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세대의 세 작가에게 물었다. 무엇을 읽고 쓰고 싶었는지,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서사는 무엇인지를. 지난 7월5일 저녁 7시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조선희, 김용언, 이민경 작가와 대담했다. 대담은 예정된 시간을 지나 3시간 동안 이어졌다.
아울러 사진 찍는 여성들의 ‘여성 기록하기’ 작업도 담았다. 페미니스트 여성을 담는 사진가, 육아를 하면서 작업 중단의 어려움을 느끼며 서로를 찍어주는 작업을 하는 여성 사진가 그룹의 다양한 ‘찍는 서사’이다. _편집자
조선희 1990년대 초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국내에서 사회주의 역사 연구의 장벽이 헐렸다. 역사 연구 붐이 일었다. 책과 연구서가 많이 나왔다. 어느 날 ‘허정숙’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우리 세대에게 신여성이라면 나혜석뿐이었는데 다른 신여성을 본 거다. 허정숙에 대해 ‘결혼을 다섯 번 했다, 성이 다른 아이 넷을 낳았다’는 내용을 봤다. 보통 신여성들이 마지막에 ‘폭망’하는데, 허정숙은 무장투쟁하러 중국에 가고 평양에 가서 장수를 누렸다. 새롭고 신기하고 쇼킹했다.
허정숙 자료를 보다가 사회주의 계열의 또 다른 신여성들을 만났다. 주변 남자들도 보였다. 자료 가운데 사진 한 장(청계천으로 짐작되는 개울에 있는 허정숙·주세죽·고명자)을 봤다. 이미지가 신선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1920년대 사진인데 세 여자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 사진 속 인물이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다. 소설 프레임을 세 여자로 잡고 책 제목도 ‘세 여자’로 했다.
‘김치년 100년사’김용언 어느 날 고종석 선생님이 트위터에 전혜린에 대해 쓴 걸 봤다. ‘전혜린을 전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굉장히 과대평가받았다’고 깎아내렸다. 10대 시절 전혜린 작품을 좋아했다. 트위터 글을 보는 순간 갑자기 울컥했다. 한국 남자 작가들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 과대평가됐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여성 작가를 이야기할 때는 ‘근데 좀 과대평가를 받았지. 그 상을 왜 받았지’라고 평가한다.
이런 생각을 할 무렵 독립잡지 에 전혜린에 대한 원고를 썼다. 글 쓰면서 십몇 년 만에 전혜린 수필집을 다시 펼쳤더니 어릴 때 읽은 것과 느낌이 달랐다. 미출판 일기모음도 읽었는데 수필을 읽을 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릴 때 알던 전혜린과 29년 만에 다시 읽은 전혜린이 너무 달랐다. 철부지, 미성숙함, 서구 추종, 이런 몇 마디의 평가가 단편적인 기억만 가지고 한 것 같았다. 독자로서 전혜린 글의 평가 기준에 대해 써보자 생각했다. 이어 ‘김치년 100년사’에 대해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1910년~2010년대 김치년 카테고리에 묶인 여자들을 찾아보다가 (너무 많아서) 많이 줄여야 했다. 튀는 여자, 잘난 여자, 교육받은 여자에 대한 평가 기준이 거의 동일했다. 전혜린에 대한 평가처럼. 100년 동안 거의 (여성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민경 첫 책 를 쓴 건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을 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을 하나로 모았고, 책 출간 펀딩액이 4천만원 넘게 모였다. 펀딩 후원자들에게 책 배송을 마치고 ‘이 쾌거가 금방 잊힐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의 반복되는 성취가 현재를 벗어나면 금방 없던 일이 될 거라는 절망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제대로 기억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지금을 고정해두고 싶었다. 그때 마침 4월에 들었던 강의가 떠올랐다. 김현미 선생님 강의였다. 선생님이 “여성들한테 계보가…”라고 말해서 나는 ‘없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여성들한테 계보가 있죠”라고 하셨다. ‘영페미’(젊은 페미니스트) 이야기해주시고, 운동권 내 진보 여성들이 어떻게 갈라져 나왔는지 얘기하면서 계보가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놀랐다.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있는데, 문제가 뭐냐면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 교육을 충실하게 따랐다. 정규교육 과정에 있는 모든 것을 외웠는데 어째서 나는 하나도 모르는가. 누군가가 임의로 여성 역사를 정규교육 과정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를 기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문제집 형식의 워크북 를 만들었다. 조선희 선생님이 ‘허정숙’을 발견했듯이 나는 책을 준비하면서 근대 첫 여성 소설가 ‘김명순’을 발견했다. 김명순은 기생의 딸이었고 성폭력 2차 가해로 죽었다. 그는 “오늘날 나와 같은 여성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명순은 여러 문학적 업적이 있음에도 끊임없이 폄하됐구나 생각했고 다시 한번 거슬러 올라가보게 됐다. 일반인 여성으로서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여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책을 통해 동시대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인가.이민경 책 제목처럼 ‘우리한테 계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 (계보를) 도통 몰랐는데 있다고 한다.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이구나 생각했다.
조선희 나는 계보가 낯설다.
이민경 2015년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운동으로 젊은 여성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호명하기 시작했다.
김용언 그 무렵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이민경 그때부터 페미니즘 기사가 신문 1면에 뜨는데, 이게 (이 현상이) 원래 존재한 것인지, 갑자기 일어난 것인지, 우리 앞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내가 아는 건 호주제 폐지 운동 정도다.
알고 보니 한국 페미니스트에게도 일관된 계보가 있었다. 여성들에겐 세대적 연결이 존재한다. 1·2·3·4세대 학자적 페미니즘이 아니라,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던 것, 예를 들면 제주해녀항쟁, 호주제 폐지 운동 등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학교 다닐 때 역사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내 것 같지 않았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전쟁, 국가 설립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 역사에 이입하는 게 어려웠다. 그러나 를 만들 때 재미있었다. (여성들의 역사를) 같이 따라가서 문제를 푸는 게 재밌었다.
여성의 독서에 열등감을 준 범인조선희 우리에게 페미니즘 계보 쓰라 하면 유장하게 쓸 것이다. (이민경씨가) 수요자 입장에서 접근한 게 대단하다.
김용언 대학교 3학년쯤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나 고민하다 기자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매우 감정적이던 나를 바꾸고 합리적 의식을 가지려 노력했다. 수식어와 말줄임표를 쓰지 않는 간결한 문장을 쓰려면 의식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읽은 책들을 밀어내고, 유명한 남자 문인들인 김훈과 고종석의 문장을 모범으로 생각했다. 17년 뒤 전혜린을 다시 읽고 고종석의 평가가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특히나 대부분 남자였던 선생님들에게 들은 말들 ‘야, 너 울지 마’ ‘문장 짧게 써’ ‘전혜린을 아직까지 읽어?’를 떠올렸다. 꽤 오랫동안 그들의 말과 기준이 나의 것이라고 체화했다.
이민경 어릴 때부터 항상 책을 읽었다. 남성 작가의 책이 아닌 박완서, 에거서 크리스티의 책을 읽었다. 그런데 내가 읽은 여성 작가의 글에 대해 세간의 평가는 이런 식이다. ‘사소하다’ ‘결핍됐다’ ‘불완전하다’. 하지만 나는 박완서의 글은 이해됐는데 김훈의 글은 이해되지 않았다. 여성 작가 폄훼의 역사를 담은 를 읽으면서 나의 독서에 대한 수치심, 열등감을 준 범인을 잡았다는 느낌이 든다.
조선희 소설 주인공인 그 시대 여성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중소외’였다. 사회주의 계열이어서 냉전시대에 (이들의 사연이) 묻혔는데, 여자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묻혔다. 이중소외된 인물을 복원한다는 게 나한테는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2권으로 넘어가면 해방공간,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 집필 의도의 에센스는 그 안에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문화적 딜레마, 분단 상황이라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몽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때 한국 사회가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복기해보고 싶었다. 김구의 를 감동하며 읽었다. 해방공간 역사를 들여다보면 김구는 1945년 이전까지는 옳았지만, 해방공간의 판단 착오와 실책을 보면 1945년 이전 업적을 다 까먹을 정도인 것 같다. 일본 식민지 시기는 36년으로 끝났지만 ‘분단 체제’ 이슈는 훨씬 장기화됐고 심각한 문제다. 거기에서 결정적으로 김구가 부정적 역할을 했다. 어쨌든 우리가 해방 전후 무엇을 잘못했는지 보니 여러 정치인이 나왔다. 정치인 가운데 우리 민족의 현안을 해결할 정치인이 없었다.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닌 거다.
나의 글쓰기는 페미니즘적인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가.조선희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신 없다. 차별에 대해서는 늘 분노한다. 분노와 별개로 (내게는) 여러 가치 가운데 남녀평등 문제가 압도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대학 때 여성문제연구회를 만들었다. 스터디그룹을 하고, 서클을 만들었다. 당시 을 읽었다. 가족제도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우리 자리를 찾으려 노력한 것이 나의 대학 시절 여성운동이다. 대학 때 읽은 책들이 평생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고 사표가 됐다. 그 독서가 바탕이 돼 지금껏 책 6권을 썼는데 3종이 여자에 관한 것이다. 도 그중 하나다.
김용언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대학 다닐 때인 1990년대가 영페미 출현 시기다. 영페미와 퀴어운동이 가시화됐다. 그때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했다. 외롭지 않았다. 페미니즘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2010년이 되니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페미니즘은 시끄러웠고 많았는데 말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인가이민경 이전 세대에는 ‘페미니스트냐 아니냐’가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 2015년 들어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머니 세대는 우리에게 차별이 사라지고 나아졌다고 한다. 엄마한테 부당한 일을 전하면 “우리 땐 밭 갈다가 애 낳았어” 한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20년 정도는 사회가 안전하다고 믿고 살았다.
강남역 살인사건 뒤에야 그동안 사회가 평등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태어난 무렵 여아 낙태율이 높았고 여자아이 이름에 ‘그칠 지’(止)를 쓰고 여자 짝꿍이 없었다. 차별은 처음부터 존재했는데 이 정체가 윗세대와 다른 모양이었던 것뿐이다.
김용언 내가 기억하는 영페미 운동은 PC통신 기반이었다. 이 기반이 사라지면서 그들의 정체성이 많이 사그라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조선희 나는 주류 사회 안에서 문화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기 위해 틈입한 첫 세대다. 기업체에서 사회생활을 한 첫 세대의 투쟁은 계보로서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민경 난점이 있는 것 같다. (윗세대가) 자신은 투쟁을 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투쟁은 여성을 뽑지 않은 고용 불평등에 맞선 것이다. 그냥 여성으로서의 투쟁이다. 지금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를 저어하는 그들(윗세대)을 페미니스트 계보에 넣으려 할 때 (서로 정체성의 다름을 넘어) 만나는 접점이 있을까.
조선희 우리 세대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여자한테 적용 안 했다. 남자들 가운데 여성 친화적인 이들에게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그 말에 익숙하지 않다. 여자들에게 페미니스트라고 이름 붙일 필요가 없다. 두 딸의 아빠는 페미니스트가 돼 이런 말은 했지만 말이다. 원래 난 피메일(female)인데 무슨 페미니스트가 또 돼야 하는가.
이민경 요즘 다시 페미니즘이 불고 있다. 계보를 찾아나설 때 여성들의 직업투쟁 부분은 가려졌다. 그분들은 일상에서 투쟁해 사회에 진출했다. 그런데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로서 사회생활을 하며 정체화·집단화되지 않고 흩어졌다.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페미니스트로서의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 서사가 쏟아져나오길 2017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글쓰기는.이민경 너무 재미있다. 읽으며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가 위인전집을 사줬는데 유관순과 신사임당을 많이 읽었다. 유관순을 읽으면서 민족주의적 분노가 일었다. 일본한테 고통을 당했다는 게 슬펐다. 유관순처럼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을 읽고 싶다. 앞으로 등 여성에 대한 소설이, 많은 여성의 서사들이 쏟아져나왔으면 좋겠다.
김용언 기본적으로 한국 근현대사 아카이빙이 너무 안 돼 있다. 한국소설 명작선집을 보더라도 들어간 작품들만 들어가고, 놀랍게도 염상섭조차, 우리가 아는 제일 유명한 것만 있고 덜 유명한 것은 아예 남아 있지 않다. 과거를 알고 싶은데 너무나 많은 게 잊히고 보존이 안 됐다. 하물며 여성 작가들, 특히 여성에 대한 글쓰기는 오죽하겠냐. 과거의 것을 많이 발굴하면 좋겠다. 미스터리 잡지 편집장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 국내에 소개 안 된 여성 작가 작품이나 여성 주인공의 특정한 미스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글 허윤희 기자yhher@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정리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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