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공산주의에 승리하고 있다는 산 증거를 보았다. 베를린과 판문점의 장벽이 허물어질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분단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을 돌아본 뒤 한 말이다. 빗나간 자신감이었다. 국제사회를 뒤덮은 냉전 현실은 47살 젊은 지도자의 패기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베를린장벽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나서야 허물어졌고, 그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판문점엔, 사실 장벽이 없지만, 대치 상황은 지금도 그대로 존재한다. 오히려 그때는 가능했던 공동경비구역(JSA) 내 ‘자유통행’이 도끼만행 사건(1976년) 이후 제한되는 등 대치가 심해졌다. 그때 세워진 폭 50cm, 높이 15cm의 콘크리트 경계를 ‘장벽’이라 한다면, 이 장벽은 여태껏 무너질 기미가 없다.
반세기 간격으로 이뤄진 부녀의 방독반세기가 지나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3월25~28일)했다. 이미 아버지가 암살당했을 때 나이(62)가 된 딸은, 아버지처럼 설익은 포부를 밝히지 않았다. 그는 3월28일 드레스덴 연설에서 “이제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며 △군사적 대결의 장벽 △불신의 장벽 △사회문화적 장벽 △단절과 고립의 장벽을 언급했다. “독일 통일이 역사적 필연이듯이 한국의 통일도 역사적 필연”이라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렇게 거대한 분단의 벽을 쉽게 무너뜨릴 수는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독일 방문 25년 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또다시 25년이 흐른 오늘, ‘장벽은 무너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패기는 현실적이지 않아서였을까?
대신 이날 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 교류·협력 확대 방안을 들고나왔다. 박 대통령은 우선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주장했다. 구체적 방안은 북한, 국제적십자위원회와 협의하겠다고 했다. 유엔과 더불어 북한의 산모와 유아에게 영양·보건을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북한 지역에 농업·축산·산림개발 등을 함께 진행하는 ‘복합농촌단지’ 조성도 이야기했다. “씨뿌리기부터 추수까지 전 과정에서 남북이 협력한다면 수확물뿐 아니라 서로의 마음까지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수사가 붙었다.
교통·통신 등 인프라 건설에 대한 투자와 그에 대한 대가로 자원개발에 참여한다는, ‘남한 자본·기술-북한 자원·노동’의 모델도 제시했다. 나진·하산 물류사업도 언급했고, 국제기구의 지원 및 협력도 요청했다. 남북교류협력사무소를 설치해 남북 주민 간 동질성 회복을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은 새해 벽두부터 통일 대박론을 설파하고 다니면서 그는 ‘대박을 구체화시켜달라’는 요구와, ‘통일은 결론만이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결국 드레스덴 연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서 열거된 모든 조처가 ‘통일’이라는 결론을 위한 과정인가?
그렇진 않아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한 다음 대목에서 북한을 향해, “하나 된 한반도를 만들기 위한 이런 노력이 하루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북한은 비핵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정성 있는 자세로 6자회담에 복귀하고 핵을 포기”하라고 했다. 또 “북한이 핵을 버리는 결단을 한다면, 이에 상응하여 북한에게 필요한 국제금융기구 가입 및 국제투자 유치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핵 포기’는 이어진 세 문장에 연속으로 등장할 만큼 강력한 조건이었다. 결국 그가 앞서 나열한 것들은 ‘핵 포기’라는 과정을 달성해야 이를 수 있는 ‘결론’이다. 통일 과정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 비핵화의 선물, 곧 결과인 셈이다.
극복되지 못한 ‘통일 대박론’의 한계그렇다고 비핵화를 위한 절차를 제시한 것도 아니다. 단지 6자회담 복귀를 종용했을 뿐이다. 구체적이지 않다, 과정 없이 결론만 내놓아 현실성이 없다는 등의 비판을 받는 ‘통일 대박론’의 한계는 아직 극복되지 못했다. 비무장지대(DMZ) 세계평화공원 공약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DMZ 세계평화공원은 DMZ 긴장을 평화로, 한반도 분단을 통일로, 동아시아 갈등을 화합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DMZ를 관통하는 유라시아 철길”도 거론했다. 그러나 무장력 조정을 반드시 수반하는 DMZ 평화공원은 통일의 최종 단계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다. 곧 결론일 뿐 과정이 될 수는 없다. 강조해봤자 공허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실 방문지로 굳이 드레스덴을 고른 것부터가 통일의 결론만 강조하는 모습의 한 단면이다. 화려했던 북유럽 문화의 중심지에서, 2차 세계대전 땐 공습의 폐허로, 다시 통일 뒤에는 과학 비즈니스 도시로 부활한 드레스덴은 통일 독일의 가장 좋은 예로 꼽힌다. 청와대 쪽에선 “드레스덴은 독일 통일의 교훈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통일 전 동독 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된 곳이고, 통일 후엔 서독 기업들이 대거 들어와 동독 지역의 많은 주민을 고용해 경제 발전과 사회 통합을 이뤄낸 곳”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박 대통령은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에 앞서 10월에 동독 지역에서 정권에 반대해 민주화 시위를 처음 벌였고, 통일 뒤 ‘대박’을 구현해낸 드레스덴의 사례가 한반도에도 재현되기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조금 확장해보면, 독일식 흡수통일에 대한 기대감이고, 그런 식으로 통일을 하면 북한에도 번영이 올 거라는 메시지인 셈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살펴보면, 이런 독일식 통일도 마찬가지로 결과만 나와 있을 뿐,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 힘들다. 체제 붕괴 시점에 동독 주민들이 왜 서독을 택했는지, 동서 냉전 구조의 해체 시기에 동·서독의 관계는 어땠는지, 서독이나 동독은 당시 어떤 고민과 학습을 했으며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 등 구체적인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이는 앞서 독일을 방문했던 한국의 지도자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앞선 이들은 독일의 분단 현실이나 통일 과정에 대해서, 또 그것을 남북 상황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데는 매우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3월 독일을 방문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독일과는 다른 역사를 물려받았다. 남과 북은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동족상잔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한 상처는 오늘에도 깊게 남아 있다. 이념과 체제의 극단적인 대결이 반세기를 이어오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100만 이상의 중무장한 병력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남북으로 흩어진 1천만의 이산가족들이 부모·형제의 생사조차 모른 채 단절의 50년을 살아왔다. 이러한 단절과 폐쇄 속에 남과 북은 이념과 제도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이질화의 길을 걸어왔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신중했던 YS·DJ의 방독 연설2000년 3월 독일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도 독일의 사례 앞에서 신중했다. “서독은 경제 규모 면에서 보더라도 한국보다 훨씬 더 크고 부유한 위치에 있었다. 동독과 전쟁을 한 일도 없고, 통일 전에 많은 교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통일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경제는 북한을 떠안을 능력이 없다. 우리는 전쟁을 겪었고 극도의 무장 대립 속에 있다. 동독 국민은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에서 만개했던 민주주의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 주민은 자유에 대한 어떠한 경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의 고립으로 북한 밖의 외부 세계를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그대로 둔 채 통일을 서두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인 것이다. 따라서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은 당장 통일을 추구하기보다는 한반도에 아직도 상존하고 있는 상호 위협을 해소하고 남북한이 화해·협력하면서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것이다. 통일은 그다음의 문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도 독일 방문 당시 기자들에게 “독일과 한국의 사정은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서독 지도자들이 독일의 동서 교류 상황을 설명하며 남북 교류 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데 대한 소회였다.
박 대통령이 과정 없이 결론에만 집중하며 ‘통일 대박’을 외치는 가운데, 남북관계는 시계 제로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2월14일 남북이 합의한 것은 이산가족 상봉, 고위급 접촉 지속, 상호 비방·중상 중단 등 3가지였다. 그중에 이뤄진 건 이산가족 상봉 하나뿐이다. 그나마 한-미 연합 군사훈련, 금강산 관광 연계 등과 맞물린 채 남북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면서 다음 상봉이 언제 이뤄질지, 과연 정례화할 수 있을지는 막막해졌다. 고위급 접촉 지속도 기약이 없다.
상호 비방·중상 중단은 박 대통령의 발언에 북쪽이 격하게 반응하면서 무너지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이 이번 순방 도중 “북한의 영변 핵시설 화재는 체르노빌보다 더 심각한 핵재앙” “휴전선도 반드시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한 데 대해, 북쪽은 “설사 누가 무식한 글을 써주었다 해도 청와대 안방에까지 들어앉았는데 방구석에서 횡설수설하던 아낙네 근성을 버리고 할 말 못할 말 정도는 가려야 한다”며 격앙했다.
박 대통령은 드레스덴 연설에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독어 문장을 들어, “통일 직후 동·서독 주민들이 하나 되어 부른 뜨거운 외침이 평화통일의 날 한반도에서도 꼭 울려퍼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이 말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가 드레스덴에서 연설했을 때 동독 주민들이 외쳤던 반응이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인가넓게 보면, 2차 세계대전 뒤 열강에 분점된 독일에서 제기된 ‘민족자결권’의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주변 열강보다 동·서독의 뜻과 바람이 중요하다는 통일론으로, 민족자결권은 독일 통일을 가능케 한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 사회에도 이와 비슷한 뜻인 “우리는 하나다” “조국은 하나다”라는 구호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때 있었고, 이젠 어느덧 어색해졌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받는 사람: 대통령님♥’…성탄 카드 500장의 대반전
한덕수의 ‘민심 역행’…민주당 ‘윤석열 신속 탄핵’ 구상에 암초
‘밀실 수사는 싫고 공개변론’ 윤석열의 노림수…강제수사 시급
서태지 “탄핵, 시대유감…젊은 친구들 지지하는 이모·삼촌 돼주자”
하마터면 고문 당하는 시대로 돌아갈 뻔 [하종강 칼럼]
허락 했을까요 [그림판]
“윤석열 복귀할까 심장이 벌렁거려”…일상에 새겨진 계엄 트라우마
이재명 “지금 예수께서 오신다면 내란 맞선 우리 국민들 곁에…”
이승환·예매자 100명, 대관 취소 구미시장에 손배소 제기한다
성탄절 아침 중부내륙 영하 10도 강추위…낮부터 흐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