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북핵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1991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북핵 대처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자 한국과 미국은 협의에 들어갔다. 노태우 정부에선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선 폴 울포위츠 국방부 차관이 수석대표로 나서 8월6~7일 하와이에서 협의를 했다. 해제된 미국의 비밀 문서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울포위츠는 “북한이 제안해온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는 북핵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다”고 했고, 김종휘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울포위츠는 ‘비핵화’를 제시했다.
미국의 특권적 권리는 유지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이 발효된 뒤 통용되는 국제법적 용어는 ‘비핵지대’(Nuclear Weapons Free Zone)다. 핵확산금지조약을 비롯한 각종 유엔 문서에도 비핵지대가 일반적인 용어로 쓰인다. 중남미,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지역’뿐만 아니라 몽골도 비핵지대다. 그런데 왜 한반도에서는 비핵지대가 아니라 ‘비핵화’(Denuclearization)라는 표현을 써온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한반도 핵문제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북핵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국은 왜 ‘비핵지대’를 거부하고 ‘비핵화’를 제시한 것일까? 이는 당시 비핵국가이자 핵확산금지조약 회원국이던 남북한의 권리, 즉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는 금지하고 핵보유국인 미국의 의무는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은 물론이고 남한의 핵개발 가능성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최호중 외무부 장관에게 친서를 보내,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기필코 저지할 테니 한국은 “자체적인 핵무기 개발”과 같은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지 말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이에 최호중 장관은 “한국이 독자적 행동을 취하지 않을 테니” 북한의 핵개발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 답장을 기인한 송민순 당시 외무부 안보과 과장은 미국이 북핵 문제 못지않게 “한국의 핵개발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송민순, , 2016)
이에 따라 미국은 남북한의 핵무기 개발 능력을 제거하면서도, 자국의 핵정책에 영향을 주지 않는 방안을 고안해냈다. 바로 비핵화였다. 실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는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의 의무는 단 한마디도 언급돼 있지 않다. 한반도 핵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미국이 빠진 비핵화 선언은 애초부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비핵지대조약에선 핵보유국의 비핵국가에 대한 핵 불사용 약속과 지대 내 핵무기 배치 금지 등의 의무가 포함된다. 그에 따라 미국이 ‘조선반도 비핵지대’에 동의하면, 한반도와 그 인근에서 누려왔던 특권적 권리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지게 된다. 여기서 ‘특권적 권리’란 미국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핵 선제공격 옵션을 유지하고, 핵무기를 한국에 재배치하거나 일시적으로 경유하는 것 등을 뜻한다.
네오콘이 고안한 ‘CVID’북핵 문제 해결을 둘러싼 최근 상황으로 돌아와보자. 지난 3월 초, 문재인 정부 특별사절단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와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 말했다고 밝혔다. 이를 전해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영구적 비핵화를 위해 5월 이내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 중국을 전격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은 3월26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선대의 유훈에 따라 조선반도 비핵화 실현에 주력하는 것은 우리의 시종일관된 입장”이라고 거듭 밝혔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은 남한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는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 그리고 “북-미 관계 정상화”를, 시진핑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는 “한·미가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를 한다면”을 비핵화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렇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말한 조건이 충족되면 비핵화는 이뤄질 수 있을까? 그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충족될지가 일단 미지수다. 그러나 협상의 입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한·미 양국이 말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와 북한이 주장하는 “조선반도 비핵화”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6월 한-미 정상회담 때부터 CVID를 북핵 해결의 원칙으로 삼아왔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CVID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미 양국이 CVID를 고수하면 합의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전망은 CVID의 역사에 근거한다. 이 표현은 아들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을 주도했던 네오콘이 2003년에 고안한 것이다. 그 핵심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이 앞서 소개한 울포위츠였다. 그는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부 부장관으로 있으면서 네오콘의 수뇌인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찰떡궁합을 이뤘다. 또 한 사람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전격 발탁한 존 볼턴이다. 볼턴은 2001~2004년 국무부 차관으로 있으면서 1차 북핵 위기를 종식시킨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무력화한 핵심 인물이다. 그에게 실체가 불분명했던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은 ‘제네바 합의를 깨부술 해머’였고 CVID는 신념이었다.
네오콘이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했던 부시 행정부는 2003년 4월 열린 북·미·중 3자회담과 그해 8월 시작된 6자회담에서 북한에 CVID를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일축했다. CVID는 “패전국에나 적용되는 표현”이고, 미국의 의도가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평화적 핵활동”까지 금지하려는 데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2003년 8월 시작된 6자회담은 2005년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관계 정상화와 경제협력을 하겠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9·19 공동성명을 채택할 때까지 CVID를 둘러싼 거친 말싸움으로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치열한 공방 끝에 9·19 공동성명에는 “완전한”과 “불가역적인”이 빠졌고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만 남게 됐다. 이후 CVID가 되살아난 것은 이명박 정부 때다. 한·미 양국, 혹은 한·미·일 3개국은 “CVID가 북핵 해결의 원칙”이라고 밝혔고 이 원칙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선대의 유훈’과 트럼프의 구미북한은 핵실험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CVID를 거부하고 결국 6자회담 참가국들도 이에 동의했다. 북한이 이후 6차례의 핵실험과 수많은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통해 “국가 핵무력 건설 완성”을 선언한 상태다. 그런 북한이 CVID에 동의할까?
또 하나 유념할 것이 있다. 김정은이 “선대의 유훈”이라고 밝힌 “조선반도 비핵화”의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2016년 7월6일 공개된 북한 정부의 대변인 성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성명에는 김정은 집권 뒤 조선반도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가장 구체적으로 담겼다. 성명에선 “우리가 주장하는 비핵화는 조선반도 전역의 비핵화”라며 5가지 요구 사항을 내놨다. 첫째, “남조선에 끌어들여놓고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미국의 핵무기들부터 모두 공개하여야 한다.” 둘째, “남조선에서 모든 핵무기와 그 기지들을 철폐하고 세계 앞에 검증받아야 한다.” 셋째, “미국이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 수시로 전개하는 핵타격 수단들을 다시는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담보하여야 한다.” 넷째, “그 어떤 경우에도 핵으로 우리를 위협 공갈하거나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여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약하여야 한다.” 다섯째, “남조선에서 핵사용권을 쥐고 있는 미군의 철수를 선포하여야 한다.”
이 가운데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요구는 북한의 프로파간다(선전)의 성격이 짙거나 협상시 타협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섯째는 모호성을 품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남조선에서 핵사용권을 쥐고 있는 미군의 철수를 선포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 조항은 미국의 대북 핵위협이 사라진 조건 아래서라면, 북한이 미군 주둔을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넷째 조항이다. 한-미 군사훈련 규모를 비롯해 핵우산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현재에도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앞의 내용은 김정은 시대 들어 새롭게 나온 것이 아니라 “선대” 때부터 줄곧 나온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반도 핵문제 해법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CVID’와 ‘조선반도 비핵화’가 거칠게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나는 한반도 비핵지대조약 체결이 유력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남북한이 지대 내 당사국들로 이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중국·러시아 등 주변 핵보유국들의 의무 사항도 명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보자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 비핵화’와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에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유도하는 데 효과적인 접근법이 될 수 있다. 동시에 북한의 비핵화 공약에 대한 국제법적 구속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미국을 설득하는 측면도 있다. 아울러 북핵 문제와 관련해 전례 없는 접근이라는 점에서 전임 대통령들과 차별성을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미, 핵기득권 내려놔야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은 도처에 있을 것이다. 울포위츠가 비핵지대를 거부한 핵심적인 이유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하지만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기득권을 내려놓기 꺼렸던 것이야말로 북핵을 키워온 이유다. 하여, 핵문제를 해결하려면 북한 못지않게 미국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양쪽의 결단을 이끌어내야 할 역사적인 책무가 바로 한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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