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도로는 구불구불 곡선을 그렸다. 마을 개량 사업으로 도로를 넓힐 법도 한데, 독일 농촌 어디를 가도 그런 유혹에 빠진 곳을 볼 수 없었다. 최대한 자연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그들만의 방식처럼 보였다. 도로 바깥에선 너른 초원이 봄볕을 받아 싱그럽게 출렁였다. “독일에선 길을 잃고 산골로 들어갈수록 더 아름다운 풍경과 만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만큼 독일 농촌이 깨끗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산골로 갈수록 아름다운 독일</font></font>좁은 도로를 따라 만난 ‘괴리스리트’는 독일 남부의 작은 마을이다. 1343명이 사는 이곳에는 작은 마트가 하나뿐이다. 마트에 있는 현금입출금기가 마을에 없는 은행을 대신한다. 주민 자체 환자 후송 시스템은 있지만, 마을 병원은 없다. 그런데도 마을의 초등학생이 100명, 유치원생이 52명이다. 자녀를 둔 젊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차를 타고 1시간 이내면 닿는 시내로 출퇴근하는 주민도 제법 있지만, 농업과 농가민박 등으로 얻는 수익은 이곳에서의 평온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마을 숲엔 생태학습장 겸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마을의 돌, 나무, 길, 집도 가급적 있는 그대로 유지한다. 개량화된 깨끗함이 아니라, 마을 고유의 매력이 별로 훼손되지 않은 데서 전해지는 기품이 느껴진다. 마을 숲엔 “햇빛과 바람이 있는 숲에 누우면 스스로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는 오스트리아의 문인 로베르트 무질의 글이 적힌 나무판이 서 있다. 무질의 말처럼, 분주한 관광이 아닌 농가에서 느긋한 휴양을 즐기려고 이 마을을 찾은 외지인이 지난해 1만3천 명이나 된다. 이 마을의 에너지 자립도가 96%인 것도 눈에 띈다. 재생에너지(태양광·바이오가스 등)를 통해 전기와 난방을 마을 스스로 해결한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4"><i><font color="#991900"> “농업은 국토 경관 관리, 농촌 공간 보존 등 돈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 정부</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한국의 면장 급인 이 마을의 행정책임자 테아 반스타이너도 인상적이다. 그는 마을 곳곳을 소개하다 유치원에 다다르자, “오늘 감기로 결석한 유치원생이 5명이다”라고 설명했다. 농촌마을의 미래인 아이들의 상황을 일일이 챙기는 세심한 행정은, 농민과 행정 사이의 협력과 협치(거버넌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한국 농촌의 현실과 대조적이다. 이 마을은 최근 30여 년 사이 인구가 25% 증가했다. 반스타이너는 “우리 마을엔 미래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유럽 농촌의 지속성은 다른 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독일 레가우 마을에서 50ha 규모의 농장을 가진 마틴 렌은 2년 전부터 농장 소유를 아들에게 물려줬다. 독일에선 65살이 되면 농부로서 은퇴한다. 농장 운영의 대표권을 아들 등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농장을 덥석 받을 수도 없다. 농민이 되려면, 농업전문학교를 나와 수년간 현장 실습을 거친 뒤 국가시험을 통과해 농민자격증을 따야 한다.
그 과정을 거쳐 후계자가 된 마틴 렌의 젊은 아들은 트랙터를 타고 한국에서 온 일행을 맞이했다. 트랙터에는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그의 어린 딸과 아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아빠의 트랙터를 타고 함께 들판에 나가는 것은 독일에서 흔한 모습이다. 독일 농가에는 로봇 따위의 장난감이 거의 없다. 이 집의 마당에도 미니 트랙터 같은 농기계 장난감들이 앙증맞게 뒹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 엘마우 마을은 알프스산맥을 끼고 있다. 마을에서 올려다보이는 산자락은 ‘거친 황제’란 이름이 붙은 산세답게 위엄을 갖췄지만, 그 밑에 있는 쉴트의 농가민박에선 포근함이 묻어난다. 쉴트는 소를 키우지만, 이것만으론 소득이 충분하지 않아 다른 농가들처럼 민박도 운영한다. 매해 5월부터 8월까진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손님이 몰린다. 이곳의 오랜 단골 손님 자녀끼리 결혼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쉴트에겐 딸이 둘이 있다. 둘째딸은 웃으면서 “부모님의 일(농업과 농가민박)을 이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독일어권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농민 65살 정년 퇴임’이 가능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젊은 아들과 딸이 후계자로서 농업을 잇기 때문이다.
독일의 작은 농촌마을(괴리스리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농부 부모의 뒤를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잇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를 이어 농사짓는 독일 농촌 </font></font>은 지난 5월3일부터 13일까지 대산농촌재단이 주최한 독일·오스트리아 농촌 연수 프로그램에 동행했다. 쌀시장이 개방되고 외국 농산물이 밀려드는 상황에 맞서 ‘농촌의 미래와 지속 가능한 농업’을 고민하는 농업인들이 유럽의 농촌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연수엔 국내에서 친환경농업을 실천하고, 농촌과 소비자 사이 건강한 연결과 마을의 행복한 삶을 고민하는 16명의 농업 관계자(농업인·귀농인·농업 관련 연구원)가 참여했다.
독일 농촌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한 것은 ‘바이오가스’ 시설이었다. 가족 농가뿐 아니라 협동조합 형태의 대규모 농장, 독일 남부 괴리스리트 같은 농촌마을에서도 둥근 지붕 모양의 바이오가스 시설을 많이 볼 수 있다. 농민에겐 에너지를 수확하는 또 하나의 땅이라 불리는 시설이다.
이 시설에서 소똥과 옥수수 등을 발효시켜 생긴 가스를 이용해 전기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열로 끓인 물을 긴 파이프로 운반해 마을 곳곳의 난방도 해결한다. 지역 전력회사는 바이오가스로 생산한 전기를 비싼 값에 모두 매입해야 한다.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의 매입가는 정부가 정해준다. 농가는 매일 쏟아지는 소똥을 처분하면서, 그것으로 전기를 만들어 상당한 수입도 거둔다. 정부 방침을 따라 지역 전력회사가 바이오가스로 생산한 전기를 비싼 값으로 20년간 매입해주기 때문이다.
웬만한 협동조합 농장들은 바이오가스 생산 전기로 하루에 300만원 안팎을 번다. 아들이 농업을 이은 마틴 렌의 집은 가족농이어서 바이오가스 시설이 상대적으로 작다. 그래도 한 달에 800만원(6천 유로 이상) 가까운 수입을 전기 생산으로만 얻는다. 에너지 농사가 농민들을 지탱하는 ‘제2의 다리’가 돼주고 있다.
독일은 전체 전력 가운데 재생에너지를 통해 얻은 전력의 비율을 2025년까지 50% 가깝게 올리려고 한다. 2012년 기준으로, 재생에너지 시설 가운데 개인 소유가 47%, 농부 소유가 10%였다. 농부 소유 비율은 증가 추세다.
➊ ‘공원 속 도시’라 불리는 독일의 도심보다 농촌이 훨씬 깨끗하다.
➋ 농촌전문학교, 현장 실습을 거쳐 농민자격증을 따야 농부가 된다.
➌ 농부는 65살이 되면 은퇴한다. 후계자에게 농장 대표권 등을 물려줘야 한다.
➍ 옛 동독 지역 농촌은 통일(1990년) 이후 집단농장 체제에서 농업협동조합으로 개편된 경우가 많다.
➎ 동물복지 차원에서 소의 등을 긁어주는 기계가 축사에 있다.
➏ 환경보호·동물복지를 위해 농지 면적 1ha당 소 한 마리를 기르도록 제한한다.
➐ 소똥과 옥수수 발효로 생긴 가스로 전기를 생산해 부가수익을 올린다.
➑ 초지 보존, 농촌 경관 관리, 재배 작물 다양화 등 환경에 기여하는 농가에 녹색 직불금을 추가로 준다.
➒ 도시 광장에서 정기적으로 농민 시장이 열린다.
➓ 아빠가 운전하는 트랙터에 탄 어린 꼬마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독일 농가에서 이른바 ‘소똥 전기 수익’이 가능했던 것은 이것을 지원하는 재생가능에너지법(EEG)이 2000년 통과돼서다.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녹색당이 연합정부를 구성했을 때다. 독일이 재생가능에너지의 중요성을 더 크게 자각한 건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직후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과거 사민당과 녹색당 연합정부에서 확정한 핵발전소 폐기 결정을 부분적으로 파기하고 일부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기로 2010년에 수정했다가, 이듬해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 자신의 결정을 모두 폐기했다. 원전을 없애라는 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1980년 이전에 지어진 핵발전소(총 8기)를 즉각 폐쇄했고, 남은 9기도 2022년까지 폐기하기로 했다.
화력·원자력 의존에서 벗어나겠다는 독일 정부의 방침은 재생에너지 확대 강화로 이어졌다. 독일 농촌의 바이오가스 시설은, 농가 소득을 높일 ‘제2의 다리’를 원하던 농부들의 바람과 원전을 폐기하고 자연에서 에너지를 생산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맞닿은 결과물이다. 독일 정부의 이런 의지가 있기 때문에 은행은 농민들에게 바이오가스 시설을 짓는 거액의 초기 비용을 저금리로 대출해준다.
독일·오스트리아 등 유럽 농가는 ‘유럽연합(EU)의 보호 우산’을 더 갖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EU의 한 해 예산 가운데 38%가 회원국 농가의 각종 지원금으로 사용됐다. 농지 면적당 지원하는 기본 직불금 외에, 40살 이하 청년 농민에겐 기본 직불금의 25%만큼 더 증액해 5년간 추가 지급하며, 초지 관리 등 환경보호와 자연경관 유지에 기여한 농가엔 녹색 직불금을 더 준다. 여기에 응달진 곳, 경사지 등 자연조건이 불리한 지역에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직불금이 추가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농민 예우하는 독일 정부 </font></font>독일 농업을 연구한 황석중 박사(전 농촌진흥청 연구관)의 설명이다. “독일 등 유럽의 농민 지원금은 균형 보조금 성격이다. 1차 산업인 농업과 타 산업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산골에서 농사짓는 사람과 기계로 농사짓는 사람 사이의 소득 불균형을 줄이기 위한 보조금이다.”
물론 독일 등 유럽에서도 다양한 지원금과 농업 소득만으로는 생활이 충분하지 않은 농가가 많다. 이런 탓에 농·축산물 가공(빵·치즈·소시지 등), 농가민박 등의 부업으로 소득을 더 충당한다. 직불금을 포함한 농업 소득이 농가의 한쪽 다리라면, 농산물 가공, 농가민박, 바이오가스로 생산한 전기 등으로 얻은 수익이 농가의 또 다른 다리 구실을 한다. 그래서 독일 농민의 한 해 소득은 도시 근로자의 소득 수준에 근접한다고 한다. 반면 2014년 기준으로, 한국 농가의 한 해 소득은 도시 가구 소득의 62.2%에 그친다.
유럽 농가, 특히 독일 농촌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농촌과 농민을 대하는 이 사회의 기본 태도다. 농가의 창고도 가지런히 정리돼 있을 만큼 농촌이 깨끗하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우며, 그 안에서 농민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농촌을 존중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농업인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2%이고, 독일의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에 조금 못 미친다.
하지만 독일 연방정부가 홍보용으로 정리한 ‘농업의 10가지 기능’을 보면, 땅과 경관을 지키는 농민의 자존감을 예우하는 태도가 느껴진다. 독일 정부는 “농업이 우리의 식량을 보장하고, 농업과 연관된 산업에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며, 에너지 문제 해결에 기여한다”고 설명한다. 또 “농업 기술의 발달로 식생활에 대한 가계비 부담이 크게 줄었고, 그 덕분에 국민의 의식주·여가 생활의 질이 향상됐다. 우리 모두 농민의 노고에 감사해야 한다”고 농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특히 독일 정부는 “농업은 국토 경관 관리, 농촌 공간 보존 등 돈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농민이 관리하는 숲, 나무, 들녘 하나하나를 문화적 자산이라 칭한다. “만약 소득이 낮아서 농민이 (농촌을) 떠나면 우리의 값비싼 문화 경관을 잃게 될 것이다”라는 독일 정부의 결론은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황석중 박사는 “알프스산맥이 아름답고, 그곳에서 풀을 뜯는 소도 문화 경관이 될 수 있는 건 (초지를 관리하는) 농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농업과 농촌이 있어야 맑은 공기와 물, 깨끗한 토양이 유지된다. 농업은 우리 삶의 생존 기반을 지켜낸다.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한 (한국의) 정책은 농업의 그런 역할을 존중하는 기반에서 이뤄져야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농업이 무너지면 우리 삶이 쓰러진다</font></font>독일 남부의 작은 농촌마을 괴리스리트의 숲엔 나무로 만든 시소가 있다. 농촌의 미래인 아이들은 숲에서 친구들과 균형을 맞추며 시소를 즐긴다. 이 시소엔 ‘자연환경과 균형을 맞추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농업이 무너지면, 그래서 자연환경이 무너지면, 우리 삶의 기반도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말 것이란 경고처럼 들린다.
독일·오스트리아=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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