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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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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뛰고 있니?

등록 2000-10-12 00:00 수정 2020-05-03 04:21

“뛰어봐, 인생이 바뀌어!” 마라톤의 매력을 찬양하는 사람들

10월6일 경기 고양시 호수공원. 사람들이 서둘러 공원을 빠져나가는 밤 9시께 북쪽 자전거도로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느덧 10여명을 훌쩍 넘어선다. 야간조깅 나온 동네 사람들인가? 아니다. 바로 ‘일산호수마라톤클럽’ 회원들이다. 대부분 마라톤 풀코스인 42.195km를 완주한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다. 젊은이 못잖은 체력과 끈기를 자랑하는 ‘노익장’ 하남필(69)씨, 104kg의 몸무게를 마라톤 6개월 만에 92kg으로 뺀 김용팔(42)씨, 마라톤을 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견딜 수 없다는 ‘억척주부’ 한경희(38), 신미숙(42)씨 등등….

이들은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호수공원 자전거도로에서 한바탕 몸을 풀 작정이다. 먼저 호수공원 두 바퀴를 다함께 뛴다. 다음부터는 각기 기량에 맞게 뛰면 된다. 호수공원 한바퀴가 5km이고 보면 이들은 거의 매일 적어도 10km를 달리는 셈이다. 물론 그날 몸상태에 따라 풀코스 수준의 달리기 기량을 과시하는 이들도 없잖다.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마라톤이 그렇게 좋냐”고 묻자 한목소리로 크게 외친다. “마라톤! 최고예요”

“삶의 리듬감을 얻었다”

42.195km 오래 달리기. 마라톤은 아직도 많은 일반인들에게 ‘신화’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라톤은 이봉주, 황영조 등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육상 선수들이나 할 수 있는 걸로 안다. 마라톤 국제대회에서 국내 선수가 수상을 하면 너나없이 일대 환호를 보내는 데는 이렇듯 마라톤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 담겨 있다. 인간한계의 벽을 극복한 인간승리란 생각 때문이다. 사실 2시간대에 42.195km를 뛴다는 그 자체는 하나의 경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라톤은 더이상 ‘신화’가 아니다. 시나브로 우리 곁에 이웃하고 있는 현실이 되고 있다. 많은 일반인들도 이제 ‘이봉주, 황영조가 뛴 42.195km’를 주파하고 있다. 물론 시간은 2시간∼3시간 이상 차이가 나지만 기록은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끝까지 뛰었다는 그 기쁨, 아니 뛰고 있다는 그 기쁨만으로 까무러칠 지경이라며 마라톤 신화를 자신의 신화로 만들고 있다.

10월6일 호수공원에서 만난 아마추어 마라토너들도 하나같이 이렇듯 마라톤에 깊이 중독돼 있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 한경희, 신미숙 주부는 자신의 비용으로 올 11월5일 미국에서 열리는 뉴욕마라톤 대회에 출전할 예정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각각 경력 1년 반과 2년에 이르는 이들 중 한씨는 올 3월 동아마라톤대회에서, 신씨는 지난해 10월 열린 춘천마라톤대회에서 처음으로 완주했다. 최고기록은 한씨가 4시간15분, 신씨가 4시간19분.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거리에서 한없이 뛰게 할까.

10월6일 일산 호수공원에서 만난 민정기(41), 이인순(37)씨 부부는 “마라톤이 삶의 활력을 주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답했다. 특히 이인순씨는 “마라톤을 하고나서 삶의 리듬감을 얻고 있다”며 마라톤 예찬론을 거침없이 토했다. “1년2개월 전에는 부부끼리 솔직히 서로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었답니다. 하지만 마라톤을 남편과 함께 시작하면서 이렇게 나란히 뛰는 가운데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아이들 문제에서 집안 문제까지. 원만한 부부생활을 위해서도 마라톤이 최고죠.”

마라톤에 중독돼 전업한 경우도

맞벌이 부부에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딸을 둔 이들은 아이들 둘을 남겨두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번은 마라톤을 즐긴다. “매일 못 뛰어 여간 아쉽지 않다”는 이들은 오는 10월22일 열리는 춘천마라톤대회(조선일보 주최)에 출전해, 나란히 손을 맞잡고 들어올 계획이라며 자랑했다.

마라톤에 중독돼 아예 전업까지 한 경우도 있다. 최근 출판가에 화제를 모은 독일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의 (궁리 펴냄)란 책을 번역한 선주성(35?)씨가 그 주인공. 선씨는 피셔와 뉴욕마라톤대회에서 함께 뛰기도 했다. 그의 배번호는 9990. 피셔는 9138.

그는 올 초 다니던 직장(조선일보 편집부 기자)을 그만두고 아예 마라톤업계에 투신했다. 마라톤으로도 돈벌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자신감도 그의 투신을 거림낌없게 한 요인이었다. 현재 마라톤 선수들의 기록을 재는 전자식자동계측시스템을 개발한 벤처업체 ‘스피드칩’의 스포츠마케팅 본부장이자 서울마라톤클럽 홍보이사로 일하고 있다. 선씨는 공군사관학교 교수 시절 구보를 하다 달리기 맛을 느껴 마라톤에 입문했다고 한다. “힘껏 달리고 난 뒤 온 몸에 퍼지는 감미로운 피로감, 그 황홀감의 극치에 그만 빠져버렸다”는 설명이다.

“마라톤은 신발 하나, 가벼운 운동복만 있으면 언제 어디든 할 수 있는 경제적 운동이란 점도 큰 장점이죠. 몸무게 조절에 신경쓸 필요없이 먹는 거 맘먹은 대로 먹고 운동을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대화를 즐기면서 운동도 할 수 있죠.” 선씨의 마라톤 예찬론이다. 선씨는 또한 피셔처럼 “달리면 인생이 바뀐다”고 주장한다. “나의 몸 전체를 산소목욕시킴으로써 아침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나만의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명상의 시간이죠. 달리면서 한 가지 생각을 깊이있게 할 수 있습니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피셔의 책 원제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장거리 달리기처럼 마라톤은 자신을 찾는 여행, 바로 그것입니다.”

직장에서 겪는 각종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달리기를 하다 마라톤광이 된 경우는 많다.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에 사는 임영진(28)씨. 그는 지치고 힘든 직장생활에 찌든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마라톤을 했다고 한다. 올 2월부터 달리기를 시작한 아직은 초보 런닝우먼. 올 6월 이후에는 바쁜 직장일로 잠시 주춤했는데, 최근 다시 뛰기 시작했다. 임씨는 특히 네티즌 마라토너들에게 한때 인기가 높았다. 어릴 적부터 자폐증에 빠진 남동생(22)을 설득해 함께 레이스를 펼친 얘기를 한 인터넷게시판에 일지 형식으로 공개해 네티즌 마라토너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몸무게 100kg을 뺀 신화

인터넷 마라톤 동호회 런너스클럽의 김윤회(45), 채수연(45) 부부는 지병치료를 위해 마라톤을 한 경우다. “고혈압에 비만(171kg)이 문제였죠. 우연히 공원에 산책나갔다가 서울마라톤클럽 박영석 회장의 마라톤에 관한 강의를 듣고 시작했답니다. 예전에는 마라톤이나 달리기는 육상 선수들이나 하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현재 김씨는 매우 건강하단다. 혈압은 정상으로 되돌아왔고, 몸무게도 70kg으로 줄었다. 부인 채씨는 김씨보다 두달 정도 늦게 출발했지만 이젠 김씨보다 더 열성적이다. 채씨는 특히 올 11월 뉴욕마라톤대회에 출전하는 행운의 출전자가 돼 뉴욕에서 직접 뛰게 됐다. 김씨네는 특히 가족 마라톤인들로도 유명하다. 부부는 중학 1학년 아들 태석군과 함께 셋이서 늘 뛴다. 지난해 10월의 춘천마라톤대회는 물론 지난해 11월에 열린 중앙하프마라톤대회에서 함께 뛰었다. 올해도 가족 모두 중앙하프마라톤대회에 함께 뛸 예정이다.

한화그룹 홍보이사 김성남(47)씨가 마라톤을 시작한 계기는 조금 특별하다. 지난 95년 10월 폐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아끼는 후배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마라톤을 완주하겠으니 너는 암을 이겨내기로 서로 약속하자.” 그리고 연습을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후배는 그가 마라톤 완주를 한 지 1주일 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나, 그의 마라톤은 계속됐고 벌써 8차례나 풀코스를 완주했다.

이렇듯 사연도 각인각색인 마라톤 마니아들. 최근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권영후(46·국정홍보처 근무) 일산호수마라톤클럽 회장은 “요즘 각종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보면 실감날 정도로 폭발적 증가 추세”라고 전했다. 최근 각 언론사에서 벌이는 각종 마라톤대회의 참가인원은 이를 충분히 방증하고도 남는다.

조선일보 주최 춘천마라톤대회의 경우 마라톤 신청자가 지난해 1만2천명에서 올해는 1만6천명으로 훌쩍 늘었다. 이런 현상은 동아마라톤대회(동아일보 주최), 통일마라톤대회(문화일보) 등 각 언론사에서 개최한 마라톤대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주성씨는 “흔히 달리기 인구를 10만명으로 비공식 집계하는 만큼 마라톤 마니아들은 대충 2만5천에서 3만명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선씨는 특히 “이런 마라톤 인구의 증가는 남녀노소 구별없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즉 90년대만 하더라도 건강을 염려한 40대 후반이 마라톤을 한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20∼30대는 물론 여성, 나이든 이들이 마라톤 인구증가에 가세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스포츠평론가들은 또 새록새록 만들어지는 마라톤대회도 마라톤 인구의 확산에 부채질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2002년 아시안게임 성공기원 2000 부산마라톤 대회’, ‘새 천년 변산반도에서 변산반도 해변 하프마라톤’, ‘금산인삼축제 겸 전국 하프마라톤’, ‘남북공동선언실천을 위한 통일맞이 대축전 민화협 2000통일마라톤 대회’ 등 그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바야흐로 마라톤이 대표적인 사회체육형 대중스포츠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의 마라톤에 관심은 거의 전무하다. 마라톤 인구에 대한 실태파악조차 없는 형편이다.

이창곤 기자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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