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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장 뽑으려면 궁예가 되어라?

1344명 ‘농촌 대통령’ 뽑는 3·13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 현장을 가다
등록 2019-03-05 12:29 수정 2020-05-03 04:29
2월27일 경기도 이천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2회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 후보자 등록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2월27일 경기도 이천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2회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 후보자 등록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조합장 선거가 모레부터 시작된다고요? 까맣게 몰랐네요. 제 주위에서 선거 이야기 나눈 적 없어요. 오늘 여기서 처음 들어요.” “깜깜이 선거예요. 뭘 보고 찍나요. 후보자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모든 게 지하로 숨어들어 갔어요. ‘돈의 혼탁’은 덜해졌는지 모르지만, ‘마음의 혼탁’은 더 심해졌어요.”

3월13일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가 코앞으로 닥쳐왔다. ‘전국’에서 ‘동시’에 농축협, 수협, 산림조합의 1344명 조합장을 뽑는 이른바 ‘농어촌 총선’은 2015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2월27일 후보자 등록이 마감됐고, 이튿날인 28일부터 14일 동안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올해엔 3474명이 후보자로 나서, 경쟁률이 전국 평균 2.6 대 1에 이르렀다. 하지만 농·산·어촌 어디에서도 동시 선거의 특별한 기운은 느끼기 어려웠다. 말의 길이 막히고 생각의 흐름이 끊긴 ‘깜깜이 선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책 선거 꿈꿨지만 ‘선거일도 몰라’

후보자 등록 마감을 하루 앞둔 2월26일 오전, 전북 정읍시 ㅅ농협에선 농기계은행 사업을 논의하는 운영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 2400평 이하 농사를 짓는 소농들의 육묘부터 이앙(모내기), 수확에 이르기까지, 조합에서 농기계 작업을 대신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ㅅ농협 조합원은 3540명, 그중 70살 이상 고령농이 2200명이나 됐다. 조합에서는 “고령농들도 당당하게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도록, 최대한 영농을 지원하자는 것”이라며 사업 취지를 설명했다. 고령농이 힘에 부쳐 농사를 짓지 못하면, 투표권 없는 무자격 조합원으로 전락한다.

회의가 끝난 뒤 11명의 운영위원들과 선거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민 대표로 위원회에 참석한 ㅂ씨는 “선거가 닥쳤는지도 몰랐고 선거 분위기를 아예 못 느낀다”고 말했다. 후보자 토론회조차 열 수 없다는 이야기가 오가자,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면서 “무슨 기준으로, 뭘 보고, 조합장을 뽑느냐”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합의 여성 이사인 ㅇ씨는 열변을 토했다. “우리한텐 조합장이 대통령이에요. 면 단위로 내려와 보세요. 아이들이 없으니 학교 운동회도 사라지고, 여러 기관장 역할도 거의 유명무실해졌어요. 노인들만 사는 시골에서 조합장은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교육,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유일한 중심이에요. 청장년층을 유치하는 것도 조합장 일이잖아요. 그런데 조합장 선거는 점점 더 지하로 숨어들고 있어요. 선거에서 농민들이 극단적으로 소외되고 있어요. 4년에 한 번 치르는 선거인데 너무 답답해요. 동시 선거 도입 전보다 마음의 혼탁은 더 심해졌어요.” 그는 “유권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면서 “토론 문화 자체를 가로막는 악법을 당장,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운영위원은 “선거는 후보자를 살피는 ‘검증’ 과정인데, 지금은 ‘돈선거’ 막는다고 선거 자체를 막는 격이 됐다”면서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아예 담그지 않는 퇴행이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찾아간 전북 완주군 ㄱ농협 주변도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조합원은 “선거법이 워낙 엄격하다보니, 외견상으론 밥사주는 사람도 없고 밥 얻어먹는 사람도 없다”면서 “그래도 뛸 사람은 6개월 전부터 부지런히 뛰고 있고, 모든 것이 수면 아래에서 진행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행 위탁선거법은 농민 조합원이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는, 조합원의 투표권을 무시하는 시대착오법”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완주군 선거에 출마하는 한 조합장은 “농협 조합장은 대규모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동시에 농촌 공동체에 기여하는 책임을 맡는다”면서 “선거 과정에서 후보자가 평소 그런 활동을 얼마나 충실히 했는지 검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도 공개토론회 같은 자리는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5년 3월 처음 도입된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는 애초 농업계 안팎의 전폭적인 환영을 받았다. 2014년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위탁선거법)이 제정되면서, 농축협과 수협 및 산림조합의 조합장 선거를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하게 됐다. 농업계에서는 전국 동시 선거 공간을 통해 농업 개혁을 기치로 내건 조합장 후보들이 공동 대응에 나서고, 농어촌의 관행적 ‘돈선거’를 정책 선거로 전환하고, 조합원의 주인의식을 높이고 농협 혁신의 담론을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전까지는 1300여 개에 이르는 전국의 조합마다 선거 일정이 제각각이어서, 후보자들 간의 농업 개혁 공동 대응 자체가 불가능했다.

현직 조합장에게 유리한 판

이호중 농어업정책포럼 상임이사는 “농업계에선 동시 선거 도입으로 ‘돈선거’를 막고 정책 선거를 꽃피우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것으로 크게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반쪽 성과에 그쳤다”면서 “정책 선거는 오히려 과거보다 후퇴하는 개악이 일어났다”고 비판했다.

2015년 첫 전국 동시 선거를 치르면서, 위탁선거법 독소조항의 문제점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우선, 후보자의 정책과 정견을 비교할 정책 선거 기회가 원천 봉쇄됐다. 현행법으론 농민단체나 조합 대의원협의회의 초청 토론회조차 불가능하다. 또 조합원만 유권자인 조합 선거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조합원이 누구인지 후보자가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만큼, 후보자와 유권자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열어줘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더구나 지금의 위탁선거법은 현직 조합장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불공정 게임을 조장하는 것으로 지적됐다. 현직 조합장이나 임직원 출신 후보는 후보 등록일 전까지 지위를 활용한 유권자 접촉이 가능하다. 하지만 농민 출신 후보자는 조합원한테 문자를 보낼 조합원 전화번호도 확보하기 어렵다. 신규 진입 장벽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다.

실제로 기자가 취재 현장에서 만난 전북 완주군의 한 조합장은 후보자 등록 하루 전날인 2월26일까지 조합 이사회를 주재하고 조합원들을 면담하는 활발한 행보를 이어갔다. 전북 정읍시 조합장도 운영위원회를 주재하고 위원들과 점심 식사를 나눈 뒤, 오후엔 시청에서 열린 농민수당 논의 모임에 참석했다. 시청에서는 다른 모임에 참석한 유권자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손을 잡았다. 2015년 1차 동시 선거에서 전체 조합장의 46.6%가 교체되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지만, 현직 조합장 출마자(936명)들은 597명에 이르는 63.8%의 상대적으로 높은 당선률을 기록했다.

법 개정 의견 낸 지 4년째 아직도 ‘미적’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해, 2015년 7월 일찌감치 개정 의견을 내놓았다. 유권자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후보자 초청 정책토론회를 허용하고, 예비후보자 등록을 허용해 선거일 60일 전부터 조합 공개행사에 참석해 정견 발표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후보자 전과 기록을 의무적으로 선거공보에 공개하자는 등의 내용이었다. 또 선거운동 주체를 후보자 자신에서 배우자까지 확대하고, 조합 누리집뿐 아니라 모든 누리집을 선거운동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후보자가 유권자 전화번호 제공을 신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등 선거운동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안도 함께 제시했다. 주승용 바른미래당 의원과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비슷한 내용의 위탁선거법 개정안을 2017년과 2018년에 각각 국회에 제출했다.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은 “후보자 혼자 어깨띠 두르고 명함을 14일 동안 나눠주는 선거만 하라는 것인데, 이래서는 정책 선거를 할 수가 없다”면서 “발과 입을 꽁꽁 묶어놓으니 결국 음성적으로 돈을 푸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위탁선거법으로 행정적 필요에 따른 선거관리 차원의 효과를 얻었을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좋은 조합장을 뽑기 위한 내용을 담지는 못했다”면서 “60일 동안의 예비후보자 등록과 정책토론회 도입, 이 두 가지가 위탁선거법 개정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호중 상임이사는 “위탁선거법 개정에 대한 공감대는 이뤄졌지만, 법 개정이 계속 미뤄져 이번 동시 선거까지 깜깜이 선거로 치러야 하는 답답하고 한심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현직 조합장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 농협중앙회는 “조합원들이 후보자를 잘 알고 있어 정책토론회 필요성이 낮다” “청중을 동원해 금품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포퓰리즘 공약 남발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논리를 대면서 조합장 선거운동 확대에 완강하게 반대했던 바 있다. 최근 들어서는 정책토론회 필요성은 인정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고 있다.

정읍·완주=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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