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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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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평화와 그 적들

문정인 발언 트집 잡는 자유한국당과 남북 정상회담에

저주 퍼붇는 미 주류 언론의 ‘평화의 봄’ 시샘
등록 2018-05-09 10:33 수정 2020-05-03 04:28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5월2일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왼쪽) 취임식에서 팔을 두드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5월2일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왼쪽) 취임식에서 팔을 두드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AFP 연합뉴스

한반도를 옥죄어온 냉전체제를 해체할 절호의 기회를 다시 만났다. 물경 30년 가까운 세월 만의 일이다. 남과 북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얼싸안으며 지구촌에서 유일한 냉전의 외딴섬 한반도에도 평화의 봄기운이 완연하다. ‘호사다마’라 했다. 좋은 일에는, 예부터 ‘마’가 끼었다. 나라 안팎에서 말이다.

허황된 ‘주한미군 철수’ 논쟁

“문정인(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청와대와의 긴밀한 교감 속에 선제적 여론 조성 차원에서 진행된 역할 분담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청와대는 평화협정 체결의 조건이 북한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인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주한미군 철수가 청와대의 뜻이 아니라면 문정인 특보를 즉각 파면해야 할 것이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은 5월2일 이렇게 주장했다. 미국 외교안보 전문매체 인터넷판에 이틀 전인 4월30일 문정인 특보가 기고한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의 길’이란 제목의 글을 문제 삼고 나선 게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결국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판문점 선언이 결국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핵우산 철폐를 의미했던 건지 정부는 분명하게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가 된 문 특보의 글을 꼼꼼히 읽어봤다. ‘철수’란 낱말은 두 차례 등장한다. 먼저 4·27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이어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에 대해선 보수 야당이 강력 반발할 것이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요한 정치적 딜레마가 될 것”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자유한국당이 문제 삼은 내용은 정작 따로 있다.

“한국도 국내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은 어떻게 될까?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주둔을 지속하는 걸 정당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확인하자. 문 특보는 ‘철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수 주장’으로 둔갑한 이유가 무엇일까? ‘해독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문 특보의 지적을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우리의 임무는 적의 공격을 억제하고, 필요시 대한민국을 수호하여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주한미군 누리집(www.usfk.mil)에 올린 인사말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목적을 이렇게 규정했다. ‘적’이 북한을 가리킨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러니 문 특보의 주장은 1)주한미군은 북한이란 ‘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하기 위해 주둔한다. 2)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북한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3)따라서 평화협정 체결 이후엔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도 사라진다는 논리를 밝혀 적은 것에 불과하다. 틀린 말 하나 없다.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원한다면, 그 ‘명분’은 자유한국당이 찾으면 될 일이다.

미국 주류 언론의 딴지 걸기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다.” “지나치게 과장됐다. 구체적인 내용이 거의 없다.” “진짜 어려운 건 지금부터다.”

국내에서 허황된 ‘주한미군 철수’ 논쟁이 벌어지는 새, 미국에서는 온갖 ‘결심’과 ‘훈계’가 난무한다. 칼럼니스트 맥스 부트는 남북 정상회담 당일인 4월27일 “과장된 정상회담 결과에 속지 말라.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어보지 않았느냐”고 주장했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개인적인 생존과 정권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핵무기를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경험’이 근거의 전부다.

이틀 뒤엔 칼럼니스트 제니퍼 루빈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속아넘어갔다”는 글로 가세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보좌진에게 제안하고 싶다. ‘한국과 맺은 안보동맹을 배반하지 말라’는 글귀를 출력해 대통령에게 전달해주기 바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가들한테 우리가 ‘갈취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사상 최고의 거래’를 성사시킬 때까지 기다려보자. 그럼 미국이 진짜 ‘갈취당하는’ 모습이 어떤지 볼 수 있을 테니까.” 이쯤 되면 저주에 가까운데, 더한 주장도 있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역시 회담 당일 기고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북-미 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하고 있는 ‘협상 능력’에 대한 분명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협상이 실패한다면, 치러야 할 대가도 클 것이다. 외교가 끝난 자리에선 군사적 옵션 논의가 재개될 수밖에 없다. 아시다시피 정상(서미트·북-미 정상회담을 비유해 표현한 것) 다음엔 벼랑뿐이다.”

비슷한 주장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의 백악관 출입기자인 마크 린들러는 4월27일치 기사에서 남북대화 재개를 두고 “북한을 옥죄는 강력한 대북 경제제재의 효과가 떨어지는 건 불가피할 것”이라며 “북한이 대화의 손짓을 내밀고 있는 상태에선, 대북 선제 군사공격 경고도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년 내내 전쟁 위기에 직면했던 ‘동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슨은 같은 신문에 조금 더 ‘솔직한’ 말투로 이렇게 썼다.

“또 하나의 미국 행정부가 북한에 속아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비극적인 일이다. 백악관에 좀더 나은 조언을 해보고자 한다. ‘다른 좋은 대안이 없거든, 현상을 유지하는 편이 낫다.’ 따지고 보면, 지난 65년 동안 미국의 이익에 충분히 부합해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런 미국 주류 언론의 행태에 비판이 없는 건 아니다. 진보 매체 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평화를 위한 준비를 마치자, 미국 전문가들이 공포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남북 정상회담,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적극적인 태도를 위험천만한 일로 매도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신 차려, 친구들.”

“다른 어떤 선언문과 마찬가지로, ‘판문점 선언’도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 위에 말이 적혀 있고, 그 말에 생각이 담겨 있다.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관 출신으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선임 정책보좌관을 지낸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은 한반도 전문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얘기다. 칼린은 미국 주류 언론의 호들갑에 대한 비판을 담은 ‘남북 정상회담 다르게 보기’란 제목의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정신 차려, 친구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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