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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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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전당대회장도 보존하는 독일

독일, 나치 전당대회장도 “잊지 않으려” 보존
베를린 시내에 히틀러 연설 장소 등 버젓이 남긴 까닭
등록 2020-04-28 12:16 수정 2020-05-05 01:07
올해부터 보수에 들어가는 뉘른베르크 의회홀. 1935년 항공수송부서 사무실로 세운 이 건물은 4~7층 높이로 당시 베를린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전쟁 뒤 소비에트연방 군사 행정부가 주둔했다가 통일 뒤 재무부 건물이 됐다. 건물 곳곳에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위키피디아

올해부터 보수에 들어가는 뉘른베르크 의회홀. 1935년 항공수송부서 사무실로 세운 이 건물은 4~7층 높이로 당시 베를린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전쟁 뒤 소비에트연방 군사 행정부가 주둔했다가 통일 뒤 재무부 건물이 됐다. 건물 곳곳에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위키피디아

“더 멋있게 고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유지될 수만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2019년 5월 뉘른베르크 시장 울리히 말리(사회민주당 소속)는 나치당 전당대회 장소였던 뉘른베르크시 남동쪽 부지에 있는 건물들의 보수 공사를 발표하면서 반대자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 1년에 한 번씩 나치당 전당대회가 열린 이곳엔 나치가 자신의 힘과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다. 1932년 건축가이자 히틀러의 최측근인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곳에 그리스 신전을 본뜬 ‘체펠린 연설장’이라는 대규모 집회장을 짓고는 무대에 오른 히틀러에게 수백 개 서치라이트로 현란한 빛을 비춰 나치 지지자들을 열광하게 했다. 바로 그 옆엔 로마의 콜로세움을 그대로 본뜬 의회홀도 지었다. 애초 의회홀은 70m 높이로 지으려고 계획했으나 39m 정도 올라갔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공사가 중단됐고 미완성으로 남았다. 나치당 전당대회 부지 다른 한편엔 강제노동 수용소와 포로들이 대량 학살된 현장이 있다.

많은 사람이 ‘체펠린과 의회홀은 건물 자체가 나치의 선전도구’라며 이 과대망상과 폭력의 흔적을 없애길 원했고, 1967년 체펠린 중에서도 히틀러 신격화 핵심이라 할 기둥이 늘어선 회랑이 폭파·철거됐다. 그러나 1973년 독일에 ‘기념물 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체펠린과 의회홀은 일부가 부서진 채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83년 체펠린 관중석이 보수되고 2001년 의회홀에 박물관과 기록보관소 구실을 하는 나치당 전당대회 기록센터가 들어섰지만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큰 건물들을 보수·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2015년에도 보수 계획을 발표했다가 “8500만유로(약 1105억원)나 들여 나치의 역겨운 유물을 새롭게 꾸밀 이유가 무엇이냐”는 거센 반대에 부딪혀 보류됐다. 그러나 다시 독일 연방정부와 바이에른주의 지원을 받아 올해 의회홀부터 보수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뉘른베르크 체펠린 연설장에서 회랑과 연단의 독수리 상징 등이 폭파·철거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뉘른베르크 체펠린 연설장에서 회랑과 연단의 독수리 상징 등이 폭파·철거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뉘른베르크 체펠린 연설장에서 회랑과 연단의 독수리 상징 등이 폭파·철거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뉘른베르크 체펠린 연설장에서 회랑과 연단의 독수리 상징 등이 폭파·철거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지역 시민단체 중심 실패한 역사라도 재건·수리

나치 치하 건축물들은 건축적으로만 본다면 조야한 것도 많지만 독일은 논쟁을 통해 대부분 나치 건축을 그대로 두는 길을 걸어왔다. 베를린에는 군시설, 산업시설로 만든 수많은 벙커가 남아 있다. 사유지 지하에 벙커가 있어도 기념물로 인정되면 철거할 수 없다. 2017년 3월부터 법규가 보강돼 당시 무기 생산에 사용됐던 모든 지하실은 기념물로 지정받을 수 있다. 이런 결정을 끌어낸 데는 ‘시티즌 이니셔티브’라는 역사적 기념물 보호 행동을 해온 시민단체의 역할이 컸다.

독일에선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건물들이 도시개발 과정에서 현대적 건물로 손쉽게 대체되는 현상에 반발해 1970년대부터 문화재 보존을 위한 대중운동이 시작됐다. 문화인류학자 정진헌 박사는 “지역 시민사회가 정치인들과 지방정부를 설득해 도시개발 사업 방향을 구도시 건축물 유지와 복원 등으로 조정되도록 노력해왔고, 그 결과 지역마다 문화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정 박사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기념물을 복원, 보존하는 사업을 할 때도 지역 시민들로 구성된 문화재 위원회는 중세시대 유산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사회주의 척도론 폐기해야 할 중세시대 유산들을 사회주의 기념물인양 중앙정부에 보고하고 보호대상에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패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는 전통과 각성은 나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통일 뒤 잠시 사회주의 기념물을 파괴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베를린엔 지금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사회주의자들의 묘지, 비밀경찰 본부 등이 남아 있다.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도 늘 논란이다. 나치가 브라운슈바이크에 청소년 교육시설로 지었던 건물은 전쟁이 끝난 뒤 하켄크로이츠(갈고리십자)나 나치 깃발 같은 상징물을 모두 떼어내고 대학교로 쓰인다. 하지만 로비 모양이나 건물 자체가 나치의 상징과 유사하며 아직도 건물 곳곳에 나치 상징이 박혀 있다. 독일에선 형법 제86조에 의거해 나치 상징물은 물론이고 나치나 히틀러와 관련된 숫자, 알파벳 기호 등은 모두 엄격히 금지되는데 건물 자체가 나치를 상징하는 경우엔 기념물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비판이 높다.

독일은 친나치 상징을 엄격히 금지해 건물을 보존하더라도 나치 선전물은 모두 제거한다.

독일은 친나치 상징을 엄격히 금지해 건물을 보존하더라도 나치 선전물은 모두 제거한다.

1933년 나치당의 도시 뉘른베르크에 로마 콜로세움을 본떠 지은 의회홀.

1933년 나치당의 도시 뉘른베르크에 로마 콜로세움을 본떠 지은 의회홀.

정보기관이던 게슈타포 건물에 세워진 테러범죄연구재단과 남아 있는 베를린장벽 모습. 뉘른베르크시 박물관 제공

정보기관이던 게슈타포 건물에 세워진 테러범죄연구재단과 남아 있는 베를린장벽 모습. 뉘른베르크시 박물관 제공

학살 물증 남기는 독일식 ‘기억 정치’

뉘른베르크 체펠린 연설장과 의회홀을 놓고 역사가 중에서도 “황폐하게 버려두어야 한다”거나 “병적인 보존주의의 끝판왕”이라는 비판이 높았지만, 말리 시장은 “나치 치하 유적을 (붕괴 위험이 있을 때 방문객을 통제하는) 울타리 속에 가둬두고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문서센터 플로리안 디를 대표는 “이 장소의 역할은 국가사회주의가 당시 얼마나 많은 국민한테 지지를 받았는지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치 건축물들은 많은 국민이 독재 권력을 지지했다는 증거, 학살이 실제로 있었다는 물증, 차별과 혐오의 논리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 인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집단정체성을 형성해온 독일식 ‘기억 정치’의 전통이다. 말리 시장은 “특히 우리가 저지른 전쟁을 영상으로만 보는 젊은이를 위해서 기념물은 절대로 폐기돼서는 안 된다”는 견해다. 많은 독일인이 전쟁을 겪은 세대가 점점 사라지고, 다시 강한 독일 제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극우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쟁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우려한다.

2월엔 오버잘츠베르크에 있는 나치 지도자들의 회합 건물이 매물로 나와 관심과 우려가 높았다. “가해자들의 장소를 시장에 맡겨서 우익 손에 넘어가거나 구경거리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중요한 기념물이 아니라면 세금을 낭비하지 말라”는 의견이 대립 중이다. 우익극단주의자들이 나치 유적지를 순례하거나 중요한 기록을 손에 넣으려는 일도 있기 때문에 기념물 뒤편에는 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다.

베를린 예전 동독 지역에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형 동상. 통일 뒤 철거 논란이 일었지만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남은주

베를린 예전 동독 지역에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형 동상. 통일 뒤 철거 논란이 일었지만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남은주

베를린(독일)=남은주 전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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