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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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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에게 표현의 자유는 없는가

원세훈 전 원장 판결에 관한 비판글 ‘법치주의는 죽었다’ 올린

김동진 부장판사 징계 예정… 입에 재갈을 물고 사는 게 전세계 법관의 운명일까
등록 2014-09-24 17:20 수정 2020-05-03 04:27
국가정보원의 정치·선거 개입 사건 판결을 정면 비판한 현직 판사가 법관윤리강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계받을 처지에 놓였다. 지난 9월11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선고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명진 기자

국가정보원의 정치·선거 개입 사건 판결을 정면 비판한 현직 판사가 법관윤리강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계받을 처지에 놓였다. 지난 9월11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선고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명진 기자

대법원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정치·대선 개입 사건 판결을 정면으로 비판한 현직 부장판사의 글을 직권 삭제한 데 이어 징계도 할 모양이다. 지난 9월12일 오전 법원 내부 전산망 ‘코트넷’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올린 김동진(45·사법연수원 25기)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 말이다.

‘신영철 파문’ 이후 나온 ‘법관윤리’

김 부장판사는 원 전 원장에게 국정원법 유죄, 선거법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의 판결을 ‘지록위마(指鹿爲馬)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지록위마란 중국 진시황의 아들 호해에게 환관 조고가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주장한 일화를 말한다. 대법원은 이 글을 3시간 만인 오전 10시30분께 직권으로 삭제했다. “법관은 학술·교육 등이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구체적 사건에 관해 공개적으로 논평하거나 의견을 표명하지 아니한다”는 법관윤리강령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같은 이유로 수원지법원장이 징계를 청구하면 대법원은 공직자윤리위원회를 열어 이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법관윤리 문제로 떠들썩했던 대표적 법관은 신영철 대법관이다. 신 대법관은 2008년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광우병 촛불사건’을 맡은 법관들에게 보석에 신중을 기하라거나 재판 진행을 독촉하는 내용의 전자우편 등을 수차례 보내 비판받았다. 법관윤리 문제를 다뤄본 경험이 부족했던 우리 대법원은 진상조사단을 꾸려 국외 사례를 수집했다. 결론은 신 대법관의 행위를 “부적절한 행위”로 내렸지만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은 경고 처분만 했다. 법원 안팎에서 사퇴하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신 대법관은 버텼고 현재 그는 내년 2월 임기 만료를 앞둔 ‘최고참’ 대법관이다.

‘신영철 파문’ 이후 대법원은 를 내놓았다(2011년). 국내 법관윤리강령과 유엔, 미국, 독일 등 국외 법관윤리지침을 해설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담은 352쪽짜리 총서다. 는 김 부장판사가 위반했다는 법관윤리강령 제4조(직무의 성실한 수행) 5항을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구체적 사건’이란 자신이나 다른 법관이 담당한 사건, 또는 곧 진행될 사건이다. 둘째, ‘공개적으로’라는 의미는 법관 사이의 의견 교환이나 대화의 범주를 넘어가는 것을 뜻한다. ①사법부 외부에 대한 발언 ②사석의 대화가 아닌 공식적인 발언 ③언론이나 대중을 상대로 한 공개적 발언 등을 전부 또는 일부 포괄한다. 예를 들어 사법부 내부에서 의견을 표명했는데 이를 공식화해 우회적으로 유포하면 그것도 공개라 할 수 있다. 김 부장판사처럼 내부 전산망 ‘코트넷’에 올렸는데 언론이 보도했으면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셋째, 다른 법관의 사건은 의견 표명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재판의 독립성을 침해할 여지가 있고 그 사건의 내용도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올바른 논평은 법정에서 직접 당사자 등의 주장을 듣고 기록을 면밀하게 파악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2009년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 권고 의견 3호).

자제 요구하지만 전면 차단하지는 않아

법관윤리강령을 따르자면, 우리나라 법관은 모든 하급심 판결에 대해 학술적 목적이 아닌 한 어떠한 의견도 표명해서는 안 된다. 특히 다른 법관의 사건은 법정에서 지켜보지 못했으니 판결문만 놓고는 논평할 수 없다는 얘기다. 찬성이든 반대든 의견을 표명하는 순간 법관윤리강령에 어긋난다. ‘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한다’는 오랜 불문율과 ‘법관은 판결문만 읽고는 논평할 수 없다’는 법관윤리가 묘하게 충돌한다. 또한 우리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가 법관윤리강령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형국이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필수적 인권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입에 재갈을 물고 사는 게 전세계 법관의 운명일까?

2001년 인도 벵갈루루에서 유엔 후원으로 ‘사법 청렴성 강화에 관한 사법그룹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벵갈루루 법관행동준칙’ 초안이 작성됐고 이듬해 ‘전세계 법관이 지켜야 할 준칙’으로 정식 채택됐다. 벵갈루루 준칙을 보면, “법관은 다른 시민과 동일한 권리를 향유한다”고 적혀 있다. 그 의미는 이렇다. “현직 법관이라고 사회 구성원이 누리는 표현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포기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이전의 정치적 소신을 버리거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관심을 멈출 필요도 없다.” 다만 공정성과 사법부 독립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자제를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법관의 법적 의견 표명은 원칙적으로 허용된다. 하지만 “진행 중인 사건의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거나 절차의 공정성을 해칠 것으로 예상되는 의견 표명”은 안 된다. 또 “다른 재판의 공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공적인 의견 표명도 하지 않”도록 한다. 미국의 모범 법관행위규범도 비슷하다. 우리나라처럼 법관의 공개적 발언을 전면 차단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와 법체계가 비슷한 독일 법원에서는 법관의 표현의 자유를 이보다 폭넓게 인정한다. 독일법관연합이 1983년 발표한 ‘법관의 외부 의견 표명에 관한 원칙’을 읽어보자. “법관은 대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법관의 최근 판단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공개 토론에서 자신의 전문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그것은 법관의 시민적 책임이다.” 홀스트 젠들러 전 독일연방행정법원장은 논문 ‘법관의 공개적 의견 표명’에서 “법관은 거의 모든 것에 관해 의견 표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법조인에 대해 혹은 더 나아가 최고법원의 판례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갖고 틀렸다거나 심지어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의견을 주장할 수 있다.” 김 부장판사처럼 다른 법관의 판단에 대해 의견을 내놓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단서 조항이 달려 있다. “발언할 때는 증명되지 아니한 사실관계에 기초해선 아니 된다. 평가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독일 법관의 외부 의견 표명에 관한 원칙) “품위와 예절을 갖춰”야 하며 “서로 존경심을 잃거나 상대방이 무례하다고 느껴지는 선까지 가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독일 논문 ‘법관의 공개적 의견 표명’)

“평가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원칙”

김 부장판사의 글 ‘법치주의는 죽었다’를 다시 읽어보면, 독일의 이런 원칙에 어긋나는 부분이 나온다.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할 때,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선거 개입의 목적이 없었다니….’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목전에 앞두고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이 가득한 판결일까? 나는 후자(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추측했으니 증명될 수도 없고 상대방은 무례하다고 느껴질 법한 표현이다. 벵갈루루 법관행동준칙은 “정의는 행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외관상) 행해지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무리 옳은 의견 표명이라도 그 표현이 부적절했다면 법관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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