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북-미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지난 5월31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사진 뒤쪽)과 회담하기 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11월6일 김 부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의 예고된 만남을 전격 연기했다. 연합뉴스
미국 대통령의 ‘장래 희망’은 대체로 두 가지다. 첫째, 재선이다. 첫 임기 4년만 채우고 나가는 건 일종의 치욕이다. 둘째, 오래 기억될 만한 업적(레거시)을 남기는 게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도 폐지,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정책 하는 식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터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으뜸 구호를 내걸고 당선됐다. 11월6일 중간선거를 앞두고도 그 구호는 변함이 없었다. 2020년 11월 대선에서도 같은 구호를 내걸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당선으로 ‘다시 위대해진 미국’은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탈퇴했다. 냉전의 막바지인 1987년 체결돼 세계 핵 군축사에 한 획을 그은 ‘중거리 핵전력 협정’(INF) 탈퇴도 선언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유럽연합(EU)까지 나서 성사시킨 이란 핵협정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중국과 무역전쟁에 골몰하는 것도 다시 위대해지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미래 독립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돼야 할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은 ‘중동에서 지옥문을 열었다’는 혹평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저명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비참한 죽음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은 친미 왕정국가에 기댄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한 전세계의 비난을 불렀다. 외교·안보 정책 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난 2년의 기록에 낙제점 이상을 주는 전문가는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을 민주당에 내줬다. 야당이 하원을 장악했으니,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에 국내 정책 측면에서 운신의 폭이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게 됐다. 임기 전반기의 대표적 성과로 내세웠던 부자 감세 등이 뒤집힐 가능성이 크고, 여러 차례 시도했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오바마 케어)의 폐기도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정책 측면에선 ‘레거시’를 만들기 어렵다.
트럼프의 유일한 레거시, 대북정책그런 트럼프 대통령에게 딱 하나 남은 가능성이 있다. 바로 대북정책이다. 취임 첫해 거친 말과 위협적인 무력시위로 전쟁 위기로까지 내몰렸던 북-미 관계는 올 들어 남북관계가 풀리면서, 역사적인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성사까지 내달렸다. 이혜정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11월6일 중간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재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정책에서 성과를 내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짚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원은 외교·안보 정책에서 입김이 세지 않다. 공화당이 의석을 늘린 상원이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이다. 다만 하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외교·안보 정책 집행 비용을 문제 삼을 수도 있고, 정책 결정 과정 검토를 목적으로 각종 청문회와 자료 제출 요구도 할 수 있다. 막무가내로 달려든다면, 정책의 집행 속도를 상당히 늦출 수 있다는 뜻이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019년 9월 테러지원국 해제할까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대북제재는 적성국가 교역법과 테러지원국 지정을 두 기둥으로 한다. 북-미 협상이 진척되면, 대북제재를 풀어야 한다. 북한이 적성국가 교역법 적용 대상이 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다. 북-미가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에 합의한다면 자연스레 적용 대상에서 빠지게 된다.
북한은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으로 이듬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다가, 조지 부시 행정부 말기에 북-미 협상이 진척을 보이면서 2008년 10월 해제됐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맏형 김정남 암살 사건(2월)과 북한에 억류됐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채 귀국해 숨진 대학생 오토 웜비어(6월) 사건이다.
테러지원국은 어떤 제재를 받게 될까? 대외무역과 투자, 원조 등에서 직접적 제한이 가해진다.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금융기구 차원의 지원이나 차관도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은 아직 이들 기구에 가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입 자체를 가로막을 수 있다.
미 하원은 2016년 플로리다주 출신 공화당 테드 요호 의원의 대표 발의로 테러지원국 지정 관련 법령을 개정했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의 전제인 지정국의 테러 활동 중단 기간을 기존 6개월에서 2년으로 늘렸다. 둘째, 행정부의 지정 해제 결정에 대한 의회 차원의 재검토 기간을 45일에서 90일로 연장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2015년 6월 쿠바를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 것에 대한 공화당 차원의 반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면서 언급한 두 사건을 놓고 보자. 웜비어 사망 사건이 뒤에 벌어졌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따져, 유예기간 2년이 경과하는 2019년 6월 이후에나 테러지원국 해제를 발표할 수 있다. 여기에 90일의 의회 재검토 기간을 거쳐야 한다. 결국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뺄 수 있는 가장 이른 시점은 2019년 9월께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미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안에 협상을 끝마치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첫 임기 안에 북핵 문제를 푼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도 청신호가 켜질 게다. 북-미는 10월 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을 통해 제2차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7일 중간선거 뒤 첫 기자회견을 열어 “내년 초쯤”이라고 시점을 밝혔다. 앞서 미 국무부는 중간선거 전날인 11월5일 폼페이오 장관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고위급 회담이 이틀 뒤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가, 선거 당일 전격 연기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출장 일정 때문”이라며 “회담 일정을 다시 잡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견 대립에 따른 결렬은 아니란 뜻이다.
북-미 모두 협상 타결을 원한다. 중간선거로 달라진 건 거의 없다. 다만 재선에 도전해야 할 트럼프 대통령이 이제는 속도를 낼 때가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북한도 마냥 기다리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유엔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관을 지낸 권정근 외무성 미국연구소 소장은 11월2일 에 기고한 ‘언제면 어리석은 과욕과 망상에서 깨여나겠는가’란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북-미 모두 기다릴 수 없는 상황“만약 미국이 우리의 거듭되는 요구를 제대로 가려듣지 못하고 그 어떤 태도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오만하게 행동한다면, 지난 4월 우리 국가가 채택한 경제건설 총집중 노선에 다른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여 ‘병진’(핵·경제 동시발전)이라는 말이 다시 태여날 수도 있으며, 이러한 노선의 변화가 심중하게 재고려될 수도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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