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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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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목소리가 들려

중국 개혁·개방 전문가 안치영 인천대 교수가 비교한

북한 ‘7기3차 전원회의’와 중국 ‘11기3중전회’
등록 2018-05-09 10:30 수정 2020-05-03 04:28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비핵화’의 전제로 두 가지를 내걸었다. 그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사실 2013년 3월 채택한 ‘핵·경제 병진노선’은 애초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다. 안보를 위해 ‘핵’을 가진 채 고립돼 있는 한, 경제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4월20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7기3차 전원회의) 결정을 눈여겨보는 이유다.

“북한은 이미 내부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핵심은 한국과 미국이 체제 안전 문제와 관련해 얼마나 원활하게 협력을 하느냐다. 그것만 확정되면,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체제 안전 보장 땐 북, 핵 포기

안치영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세계 유일의 폐쇄국가인 북한에서 40년 전 중국의 개혁·개방 선언과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며 “체제 안전만 보장된다면 북한은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안 교수는 ‘중국 개혁·개방 정치체제의 형성(1976~1981년)’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의 전문 연구자다. 은 지난 5월2일 오전 인천 송도의 연구실에서 안 교수를 만나, 중국 개혁·개방의 시발점인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3중전회)와 북한 노동당 7기3차 전원회의를 비교해봤다.

남북 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두고 북한이 노동당 중앙위 7기3차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을 폐기했다.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이 개혁·개방을 결정한 11기3중전회와 비슷하다. 그때 중국이 개혁·개방을 결정했다고 하지만, ‘개방’이란 표현은 당시 공보에 나오지도 않는다. ‘개혁’이란 말도 두 차례만 등장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당 사업의 중심이 경제 발전 노선으로 전환됐기에 사후에 11기3중전회가 개혁·개방의 시작이란 평가를 받은 게다.

7기3차 전원회의에서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강조했는데.

중국의 11기3중전회에서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강조했다. 그게 결국 개혁·개방 선언이었다. 원래는 사회주의혁명 이후 경제 건설과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인민의 삶을 개선시키고 부강한 국가로 만들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중국은 문화대혁명 등 혼란을 거치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 핵폭탄과 수소폭탄을 가지고 인공위성을 쏘아올렸지만, 인민은 여전히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존 방식으로는 경제 발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경제 발전 방식에 대한 개혁과 더불어, 서방의 자본과 선진 기술을 도입하는 개방을 선택한 게다.

개혁·개방과 함께 대외협력 강화 변화하는 외부 정세도 중국의 개혁·개방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있다.

대외관계도 당연히 중요하다. 1970년대 말까지 중국 지도부는 단기간에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쟁의 위험은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 때문에 있었는데, 특히 중-소 갈등으로 소련의 위험이 주요한 것으로 봤다. 이는 역으로 중-미 관계 개선의 중요한 조건이었고, 중-미 관계 정상화가 중국 개혁·개방의 중요한 전제였다. 중-미 수교 시점에 맞춰 11기3중전회에서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개혁·개방 진전에 따라 경제가 발전하면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도 강해진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중국 지도부는 더 이상 전쟁이 날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산당 내부에서 반발은 없었나.

개혁·개방과 함께 중국은 대외협력을 강화했다. 서유럽 등지를 통해 막대한 지원이 들어왔고, 중국 지도부는 점진적으로 특구를 만들어 조금씩 개방으로 나아갔다. 개방의 폭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 내부 위기도 많았다. 문화대혁명 때 실각한 개혁파뿐 아니라 보수파까지 복권된 탓에, 개혁 체제에 대한 보수파의 반발이 심했다. 특히 광둥성 선전 같은 곳은 조차지를 일컫는 ‘비지’(飛地)로도 불렸다. 자본주의에 투항했다는 얘기다. 당시 선전 경제특구에 철조망을 쳐놨는데, 선전뿐 아니라 광둥성 전체에 철조망을 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양날의 검, 북핵개혁·개방 초기엔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11기3중전회 폐막 직후) 신일본제철의 지원을 받아 건설한 상하이의 바오산강철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바오산강철은 무리한 외자 도입으로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는 잘못된 정책이란 비판을 받았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세’였고, 중도에 포기하면 손실이 너무 컸다. 하지만 사업을 지속하다보니 성과가 나왔고, 이후 개혁·개방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주의체제에 시장이 도입되면서 생긴 혼란도 극심했을 텐데.

198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상품경제’란 표현이 나올 정도로 실질적으로 시장이 도입됐다. 엄연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경제’란 표현은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게 이른바 ‘싱쯔싱서’(성씨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논쟁이다. 국가경제와 시장경제의 괴리 속에 부정부패도 심해졌다. 1978년부터 1986~87년이 개혁의 수혜자였다면, 시장경제 도입으로 인한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결국 1989년 6일 천안문 사태로 이어졌다. 시장을 둘러싼 논쟁은 ‘남순강화’(1992년 초 덩샤오핑이 선전 등 개혁·개방 지역을 시찰하고 담화를 발표한 일)를 통해 ‘사회주의적 시장’도 가능하다는 쪽으로 정리됐다.

북한의 개혁·개방과 비핵화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도 많다.

중국의 개혁·개방 경험이 과거엔 북한에 부정적으로 비쳤을 수 있다. ‘혁명에 대한 배반’이라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도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따지고 보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나선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냉전 해체 뒤 남한은 중국·소련과 수교했지만, 북한은 미국·일본과 수교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 안보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둘째, 경제적 문제다. 경제력 격차 때문에 재래식 군비경쟁을 버텨낼 수 없었다. 결국 북한 처지에선 핵이 유일한 안전 보장 수단이 됐다. 하지만 핵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안보 위협이 더 커지면서, 핵으로 확보한 안보 역시 불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경제 건설을 위해 개혁·개방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핵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북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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