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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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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뼈 가난의 뼈가 앙상한 가뭄

수몰된 마을이 드러난 강원도 양구·인제 르포… 강우량이 평년의 52.25%, “군대에 땅을 내주고, 수몰로 땅이 잠기고, 가뭄으로 농사를 빼앗겼네”
등록 2015-07-01 12:21 수정 2020-05-03 07:17
소양강댐 건설로 물에 잠긴 강원도 양구군 남면 원리의 수몰지가 지난해부터 계속된 극심한 가뭄으로 40여 년 만에 다시 땅이 됐다. 쩍쩍 갈라진 강바닥에서 말라죽은 물고기가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해체되고 있다.

소양강댐 건설로 물에 잠긴 강원도 양구군 남면 원리의 수몰지가 지난해부터 계속된 극심한 가뭄으로 40여 년 만에 다시 땅이 됐다. 쩍쩍 갈라진 강바닥에서 말라죽은 물고기가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해체되고 있다.

<font color="#008ABD">극심한 가뭄이 전국을 태웠다. 강은 바닥을 드러냈고, 논밭은 작열하며 갈라졌다. 6월25일 시작된 장맛비는 편차가 컸다. 이날 0시부터 이튿날 오후 4시까지 인천 강화 22.5mm, 강원도 강릉 연곡 123.5mm, 속초 설악 122.5mm, 양구 30mm, 인제 18mm를 기록했다. 단비였지만, ‘가뭄 극심 지역’이 평년 강수량을 회복하는 데는 한참 부족했다. 남쪽으로 후퇴한 장마가 가뭄을 밀어낼 만큼 비를 몰고 올지도 낙관하기 어렵다. 사람의 역사가 물의 역사인 땅이 있다. 은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6월22~23일) 가뭄이 물과 땅의 처지를 뒤바꾼 소양강댐 수몰 지역을 찾았다. 4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물의 땅에서 물이 부침할 때마다 삶의 뿌리가 흔들려온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를 만날 수 있었다. _편집자</font>

물의 뼈.

땅을 삼켰던 난폭한 물이 앙상하게 야위었다. 가뭄이 물의 살을 발라내자 물속에 파묻힌 땅들이 마른 뼈처럼 드러났다. 수몰의 역사를 축적한 물의 기억들은 갈라진 강바닥과 건물터 위에만 존재했다.

<font color="#008ABD">여기가 설씨네, 저기가 초등학교 분교 터</font>

수몰민 주재영(63)씨가 배 대신 차를 끌고 수몰의 땅으로 나아갔다. 물이 매장했던 집과 방앗간의 위치를 그의 손가락이 가리켰다. 길이 나 있었고, 풀들이 무성했다. 야생화가 흐드러졌고, 발끝에 흙먼지가 차였다. 수몰민이 수몰의 기억을 불러내지 않았다면 수중에 속한 땅이었음을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난해까지 물이 뒤덮었던 땅은 이제 물이 기어오를 수 없는 야트막한 야산처럼 보였다.

“저기가 설씨네 집.”

풀숲 저쪽에 세상을 떠난 옛 이웃의 집이 있었다고 했다. 물이 쫓아낸 사람은 이승을 버렸는데, 수장됐던 그의 집터는 이승으로 생환했다. 강 저편으로 약초꾼을 건네주던 ‘농선’이 육지가 된 강변에 방치돼 있었다. 물속에서 말라죽었던 밤나무들이 펄을 뚫고 돋아 썩은 장승처럼 비루했다.

“여기가 하수내리초등학교 원리분교 터요.”

교실 건물이었던 자리 앞에 주재영씨가 섰다. 그가 교실에 오르던 디딤돌이 떠내려가지 않고 붙박여 있었다. 물의 시간을 견뎌온 작은 운동장도 수초에 점령당하지 않고 공터를 유지했다. 수몰 당시 학교를 다녔던 학생 10여 명은 초로의 나이로 늙어갔다.

소양강댐은 1967년 4월 착공해 1973년 10월 완공했다. 춘천시·양구군·인제군의 6개 면, 37개 리, 4600가구, 2700ha의 논밭이 물속에 잠겼다. 6월22일 소양강댐 수위는 152.26m였다. 만수위 198m보다 45m 낮고 역대 최저 수위 151.93m보다 33cm 높았다. 6월23일까지 양구의 올해 강우량은 188.6mm로 평년(361mm)의 52.25%에 그쳤다. 극심한 가뭄으로 물이 빠지면서 수몰된 마을들이 고대 유적지처럼 폐허가 돼 나타났다.

물과 땅 사이에 공방은 없었다. 물의 패색은 돌이킬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짙었다. 산과 물이 만났던 지점에 풀이 듬성하다는 것에서 물의 경계를 확인할 뿐이었다. 옛 강은 옛 땅이었다. 땅이 먼저였고, 강은 나중이었다. 댐 건설 뒤 몰려왔던 물이 가뭄으로 물러갔다. 다시 땅이 왔으나, 옛 땅은 아니었다. 물이 올 때 모든 것을 삼켰는데, 물이 가면서 많은 것을 가져갔다.

물 마른 강바닥이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졌다. 본래 논이었던 강이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해둔 어망들이 물 빠진 펄에 파묻혀 있었고, 물에 쓸려 넘어진 나무들이 고생대에 멸종한 식물처럼 기이했다. 가뭄이 소환한 ‘원리’의 옛 땅에서 물의 뼈들이 화석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저놈의 물 때문에.”

물이 넘쳐 쫓겨난 사람들이 물이 말라 다시 쫓겨나고 있었다.

강원도 양구군 원리는 봉화산 자락에 있다. 소양강물이 미치지 않던 땅이 댐 건설로 1971년 수몰됐다. 주재영씨는 원리의 어부다. 자신을 내몬 물에 의지해 물고기를 잡았고, 식당을 열어 그 물고리들을 회로 떠서 팔았다. 식당 아래까지 차오른 물길에 배를 띄워 옛 마을까지 나아가 물고기를 낚았다. 쏘가리, 민물장어, 붕어, 잉어, 빙어 등을 잡으면 하루 20만원 벌이도 가능했다. 물이 마른 지금 그의 배는 물에 뜨지 못하고 땅에 묶여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고기잡이를 중단했다. 소양강 인접 3개 시·군(춘천·양구·인제)에서 어업허가권을 가진 어부는 21명이다. 강물이 마르자 그들 열에 여덟이 산에 올라 약초를 캐거나 건설 현장에서 막일을 하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하수내리(수몰 당시 양구군 남면)의 마른 강은 거대한 ‘매차나무’ 한 그루를 펄 위로 올려보냈다. 3m가량의 나무 상단부가 찢어지고 갈라진 땅 위로 홀로 솟았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하수내리(수몰 당시 양구군 남면)의 마른 강은 거대한 ‘매차나무’ 한 그루를 펄 위로 올려보냈다. 3m가량의 나무 상단부가 찢어지고 갈라진 땅 위로 홀로 솟았다.

<font color="#008ABD">소양강 어부 80%가 약초 채취·공사장 막일</font>

그와 그의 부모는 화전민이었다. 수몰 전 원리8반 마을엔 17가구가 살았다. 대부분 나무를 베고 불을 놓아 밭을 일궜다. 평지에 쌀농사 지을 땅이 없던 사람들은 가파른 산에 기대어 콩, 팥, 조, 수수를 심었다. 수몰 뒤에도 그는 물에 잠기지 않은 산에 움막을 짓고 2년을 버텼다. 1970년대 중·후반 정부의 화전 정비사업 때 보상금 없이 이주했다.

“우리 같은 개털들은 땅이 없으니까.”

땅은 보상의 척도였다. 땅을 가졌던 수몰민들은 보상금을 받아 좀더 비옥한 땅(경기도 여주·이천·양평 등)을 찾아 떠났다. 화전은 법적인 땅이 아니었다. 10여 가구가 화전을 버리고 수몰선 위로 올라가 지금의 원리를 일궜다.

“물이 무서워. 수몰 때문에 가진 것 없이 나왔는데, 운전도 하고 빈 병 모아 고물장사 하다가 고기 잡으면서 억지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젠 가뭄이….”

물고기가 끊긴 뒤부터 식당을 찾던 손님들도 발길을 끊었다. 가뭄으로 지난해부터 조업이 불가능해지자 생활고를 겪던 한 어부는 가족을 데리고 원리를 떴다. 자연재해가 인류 보편의 재앙이 아님을 주재영씨는 안다. 물은 많아도 적어도 가난한 사람 앞에 설 때 더욱 힘이 세진다.

평시 수량의 소양강은 원리를 지나 북쪽으로 흘러 하수내리에 닿는다. 수몰 전 하수내리는 소양강이 실어온 흙의 퇴적층 위에 마을을 이뤘다. “1m를 파내려가도 돌멩이 하나 없이 고왔다”고 수몰민들은 기억했다. 소양강댐 완공 뒤 양구군에서 인제군으로 편입됐다.

마른 강은 거대한 ‘매차나무’ 한 그루를 펄 위로 올려보냈다. 3m가량의 나무 상단부가 찢어지고 갈라진 땅 위로 홀로 솟았다. 누구는 마을을 수호하던 성황당 나무라고 했고, 누구는 농사로 지친 농부들에게 그늘이 돼준 나무라 했다. 오랜 세월을 견디는 동안 몸에 박힌 옹이는 “사람이 타고 오르지 못하도록 부엉이가 방귀를 뀌며 키웠다”고 당시 아이들은 믿었다. 장수봉(63)씨는 기억했다.

“어른 4~5명이 손을 잇대어 안아야 했을 만큼 나무가 굵었어.”

강원도 산간에서 찾아보기 힘든 너른 백사장은 하수내리 주민들의 자랑이었다. 백사장과 농경지 사이에서 붉은 해당화가 해사했다. 해방 직후 38선이 하수내리를 관통해 마을을 남북으로 갈랐다. 미군과 소련군이 선을 긋고 한 마을 안에서 경계를 섰다. 가뭄은 물속에 잠겼던 하수내리의 풍경과 상처까지 되살렸다.

“없는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는 게 무섭지.”

수몰 당시 하수내리엔 90여 가구가 살았다. 누가 언제부터 그들에게 ‘떨어질 락’ 자를 붙여 불렀는지 알 수 없다. 땅의 주인들이 보상받아 나갈 때 땅 없는 ‘낙농’(落農) 7~8가구는 빈 땅에 남아 한두 해 더 농사를 지었다. 평생 땅을 가져본 적 없던 그들은 물이 찰 때까지 버티다 양구 각지로 흩어지거나 도시로 나가 등짐을 졌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관대리의 이장 심영근씨가 자라지 못한 채 말라가는 어린 옥수수를 보며 망연해하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관대리의 이장 심영근씨가 자라지 못한 채 말라가는 어린 옥수수를 보며 망연해하고 있다.

<font color="#008ABD">53m “동양 최고 다리” 아래 잡초 땅</font>

20대 초반 하수내리를 떠난 장수봉씨는 양구읍 안대리에 산다. 그의 옥수수밭이 바짝 말랐다. 그는 “알이 안 박혀 다 글렀다”고 했다.

“불은 재라도 남기지만 물은 흔적 없이 다 쓸어가버리니까. 소양강댐에 물 차고 이런 가뭄은 처음이야. 그렇게 싫었던 물이 지금은 없어서 한스러워.”

다리는 물을 건너기 위한 시설이다. 크고 작은 다리 밑은 이미 ‘물의 영역’이 아니었다. 양구대교는 양구와 인제를 잇는다. 53m 위에 떠 있는 다리를 과거 양구·인제 주민들은 “동양 최고 높이의 다리”라 믿으며 뿌듯해했다.

양구대교 아래는 잡초의 땅이었다. 물은 세력 넓힌 땅에 밀려 한쪽으로 허약하게 휘돌았다. 산에서부터 진군한 녹색이 강을 위협했다. 배를 대던 선착장들은 강에 닿던 흔적을 잃고 육지의 일부분이 돼 있었다.

38대교를 건너면 관대리(인제군 남면)로 진입한다. 수몰로 물이 차오르면서 관대리는 인제와 떨어져 ‘육지 속의 섬’이 됐다. 소수의 농가들이 깃든 외딴 땅을 정치도 경제도 돌아보지 않았다. 2009년 38대교가 완공되기 전까지 관대리로 들어가려면 양구로 돌아가거나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야 했다. 다리 건설 땐 ‘예산 낭비’ 논란이 일었다.

까마귀 한 마리가 38대교 교각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다리 밑으로 파란 초지가 형성돼 있었다. 물을 채우지 못한 강은 사료용 보리를 키우는 밭으로 쓰이고 있었다. 지난해엔 태풍도 오지 않았고 매년 관광객을 부르던 빙어축제도 취소됐다. 인제군은 2개 군 4개 마을에 제한급수를 실시하고 있었다. 관대리는 인제에서 물 사정이 가장 심각한 땅이 됐다. 유일하게 운반급수가 이뤄지는 지역이었다.

6월23일 10t 급수차가 관대리 계곡을 올라 여과시설에 물을 쏟아부었다. 여과시설을 거친 물은 옆에 있는 물탱크로 보내져 각 가정으로 공급됐다. 관대리엔 5월 중순부터 물이 끊겼다. 하루 두세 차례 급수차가 관대리를 오갔다.

“관대리는 눈물의 땅이에요. 군부대가 들어와서 알짜 땅을 차지하더니 댐이 만들어지면서는 수몰됐잖아요. 이젠 가뭄 드니까 먹을 물까지 없어요.”

물차를 운전하는 남자가 말했다. 수몰로 부대를 옮기기 전까지 육군 3군단 사령부와 전투비행단이 관대리에 주둔했다. 물탱크 옆에서 제초 작업을 하던 이광모(61)씨는 부평리 수몰민이다. 관대리와 인접한 부평리도 990가구가 수몰됐다.

“고추도 마르고, 옥수수도 마르고….”

그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마른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관대리는 청송 심씨 집성촌이다. 조선 세종의 장인 심온이 태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뒤 각지로 귀양 간 후손들이 관대리까지 이르렀다. 관대리 이장 심영근(59)씨는 “수몰 뒤 심씨도 다 흩어졌다”고 했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마을이 물에 잠겼다.

관대리는 인제군에서 식수 사정이 가장 심각한 지역이다. 가뭄으로 계곡물이 마르자 10t 급수차가 하루 두세 차례 물탱크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관대리는 인제군에서 식수 사정이 가장 심각한 지역이다. 가뭄으로 계곡물이 마르자 10t 급수차가 하루 두세 차례 물탱크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font color="#008ABD">“근근이 버텨온 농사에 가뭄이 종지부”</font>

물이 차오르면서 강 옆에 자리잡은 마을은 물을 피해 산 쪽으로 올라왔다. 보상받을 땅이 없던 가난한 10여 가구의 주민들이 고도를 높여 살 곳을 찾았다. 군인들이 면회 온 애인 손을 잡고 예쁜 강을 구경시키던 넓은 자갈밭도 사라졌다. 40여 년 뒤 극에 달한 가뭄이 물속의 땅들을 다시 불러냈다. 관대리를 세상과 연결하다 수장된 도로에도 지난해부터 다시 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마을 곳곳에서 파종도 못한 밭들이 메마른 먼지를 날렸다. 억지로 심은 듯한 들깨가 자라지 못하고 쪼그라들었다. 심영근씨의 사과나무들은 나뭇가지가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이거 봐요. 끝이 말라서 다 꼬부라지잖아. 거의 죽은 거예요.”

생장을 멈춘 어린 옥수수들이 심영근씨의 손끝에서 푸석거렸다.

“설사 살아나서 옥수수가 달려도 못 팔아요. 맛이 없으니까 상품 가치가 없어. 닭 사료로나 쓸까 팔지를 못해요.”

가난한 농민들의 삶엔 퇴로가 없었다. 군대에 땅을 내주고, 수몰로 땅이 잠기고, 가뭄으로 농사를 빼앗겼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가뭄이에요. 안 그래도 파산인데 근근이 버텨온 농사마저 날씨가 종지부를 찍는 거지.”

가뭄이 올해에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이란 관측에 그의 걱정은 깊어가고 있었다. 길가에서 물기를 잃고 노랗게 말라버린 매실들이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수물과 홍수와 가뭄은 가난한 자들의 역사다. 물의 많고 적음이 도시의 고층 빌딩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물의 부침에 따라 가난한 농민들의 삶은 쓸려나가거나 바짝 마른다. 수몰 영세농들은 물의 침략과 쇠퇴 때마다 삶의 뿌리가 흔들렸다.

“물이 많아도 탈, 없어도 탈.”

심영근씨가 한탄했다.

“수익성 높은 작물들을 갈아타며 재배하는 대농들은 한 해 농사를 실패해도 다음해 이익을 내면 회복할 수 있어요. 영세농이 한 해 실패하면 다음해에 잘돼도 절대 돌이킬 수 없어요. 농작물 갈아엎는 건 대농들에게나 가능하지 우리 같은 영세농들은 절대 못해요.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는 거예요.”

관대리 경작지의 90%는 외지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올해 가뭄이 100~120년 단위로 찾아오는 대가뭄의 시작이란 분석들이 나온다. 1884년부터 1910년까지 지속된 광폭한 가뭄(이 시기 연평균 강수량은 874mm로 전체 평균의 72%)은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파탄냈다. 당시를 기록한 영국인 앵거스 해밀턴은 란 책에 썼다.

“1901년 도심지 전체가 폐허처럼 변했다. 관할 관청은 관리 기능을 상실했고 생고에 시달린 백성들이 폭도로 돌변했다. 평화를 사랑하고 질서를 준수하던 백성들은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가족 생계를 지키기 위해 인근 가호를 약탈하거나 사회질서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마을에 굶주림이 만연했다.”(김승 ‘물안보를 확보하자’)

관대리로 진입하는 38대교 아래서 사료용 보리를 재배하는 밭이 메마른 물줄기를 밀어내고 있다.

관대리로 진입하는 38대교 아래서 사료용 보리를 재배하는 밭이 메마른 물줄기를 밀어내고 있다.

<font color="#008ABD">“비가 와야 인심도 있지”</font>

동학혁명(1894년)은 이 시기에 일어났다. 영호남 지역의 가뭄 피해가 컸던 1960년대 말엔 대규모 이농 사태가 발생했다. 이농을 막기 위해 경찰이 동원되기도 했다. 물이 가난한 사람을 공격할 때 역병이 창궐하고 민심은 절망했다. 2015년 가뭄과 메르스가 같이 왔다. 정치와 치수는 같은 글자(治)를 쓴다. ‘치’가 안 되면 ‘수’는 넘치고 ‘정’은 폭주한다.

양구 남면 청4리 봉당골 주민 박효선(73)씨의 논에 물이 흘러들었다. 양구군이 그의 사정을 전하고 군부대가 급수차를 동원해 갈라진 논에 물을 부었다. 최근 그가 개울을 파서 모아둔 물을 누군가 훔쳐갔다고 했다.

“어쩌겠어. 비가 와야 인심도 있지. 물은 그런 거야.”

양구·인제=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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