의 여건 변화를 충분히 숙고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정부가 파병 방침을 신속하게 결정한 뒤 국회 파병동의안 통과를 추진했던 1차 파병 때의 역순을 고려할 만하다는 이야기다.

파병반대론에 서 있는 박순성 교수(동국대·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는 “정부가 2차 파병 문제를 두고 초기 대응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궁극적으로 미국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게 정부로서 쉽진 않겠지만 일단 최종 결론을 유보한 채 충분히 여론을 수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채정 의원(민주당)도 “정부가 먼저 결론을 내려 하지 말고 일단 정치권과 시민사회 등의 공론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며 “그런 과정을 거쳐야 어느 쪽으로 결정이 되든 반발의 구실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여건은 적잖이 복잡한 편이다. 미국이 공언하는 유엔 결의안이 다른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입장을 고려할 때 현재로선 원안대로(미국 주도권은 관철하되 다른 나라는 구색을 갖춰주는) 채택될 가능성이 우선 적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형태의 절충적 결의안이 성립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미국 주도의 결의안이 무산되면서 국제사회에서 미 행정부가 한층 궁색한 처지에 빠지지 말란 법도 없다.

또한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는 가운데 미국의 민주당이 ‘이라크 수렁’에 빠진 부시 대통령을 맹공격하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1차 파병 때처럼 한국 정부가 망설이는 제스처도 없이 부시 행정부를 선뜻 도왔다가 다음 미국 대선에서 정권이 바뀔 경우 우리 정부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초보 외교’ 벗고 원숙한 외교게임을

노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것으로 간주되는 세력들의 입장도 ‘거꾸로’ 참고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는 사설에서 “지난봄 1차 파병 때와 같은 중심 잃은 혼란과 갈등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며 “노무현 대통령과 이 정부가 중심을 잡고 사태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게 관건”(9월14일치)이라고 주장했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미국과 한국이 정식으로 이 문제를 논의한 것도 아니고 정부 안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야당이 가타부타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노 대통령의 입장이 나오면 국민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당론을 정할 것”(9월13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에선 자신들도 국내 여론 등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가급적 공을 넘겨받지 않으려고 게임을 벌이는 듯한 느낌도 읽힌다.

어쨌든 노 대통령은 9월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도 참모들에게 “어떤 사람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대외적으로 성급하게 발언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주문에선 1차 파병의 교훈을 상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녹아 있는 듯이 보인다. 노 대통령이 추가 파병 문제를 계기로 ‘초보 외교’ ‘아마추어리즘’ 따위의 비판을 벗어던지고 원숙하게 게임을 이끌어나갈지를 지켜볼 일이다.

박창식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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