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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떠는 ‘검은 대륙’

등록 2001-12-05 00:00 수정 2020-05-02 04:22

HIV 대재앙에 아프리카 초토화… 고가의 치료약에 생명연장 가물가물

에이즈라는 스무살짜리 악마는 여전히 지구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올 한해만 지구촌 곳곳에서 300만명의 목숨을 집어삼켰고, 20년 동안 2500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올 한해 HIV에 감염된 사람만 500만명이 넘는다. 2001년 12월 현재, 지구촌에서 HIV에 감염된 사람은 4천만명을 넘어섰다.

아프리카의 뒤를 잇는 아·태 연안국가

에이즈 공포는 미국에서 시작됐다. 20년이 지난 오늘, 북아메리카 대륙은 서서히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다. 80년대 중반 연 15만명까지 치솟았던 HIV 신규 감염자 숫자는 90년대 들어 연 4만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점점 더 끔찍한 악몽이 되고 있다. 사하라 이남에서 HIV 감염인은 2800만명에 이른다. 올 한해만 230만명이 에이즈로 죽었다. 신규 감염자도 340만명이 생겼다. 15∼29살 인구 중 HIV 감염자 비율은 남아공에서 20%, 보츠와나에서는 무려 36%에 이른다. 에이즈는 아프리카 대륙의 현재를 초토화하고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연안국가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다. 2001년 신규 감염인만 100만명이 넘고, 총감염인 수는 700만명을 웃돈다. 더구나 중국은 67.5%에 이르는 감염 증가율을 기록했다. 머지않아 아시아가 아프리카를 제치고 최대의 HIV 감염 대륙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에이즈가 심각한 지구촌의 남북문제로 떠오르자, 지난 6월 유엔은 에이즈 특별총회를 개최했다. 질병을 의제로 삼은 최초의 총회였다. 사흘간 진행된 이 총회는 에이즈 퇴치 청사진을 담은 ‘HIV/에이즈에 관한 서약 선언문’을 채택한 뒤 폐막됐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에이즈 퇴치기금 마련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에이즈 약값문제는 남북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한다. 생명공학과 의학의 발달로 에이즈는 관리 가능한 만성질병이 됐다. 그러나 약값이 문제다. 저개발국가의 감염인들에게 연 1만달러가 넘는 약값은 ‘생명연장의 꿈’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걸림돌이다. 에이즈 약값의 대부분은 특허에 대한 로열티로 지불된다. 그래서 에이즈운동가들은 아프리카 환자들의 죽음을 “특허에 의한 살인”이라고 부른다. 급기야 남아공, 브라질 정부가 다국적 제약회사의 특허권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97년 11월, 남아공 정부는 에이즈 치료제 수입법을 개정했다. 값싼 카피(복제)약 수입을 허용한 것이다. 이 법의 개정으로 남아공 환자들은 기존 약값의 30%도 안 되는 값으로 에이즈 치료제를 살 수 있게 됐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클락소 스미스클라인을 비롯한 40여개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즉각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특허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에이즈치료행동’(TAC) 등 남아공 에이즈운동단체의 노력과 국제여론에 밀려 2001년 4월 취하됐다.

2001년 8월에는 브라질 정부가 에이즈 치료제인 ‘넬피나비어’에 대해 강제실시를 발표했다. 강제실시란 특허권자의 승낙없이, 정부가 국내 특정회사에 특허를 부여해 약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은 국민보건의 응급상황에서 비상업적 목적일 경우, 강제실시를 할 수 있도록 명기하고 있다. 브라질이 최초로 이 조항을 적용한 것이다. 이미 브라질 정부는 90년대 중반 이후 공공 제약회사를 설립해 특허약을 일반약으로 생산해 무상으로 공급해왔다. 이런 노력으로 97년 이후 브라질의 에이즈 사망률과 감염률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복제약 수입 허용… 불안한 흑인들

에이즈는 ‘가난한 나라’들의 병이자 ‘가난한 국민’들의 병이 되었다. 한 나라 안에서 에이즈의 계급화 현상은 미국의 인종별 감염인 비율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HIV 감염인/에이즈 환자 중 38%가 흑인이다. 미국인구 중 흑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12%인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감염률이다. 다른 인종으로는 백인이 감염자의 43%, 히스패닉이 18%, 아시아계가 1%를 차지한다.

새로 감염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흑인들의 비율은 매우 높다. 2000년의 신규 감염인 중 48%가 흑인이다. 특히 젊은 흑인남성 동성애자(23∼29살)의 2001년 신규 감염비율은 14.7%를 기록했다. 이는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와 맞먹는 감염속도다. 미국의 백인 중산층에는 잊혀져가는 에이즈 공포가 검은 대륙과 검은 국민들에게는 끝나지 않는 악몽인 것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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