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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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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원으로 농민 해방을 꿈꾸다

고령화·저소득에 갇힌 농민 지원하는 기본소득제… 실익 낮은 농촌 지원 제도 대신 농가에 기본급 지급한다면
등록 2016-07-12 17:08 수정 2020-05-03 04:28
전세계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연대 조직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16차 세계총회가 7월7~8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에서 열렸다. 세계총회가 아시아 국가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다. 총회에는 을 쓴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대학 교수, 기본소득 이론의 틀을 마련한 필리프 판 파레이스 벨기에 루뱅대학 특별객원교수, 카탸 키핑 독일 좌파당 공동대표 등이 참석했다. ‘기본소득’은 재산, 노동,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아무 조건 없이 지급되는 일정한 액수의 소득을 뜻한다. 은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은 기부금을 매달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실험을 진행 중인 독일의 기본소득 캠페인 프로젝트와 농민 기본소득에 주목했다. 최근 기본소득을 부쩍 자주 언급하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속내도 함께 살펴봤다. _편집자
쌀시장 전면 개방(2015년)을 앞두고 농민들이 2014년 9월 도심에서 쌀가마를 불태우며 정부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쌀시장 전면 개방(2015년)을 앞두고 농민들이 2014년 9월 도심에서 쌀가마를 불태우며 정부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충남연구원은 지난해 7월, ‘농촌기본소득제 상상워크숍’을 진행했다. ‘30년 후, 농민인 나에게 매월 50만원의 소득이 주어진다면?’이란 물음을 놓고 농민 등 워크숍 참가자들이 농촌 일상의 변화를 상상하는 자리였다. 어떤 내용들이 나왔을까.

“농사가 잘 되든 못 되든 불안하지 않게 된다, 자식과 함께 농사지을 수 있다, 빚을 갚는다, 공무원(예산) 눈치 안 보게 된다, 당당한 부모가 된다, 농한기에 쉴 수 있다. 농촌 사회에 청년이 증가한다, 농민공동체가 활성화된다, 내 논에 물을 대주지 않아도 화를 안 낸다, 자부심을 갖고 유기농 농사를 짓는 사람이 늘어난다, 농사 증가로 환경이 좋아진다, 짜증 내는 일이 줄어든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행복하다는 응답률이 증가한다, 농촌 노인 자살이 감소한다, 농촌 폐교가 재부활한다….”

당시 참가자들이 종이에 적은 표현 가운데 다수 발견된 단어가 ‘해방’이었다. 매월 고정적 소득이 일부 보장되는 변화만으로도 정신적 해방감을 상상한 것은, 그만큼 현재의 삶이 팍팍하기 때문이다.

농업 소득 연 1천만원도 되지 않아

한국 농업의 여건은 수입 농산물 개방 등으로 더 나빠지고 있다. 농가 인구는 1980년 1083만 명에서 2013년 기준 285만 명으로 줄었다. 소득수준도 악화됐다. 도시 근로자 가구 대비 농가 소득 수준이 1980년에는 95.9%로 서로 엇비슷했다. 그런데 2013년 기준으로 농가의 한 해 소득은 도시 가구 소득의 62.5%에 그친다.

2013년 농가의 한 해 평균 소득은 3452만원(농업 이외 소득 포함)이지만 그 가운데 농업 소득은 평균 1004만원이다. 농사를 지어 버는 농업 소득이 한 해 1천만원도 안 되는 농가가 전체 60~70%에 달한다. 이 때문에 한 해 소득이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빈곤 농가가 전체 23.7%(2012년 기준)라는 조사도 있다.

‘고령화·저소득’에 갇힌 농촌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안으로 최근 거론되는 것이 ‘농민 기본소득제’다. 매월 농민 개인 또는 농가에 일정 금액을 지급해주자는 것이다. 먹거리 제공과 자연환경 보존에 기여하는 농촌·농민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해주고, 농촌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득 일부를 고정적으로 보장해주자는 뜻이다.

농민 기본소득제가 제기되는 배경엔 농민의 소득 안정을 위해 도입된 직불금 제도와 농촌마을 개량 사업의 실익이 낮다는 평가가 자리잡고 있다.

농민에게 직접 돈을 주는 직불금제는 논의 면적에 비례해 주는 고정직불금(ha당 100만원 내외), 친환경농업을 유도하기 위해 주는 친환경농업 직불금 등이 있다. 하지만 직불금이 농가의 전체 소득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약 2.7%(2014년)다. 주로 토지 면적 단위로 지급되기 때문에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농에게 직불금이 쏠린다. 70%에 달하는 소농 농가들은 그나마 직불금 수혜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충남연구원의 박경철 책임연구원은 “선진국에 비해 농업직불금이 턱없이 낮고, 그것도 약 10%의 (상위) 농가가 전체 직불금의 약 50%를 차지해 농촌 내 불평등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실적보다 실제적 삶의 변화

30억원 이상을 들이는 마을 개량 사업도 농민의 소득 개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 환경 개선을 위한 시설 투자는 필요하지만 과도하다는 것이다. 마을 수익 사업을 위해 대규모 시설을 짓고도 농민들이 전기요금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운영 역량이 부족해 놀고 있는 시설이 많다. 오히려 농촌마을 현대화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외부 컨설팅 업체의 배만 부르게 한다는 비판도 있다. 거액의 농촌마을 사업이 “농민의 실제적 삶의 변화보다는 중앙정부의 실적 중심 사업”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i>“농사가 잘 되든 못 되든 불안하지 않게 된다, 자식과 함께 농사지을 수 있다, 빚을 갚는다, 공무원(예산) 눈치 안 보게 된다, 당당한 부모가 된다, 농한기에 쉴 수 있다, 농촌 사회에 청년 증가….”</i>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매월 일정 금액을 농민에게 주는 ‘농민월급제’를 진행하지만, 이는 가을철 농산물 수익을 담보로 하는 대출 형식이다.

농민 기본소득제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대안이다. 대농·소농 구분 없이, 또 대규모 마을 개량 사업에 투자하는 돈을 줄여서, 농민에게 직접 일정 금액의 돈을 전달하자는 취지다. 흥미로운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 농림부 장관을 하며 ‘쌀 소득 보전 직불제’를 처음 도입한 김성훈 전 장관이 직불제 보완으로 농민 기본소득제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김 전 장관은 농민 개인이 아닌 농가별로 월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인 월 50만원을 지급하자고 제안한다. 전국 농가 110만 가구에 지급하면 연간 6조6천억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농업에 종사한다는 이유 때문에 소득수준과 의료·복지·교육 등에서 불이익을 받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단계별 도입을 주장하는 안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청장년 농업인 10만 명(1단계)-영세농민(소득 하위 30% 농민) 90만 명(2단계)-모든 농민(3단계)’ 순으로 농민 기본소득 보장을 확대하자는 안(정기석 마을연구소 대표)이다.

농업 관련 연구기관 학자 가운데 농민 기본소득제를 가장 열심히 주장하는 이는 박경철 책임연구원이다. 그는 고령화, 소농, 조건 불리 지역이 중첩된 농촌마을을 골라 시범적으로 충남에서부터 농민 기본소득제를 실시해 그 효과를 평가한 뒤 전국으로 확대하자고 주장한다.

박 연구원은 최근 에 기고한 글에서 “농민이 생존을 위해 소득이 필요하면 기본소득과 같은 직접 지불을 통해 소득을 보전하면 되는데, 각종 사업을 통해 소득을 올리라고 하면 중간 사업자들만 이득을 볼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가구당 농민수당 월 20만원 신설을 정치권에 요구하고 있다.

정부, 농업 예산 발상 전환 필요

농민 기본소득제 도입을 위해선 농업 예산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정부의 대대적인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농촌·농민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모아내는 정부의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선진 농업국으로 평가받는 독일은 연방정부가 나서서 “농업이 우리의 식량을 보장하며 국토 경관 관리, 농촌 공간 보존 등 돈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농업과 농민의 가치를 국민에게 알리고 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기본소득, 특히 농민 기본소득은 유럽보다 한국이 절실하다. 지금대로라면 농업 기반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농민 기본소득제가 왜 필요하며, 과연 실현 가능한지, 사회적 논의를 앞당겨야 한다는 뜻이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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