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5일 오후 6시. 생각보다 결과는 빨리 나왔다. 찬성 23%, 반대 77%. 스위스의 기본소득 제안이 부결되는 순간이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국민투표 역사상 손꼽힐 만한 패배다. 모든 이에게 먹고살 만한 소득을 보장해준다는 기본소득은 전세계 수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으나, 투표함의 반응은 싸늘했다.
2년8개월 전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투표가 확정되던 순간, 주도단체는 800만 개 동전을 거리에 뿌리는 행사로 자축했다. 스위스 시민 800만 명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주겠다는 대선언이었다. 끝은 시작만큼 화려하지 못했다. 대단원의 막은 서둘러 내려졌고, 투표장 문은 이제 단단하게 닫혔다. 하지만 투표의 여운마저 가신 것은 아니다. 결과를 두고 해석은 분분하다. 백일몽이었다는 자탄도 있고,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누구 말이 옳은지는 두고 볼 일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차분한 ‘사건의 복기’다.
왜 스위스였나우선 한 가지 근본적인 역설에서 시작해보자. 왜 스위스였을까? 기본소득이 정치적으로 좌우를 다양하게 아우르는 주제이긴 하지만, 스위스에서 투표에 부쳐졌던 보편적(또는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그중에서도 꽤 ‘과격한’ 편이다. 중도적 성향의 기본소득론은 대부분 조건부다. 저소득층에게 일정 소득 수준을 보장한다는 취지다. 이에 반해 보편적 기본소득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누리는 권리, 마치 투표권과 같다. 반대론자는 일찌감치 ‘마르크스적 이상주의’라며 폄하했다. 이런 ‘붉은 빛’ 정책을 두고 국민투표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투표는 유럽 내에서도 보수성으로 정평이 나 있는 스위스와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절차적’ 진보성을 자랑하지만 종교·사회·경제·정치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여성 투표권도 1971년에야 도입됐고, 노동의 가치를 엄숙하다 못해 신성시하면서도, 가족의 가치에 대해서도 엄격했다. 일하지 않아도 기본소득을 준다는 얘기를 공상과학이나 유치한 동화로 치부할 사람이 대부분이다.
또 복지제도의 중요성은 포용하면서도 스웨덴과 같은 ‘급진적’ 복지 방식을 경계한다. 게다가 알다가도 모를 것이 많다. 평화를 사랑하고 국제연맹도 발족시키고 온갖 유엔기구를 다 유치했으면서도, 정작 유엔에는 2002년 어렵사리 국민투표를 통해 가입했다. 스위스인들은 정직과 투명성을 필생의 가보로 여기지만, 스위스 은행은 전세계의 비리와 부패를 온몸으로 껴안는다. 도무지 기본소득을 국민적 어젠다로 논의할 만한 나라가 아니다. 해외 언론들이 놀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스위스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국민제안제도다. 주어진 기간 내에 시민 10만 명이 서명하면 해당 안건은 국민투표로 부칠 수 있다. 인구 800만 명 중에 겨우 10만 명이니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생각하기 쉽겠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꼼꼼하게 따지고 서명하는 스위스인의 신중하고 보수적인 기질 탓에 ‘10만’이라는 숫자는 거대한 장벽이다. 하지만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낯선’ 정책은 어차피 기성 정치권에서 논의되긴 어렵고 그만큼 정치적 의제화가 어렵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적어도 스위스에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의제화는 가능하다. 국민제안제도 덕분이다. 그래서 첫 파열음은 스위스에서 만들어졌다.
기존 사회보장제도와 충돌오해도 있다. 국민제안은 오로지 헌법 개정 관련 안건에만 국한된다. 이번 투표도 스위스 헌법에 110a조를 신설하자는 제안에 관한 것이다. 이 조항에는 정부가 무조건적 기본소득(revenu de base inconditionnel)을 제공할 의무가 있고, 이를 통해 국민이 고귀한 삶을 영위하며 공공의 삶에 참여하도록 할 것이며, 기본소득의 액수 및 재원 조달은 별도의 법을 통해 정한다고 돼 있다. 그동안 무수히 논의돼온 2500프랑(약 300만원)이라는 액수는 주도 단체들이 국민을 설득하고 구체적인 논쟁을 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제시한 액수였다. 이번 투표가 성공적이었다 하더라도 2500프랑이라는 액수나 재원 조달 방법은 추후에 의회에서 논의해 결정할 사안이었다.
그럼 왜 국민투표까지 무려 2년8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는가? 국민제안이 성공했다고 해서 바로 투표에 부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연방정부가 검토한다. 최종 검토 의견을 내는 데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최종 의견은 ‘거부’였고 의견서 내용도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기본소득 때문에 저임금 직종이 모두 해외로 사라지고 여성의 경제활동이 줄어들 것이며, 재정적으로도 절대 불가능한 제도라고 했다. 심지어 연대성 원칙과도 상충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현행 사회보장제도 덕분에 모든 국민이 ‘고귀한 삶’을 이미 영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헌법에 110a조 같은 신규 조항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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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정부의 거부에 이어 1년 만에 연방의회에서도 논의했다. 다소 싱거운 논쟁이 되어 6시간 만에 끝나버렸다. 반대 146, 찬성 14. 의회에서는 연방정부의 거부 이유에 덧붙여 노동 의욕 감소와 이민 증가가 주요 이유로 등장했다. 정부와 의회 논의가 끝난 뒤, 최종적으로 국민투표에 상정했다. 올봄에 국민투표 안내 우편물이 집집마다 배달됐는데, 거기에는 국민제안의 헌법 개정안과 더불어 정부와 의회의 반대 의견이 명시돼 있었다.
다음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보기에 따라 기본소득은 공짜 돈이고, 그렇다면 국민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4명 중 1명 정도만 찬성했을까? 여론조사 추이를 살펴보면, 스위스 국민도 처음에는 솔깃했던 모양이다. 국민제안이 성사됐을 때, 국민의 과반수 지지가 가능하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그 뒤로는 대체로 추락세였다. 지난해 연방의회가 공식적인 반대 의견을 냈을 때 일부 여론조사에선 40% 이상이 지지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하락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올봄 들어서는 70%가량이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대부분이었다.
역시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몇 가지 중요한 것만 꼽아보면 이렇다. 우선 기본소득이 ‘덤으로 주는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회와 정부 및 학계의 논쟁에서 기본소득의 주요한 재원이 기존 사회보장제도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현재 스위스의 평균 가구 소득(약 1천만원) 중 20% 이상이 사회보장과 관련된 이전 수입이나 수당이다. 특히 중산층의 경우, 사회보장 혜택을 포기하고 기본소득을 받아도 딱히 ‘덤으로’ 생기는 돈이 없을 가능성이 많다. 게다가 국민제안을 주도하는 단체에서는 모자라는 재원을 부가가치세 인상을 통해 해결한다고 하니, 자칫 실질소득이 줄어들 위험도 있다. 기본소득이 최저소득층이나 비경제활동인구층에는 확실한 혜택이 있는 반면, 중산층에는 소득수준만 놓고 보자니 참으로 애매한 것이 기본소득인 셈이다.
노동, 이민 문제와도 부딪혀이런 문제들이 확인되고 보니 노동의 ‘엄숙한’ 가치를 옹호하는 스위스 국민에게 기본소득은 다소 불편한 존재가 된다. 기본소득이 노동 의욕을 줄인다는 주장은 다소 역설적인 형태로 설득력을 얻는다. 예컨대 기본소득을 받으면 일을 줄이겠느냐는 질문에 약 2%만 그럴 거라고 했다. 노동의 엄숙성이 인정된 셈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떨 것 같으냐는 질문에 3분의 1 이상이 일을 줄일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은 그러지 않겠지만 남들이 그럴까 걱정돼 기본소득을 염려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민 문제다. 가뜩이나 점증하는 불법 이민 문제로 극우적 정치세력이 나타나고 있는 판에,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스위스는 전세계 불법 이민의 표적이 된다는 걱정이 쏟아졌다.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5년 이상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는 논리적이고 지당한 주장을 내놓았다. 불법 이민으로 시작해 합법적 거주 지위를 얻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에서 이런 ‘범동포적’ 주장은 큰 도움이 되질 않았다.
지지할 만한 세력이 지지하지 않은 것은 결정타였다. 일부 지지자들도 기본소득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국민제안 주창자들이 내놓은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녹색당의 지지도 미지근했다. 사회당 일부는 아예 대놓고 반대했다. 기존 사회복지제도를 없애고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면, 전반적인 복지가 축소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 기본소득을 이유로 임금을 삭감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다보니 좌파 계열 정당들은 그나마 잘 작동되고 있는 확실한 사회보장제도를 버리고 효과가 불확실한 기본소득제도로 전환하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이런 모든 문제에 답했다. 성실하게 듣고 답했다. 기본소득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권의 문제다. 기존 복지제도는 기본적으로 시혜적이기 때문에 오늘날 권력 불균형 문제와 공공적 삶에 대한 주체적 참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로지 시민권으로서의 기본소득을 통해서만 정치권력 지형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가사노동과 봉사활동의 사회적 가치를 가장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이다. 더군다나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상징되는 기술 변화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기존 복지제도의 한계는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답변에 반대론자들은 수긍했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의 반론도 분명했다. “물론 그럴 수 있는데, 지금은 아니야. 10~20년 뒤에 고민해봐도 늦지 않아.”
다시 국민투표가 있을 것이란 믿음투표장의 패배는 이렇게 오래전부터 예견돼 있었다. 그럼 이것이 끝인가? 적어도 지지론자들에게는 아니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그들은 광장에 모여 ‘23%’라고 쓰인 큰 현수막을 건물 밖에 내걸면서 ‘희망의 첫걸음’을 경축했다. 그들의 판단은 허황된 것도 아니다. 찬반 여부를 떠나서 스위스 국민의 70%는 기본소득에 대한 투표가 또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 정도 믿음이라면 또 다른 국민제안을 위한 10만 명 서명 운동은 그리 어렵지 않겠다.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기본소득론자는 투표함에서 얻은 어려운 숙제 더미 속에 파묻혀 구체적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고, 시민들은 기네스북 기록을 깬 세계 최대의 포스터에 적힌 질문을 두고 내내 행복한 표정으로 고민할 것이다.
“(기본)소득이 해결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제네바(스위스)=이상헌 저자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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