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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과학자가 망해야 과학이 산다

호기심과 열정보다 착취와 범죄에 능한 과학자 우대받는 현실
등록 2018-09-15 14:02 수정 2020-05-03 04:29
연합뉴스

연합뉴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은 대학원생의 슬픔

함께 과학자의 꿈을 꾸던 친구들은 하나둘 내 곁을 떠나갔다. 시도 때도 없는 지도교수의 폭언과 인격 모독을 견디지 못해 실험실을 그만둔 친구도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인건비를 현금으로 뽑아 지도교수에게 상납하는 역겨운 현실을 견딜 수 없어 그만둔 친구도 있었다. 존경하던 선배가 그만둔 실험실에선 학생들이 지도교수 배우자의 생일까지 챙겨야 했고, 스승의 날 선물이 급이 낮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황우석 사태 이후에도 여전히 연구 부정을 압박받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나는 훌륭한 지도교수님을 만나 그들이 겪었던 착취와 부조리를 겪지 않았다. 자괴감이 드는 일을 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든든하고 안락한 울타리 속에서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무사히 박사과정을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운 좋게 살아남은 동안 나는 방관했다. 여학생만 몰래 불러내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게 하는 지도교수, 프렌차이즈 커피숍에서 학생들이 커피를 마신다고 인건비를 삭감하는 지도교수, 학생들에게 필요한 현미경 대신 자신의 취미 생활을 위해 연구비로 망원경을 사는 지도교수, 실험실에 비비탄 총을 난사하는 지도교수, 내연녀에게 연구비를 빼돌리는 지도교수, 감시카메라(CCTV)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지도교수, 그들은 내 지도교수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다만 분개했을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 모든 부조리가 나를 비껴갔음에 안도했다.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부조리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나서지 않는데 내가 나설 수는 없었다. 내 침묵을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쓸쓸히 남겨진 길 위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슬픔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내 동지를 삼켜버린, 허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권력과 부조리 앞에 한없이 작은 나의 모습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실의 진실이 은폐되는 원리는 간명하다. 교수에게는 미래를 망칠 수 있는 확실한 권력과 미래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불확실한 권력이 있다. 좁디좁은 한국 사회에서, 더 좁디좁은 학계 내에서 교수 눈 밖에 났다가는 어떤 피해를 볼지 모른다. 각 연구실에서 내부자 수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내부고발자는 쉽게 특정당한다. 더러운 일들은 대개 교수와 연구원 두 사람 사이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기에 연구원들은 내부고발을 하는 순간 바로 보복당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과학계 장악한 권력의 카르텔

설령 누군가 권력에 맞서 진실을 드러내더라도 세상은 권력의 손을 들어준다. 마치 동료 국회의원을 두둔하는 ‘방탄 국회’처럼 학계는 이미 권력을 획득한 계급에게는 한없는 자비를 베푼다. 연구비를 횡령하고 학생들을 괴롭히다가 문제가 되어도 솜방망이 징계를 받을 뿐이다. 수업도 없는 방학 중에 정직 징계를 받고, 바로 수업에 복귀하는 교수들을 보면서 학생들은 배운다. 이 싸움은 질 싸움이다. 2012년 서울대 인권센터의 조사 결과로 연구실 내 적나라한 인권침해 실태가 밝혀졌을 때, 당시 교육부총장은 교수들에게 “신설 부서의 업무 미숙으로 일어난 일로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사과문을 발송했다.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전해 들은 다른 연구실들의 끔찍한 이야기들을 어디에 제보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은, 과학계를 장악한 권력의 카르텔이 얼마나 손쉽게 진실을 은폐하고 제보자나 피해자를 괴롭힐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설령 힘겹게 진실이 드러난다고 해도 당사자가 심판받지 않는다는 현실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겪지 않은 일을 고발했을 때 당사자가 권력을 동원해 진실을 은폐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와,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나를 막아섰다. 진실을 제보할 수 있는 자에게는 증거가 없고 증거를 가진 자는 진실을 제보할 수 없는 이중의 차단막 속에서, 썩어가는 연구실의 악취는 외부와 차단돼왔다.

권력 아래 진실이 질식당하는 동안, 어떤 분야보다도 진실을 추구해야 할 과학계에서는 진실을 은폐하고 위장하는 데 능숙한 과학자들이 승승장구한다.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순수한 과학자들은 연구비 부족으로 신음하고, 착취와 범죄에 능한 권력자들이 연구 자원을 독점하는 과학계는 과학자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불행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연구비가 정치 과학자나 장사치 과학자의 탐욕을 채우는 데 쓰인다면 사회적 낭비이자, 그 연구비가 좋은 연구자에게 전달되었을 때의 효용을 기회비용으로 치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이 득세하는 음습한 과학계는 인재들을 밀어내고 있다. 열악한 처우를 감내하고서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과학계에 들어온 많은 인재가 그 결정을 후회하며 과학계를 떠나고 있다.

이 기초과학연구원의 김진수 단장에 대한 의혹을 보도하고 있다. 기초과학연구원 단장은 대한민국 과학계에서도 권력의 정점에 있는 과학자다. 해마다 수십억원의 연구비를 집행하고 수많은 연구원의 인사권을 갖고 있다. 자신의 연구단뿐만 아니라 학계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도 엄청나다. 게다가 그는 툴젠이라는 바이오 벤처기업의 창업자이자 최대주주로서 수천억원의 부도 얻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그에 대해 들은 것은 과학자로서 화려한 이력이나 연구 성과가 아니라, 그의 연구실에서 고통받은 학생과 연구원의 비참한 이야기였다. 외부자에게 그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 과학자 10인 중 한 명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은 다만 연구실 내의 절대 권력이 은폐해왔을 따름이다.

언론이 전도유망한 과학자 앞길 망친다?

황우석 사태 때도 그러했듯이, 이른바 잘나가는 과학자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아무것도 모르는 언론이 전도유망한 과학자의 앞길을 망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오히려 언론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과학계를 취재하고 문제를 보도해야 한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으면 국민도 알 수가 없다. 과학계 카르텔이 자라난 토양이 바로 그 ‘무지’이다. 연구실이 대다수 사람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동안 과학계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에 의해 황무지가 되어간다. ‘진실 보도’로 망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탐욕에 찌든 적폐 과학자들뿐이다. 그들이 망해야 과학이 산다.

이대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박사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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