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직후, 19살 스위스 소녀가 30만 명이 목숨을 잃은 폴란드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에 서 있다. 폐허가 된 폴란드의 재건을 도우려 히치하이킹으로 먼 길을 온 소녀는 끔찍한 현장에서 몸이 얼어붙었다. 화차에는 여성들의 잘린 머리카락이 여전히 쌓여 있다. 이어 막사 벽면에 새겨진 수많은 나비를 발견한다. 죽음을 앞둔 그들은 왜 나비를 손톱으로, 돌조각으로 그려넣었을까? 죽음학의 대가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19살에 품었던 질문의 답을 25년 뒤에 찾았다.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죽음 향한 5단계“나는 생명의 목적을 찾아내고 싶습니다.” 900g, 세 쌍둥이 가운데 맏이로 태어난 그에게 정체성, 삶과 죽음의 문제는 숙명처럼 주어졌다. 70살, 뇌졸중으로 펜을 쥐기도 힘겨운 상황에서 그가 쓴 자서전 는 온갖 오해와 억측에도 이 숙명의 질문에 끈질기게 답하려 했던 여정을 담았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연구해왔기에 나를 죽음 전문가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은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에 가출을 불사하며 그는 의사가 됐다. 1965년 가을, 사무실로 신학생 네 명이 찾아온다. “죽음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그렇게 매주 금요일 ‘죽음과 죽어감’ 세미나가 열린다. 중증 환자들의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려 하는데 쉽지 않다. 동료 의사들이 인터뷰를 막는다. “환자를 이용한다”는 욕도 들었다. 병원에서 죽음은 피하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는 망가진 장기처럼 물체로 다뤄졌다. “아픈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감정과 소망과 의견이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세미나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하고픈 말이 있던 환자들이었다.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마지막 순간까지 울고 있는 내면의 아이를 엘리자베스와 동료들에게 꺼내놓았다. 500명이 토로한 죽어감의 경험을 엘리자베스는 책 으로 묶었다. 환자들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책은 어떻게 한 인간으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을지 알려준다.
이 책에서 엘리자베스는 죽음으로 가며 환자가 맞닥뜨리는 다섯 가지 단계를 추렸다. 첫 번째는 부정. 가슴에서 생긴 종양이 온몸으로 퍼진 한 중년 여자는 립스틱을 바른다. 병이 깊어질수록 더 화려한 옷을 찾는다. 아이가 둘인 스물여덟 살 간질환 환자는 식이요법을 거부하고 심령술사를 찾아다닌다.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분노다. 호지킨스병을 앓는 한 수녀는 간호사들한테 눈엣가시다. 왜 진통제를 달라는 대로 안 주는지, 왜 침대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지 사사건건 분풀이다. 분노의 뿌리는 다른 데 있다. “왜 나일까?” 세 번째는 협상이다. “몇 달만 더 살게 해주신다면 열심히 교회에 다닐게요.” 들여다보면, 그들 마음속에 똬리를 튼 죄책감의 정체를 볼 수 있다. 네 번째는 우울, 마지막 수용으로 넘어가는 데 거쳐야 할 이 단계를 가족이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말기암을 앓는 한 중년 남자는 아내 앞에서 “항상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병에 지는 건 아내에 대한 배신이고 비굴한 거니까. 그리고 “마침내 긴 여행을 끝내고 편안히 쉬어야 할 때”에 도착하는 수용의 순간이 온다. 포기와는 다른 “감정의 공백기”, 편안한 상태다. “삶을 되돌아보면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사람”은 이 단계에 더 쉽게 들어선다.
죽음의 모든 단계에서 환자가 갈망하는 것은, 삶의 순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들어주는 사람 곁에서 그들은 삶의 의미를 좇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세미나에 참여했던 환자들 중 상당수가 다른 환자들의 멘토가 됐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 인간은 저마다 독창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인류 역사의 한 올로 우리 자신을 엮어넣는다.”
환자가 된 의사, 메스 대신 펜을 들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폴 칼라니티는 36살에 이 질문에 답해야 했다. 10년간 하루 14시간씩 일하며 신경외과 수련을 받은 그에게 폐를 뒤덮은 악성 종양들이 가리키는 지점은 확실했다. 꿈꾸던 삶이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찾아헤맨 답을 책 에 담았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 뒤 고되기로 악명 높은 신경외과를 택했다. 뇌수술로 살 수 있지만, 소통 능력을 잃는다면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환자의 삶과 죽음뿐 아니라 정체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단련했건만 그는 “나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일이 이토록 혼란스러울 줄은 몰랐다”고 고백한다. “행동의 주체”였던 의사에서 “행동의 대상”인 환자가 돼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 앞에 서서 그는 평생의 화두를 붙잡고 분투한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사뮈엘 베케트의 시 구절을 되뇌며, 수술실로 돌아가 책임의 무게를 짊어진다.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메스를 들 수 없는 시기가 오지만 펜을 놓지 않았다. 그가 찾은 삶의 의미를 써내려갔다. 사람과 관계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암 투병 중에 낳은 딸 케이디에게 편지를 남긴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입니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등을 쓴 올리버 색스는 안구흑색종이 간으로 전이돼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졌을 때 이렇게 썼다. 82살에 숨을 거둘 때까지 마지막 2년을 그는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는 데 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너새니얼 호손이 말했듯 ‘세상과의 교제’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 그저 감사하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자신의 숙제를 마친 그는 안식일을 맞듯 경쾌하게 죽음을 기다린다. 그의 마지막 기록은 책 로 묶였다.
임사 체험·유체이탈 등 증언 2만 개 분석한 책올리버 색스는 “사후의 삶을 믿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며 “친구들의 기억에만 남고 싶다”고 썼지만, 죽음학의 대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사후 너머 날아간 나비를 찾았다. 몸의 고치를 벗어난 나비는 어디로 갔을까? 그 답을 찾는 실마리는 열두 번이나 집중치료실에 실려갔다 살아나온 여성 슈워츠가 들려줬다. 슈워츠는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까봐 털어놓지 못했던 임사체험을 털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더 나아간다. 종교, 인종을 뛰어넘어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했다. “너무 편안해서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요.” 그 증언을 바탕으로, 그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탄생과 죽음이 비슷한 경험이라고 결론 내렸다. 각각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었다. 나중에는 탄생과 죽음 가운데 죽음 쪽이 훨씬 즐겁고 더욱 평화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임사 체험, 유체이탈 체험에 대한 증언 2만 가지를 분석해 그가 쓴 책이 이다.
나비는 첫 번째 단계로 날아오른다. 보이지 않던 눈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는 완전체로 공기 중에 떠오른다. 두 번째 단계에서 영혼과 에너지의 세계로 넘어간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해도 에너지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들를 수 있다. 나비는 이 단계에서 안내자를 만나 3단계로 진입한다. 거기 눈부신 빛이 기다리고 있다. “온기, 에너지, 영혼, 무조건적인 사랑, 마침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마지막, 사랑의 근원에 닿으며 삶을 회고하고 이런 질문에 맞닥뜨린다.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고 또 받았는가.”
우리는 죽음으로도 성장한다평생 죽음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삶의 목표는 성장”이라고 말한다. 죽음으로도 성장한다. 죽음은 삶이 끝나는 순간이 아니라 ‘변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성장의 최종 목표는, “무조건적 사랑”이다. 이를 자신의 삶으로도 증명했다. 1994년, 그는 동네 사람들한테 ‘공공의 적’이 됐다.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갈 곳 없는 에이즈 감염 아이들을 보살필 보금자리를 만들려 했던 계획은 가로막힌다. 살해 위협까지 이어진다. “누구나 삶 속에서 고난을 경험한다. 쓰라린 경험을 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더 배우고 성장한다.” 그와 공감한 사람들이 나섰다. 350개 가정에서 아이들을 입양했다.
1996년 뇌졸중 발작이 여섯 번 그를 덮쳤다. 고난에서 의미를 찾는 엘리자베스에게도 마지막 역경은 버거웠다. 24시간 누군가의 간호에 의존해야 하는 시간들이다. 끊임없는 통증에서 “졸업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는 썼다. “나는 지금 인내와 순종을 배우고 있다. 우연은 없다. 사람은 배워야 할 것을 모두 배웠을 때 삶을 마감한다.” 올리버 색스는 “저마다 자기만의 길을 찾고,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자기만의 죽음을 죽는 운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저마다 ‘자기’들 안에는 사랑의 신성이 있다.
2004년 78살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꽃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숨졌다. 장례식은 파티를 닮았다. 그의 두 자녀는 풍선으로 장식한 하얀 상자를 열었다. 커다란 호랑나비가 날아올랐다. “뒤돌아보고 삶을 헛되이 보냈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가세요. 해온 일을 후회하지 않도록, 또는 다른 삶을 바라지 않도록 살아가세요. 정직하고 충만하게 삶을 살아가세요. 살아가세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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