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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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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포장해도 그것은 ‘집착’

감정평가액 3배 웃도는 10조5500억원에 한전 부지 낙찰받은 현대자동차…
외국인 투자자 실망감 커 주가도 급락, “연기금 쪽에선 배임으로 봐야 한다는 말도 나와”
등록 2014-09-23 14:35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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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베팅’은 아버지와 아들이 닮았나.

1976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항만 공사 입찰장에서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국외에서 큰 공사를 해보지 못했던 현대건설이 공사를 따낸 것이다.

수주 가격은 9억3114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4500억원). 최저가 입찰에 참여했던 미국·유럽 기업 견적의 절반가량 입찰 가격을 써내 수주에 성공했다. 현대건설은 당초 12억달러 정도의 공사비용을 예상했다. 하지만 정주영 사장은 무려 4억달러나 적은 8억7천만달러를 써내라고 했다. 10억달러 이하로 써서 반드시 수주하겠다는 의지였다. 일부 직원이 저가 수주를 걱정한 덕에 결국 9억3114만달러를 써내 성공했다.

당시 61살이던 정주영 사장은 자서전을 통해 “큰 공사를 수주하게 될 때는 사전에 꼭 아버지 꿈을 꾸는데, 주바일 항만 공사 때도 아버지가 꿈에 보였다”고 했다.

매해 임대료 2400억원 아끼려고…

2014년 9월 정몽구(76) 현대차그룹 회장은 전날 꿈에서 아버지 고 정주영 회장을 만났을까. 정몽구 회장은 9월19일 서울 강남 최대의 노른자위 땅으로 불리는 한국전력 본사 삼성동 부지(사진) 매각 입찰을 따냈다.

매입 가격은 10조5500억원. 최고가 방식의 입찰에 참여한 삼성전자(4조원대 입찰)보다 무려 6조원이 많은 가격을 써내 땅을 낙찰받았다. 원래 현대차는 감정평가업체를 통해 한전 부지의 감정가를 3조원 정도로 산정했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의 최종 결단은 10조5500억원이었다. 입찰 경쟁자인 삼성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금액을 제시한 것이다. 신사옥 건설은 정몽구 회장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룹 내에선 입찰 전부터 현대차와 삼성 간의 과다 경쟁으로 땅값이 너무 많이 올라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현대차그룹은 10조원이라는 액수가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현대차는 “단순히 중·단기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30여 개 그룹사가 입주해 영구적으로 사용할 통합사옥 건립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차는 그동안 양재동 본사 사옥이 비좁아 서울 시내에 분산됐던 계열사들의 임대료(보증금·금융비융 포함)가 매해 2400억원을 웃돈다고 했다. 강남 지역 부동산 가격 상승과 향후 부담할 임대료 등을 감안할 때 할 수 있는 투자라는 설명이다. 정몽구 회장은 입찰에 참여한 임직원을 불러 “금액이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사는 것이어서 (금액을) 결정하는 데 마음이 가벼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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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무척 싸늘하다. 입찰전이 끝나자마자 현대차는 너무 높은 가격에 한전 땅을 인수했다는 ‘후폭풍’에 휩싸였다. 낙찰 결과가 발표된 9월19일 현대차의 주가는 전날(21만4500원)보다 9.17% 떨어진 19만8천원에 거래를 마쳤다. 인수 컨소시엄에 함께 참여한 기아자동차와 현대모비스의 주가도 각각 6.4%, 8.5% 떨어졌다. 이튿날인 9월20일에도 현대차 주가는 3천원 더 떨어진 19만5천원으로 마감했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외국인 투자자의 실망이 컸다. 10조원은 모두 기회비용이다. 다른 쪽에 투자할 수 있는데 땅을 산 것에 대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10조5500억원은 현대차 연구·개발비(1조8490억원, 2013년 기준)의 약 6년치에 해당한다.

임시 주총에서 반대 의견 나올 수도

시장 투자자만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게 아니다. 자동차산업 전문가인 이항구 산업연구원 박사(홍보팀장)는 “10조원이면 도요타나 폴크스바겐의 1년 연구·개발 자금이다. 친환경차와 스마트카 등 완성차 업체의 연구 비용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투자 규모가 뒤처지면 4~5년 뒤 경쟁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박사는 “현대차는 통상임금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앞으로 매해 1조원 정도 비용이 더 들 수 있다. 또 해외 공장 설립 계획 등 돈 쓸 데가 많은데 10조원 이상을 사옥 건설에 쓰는 것은 향후 영업이익률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전 부지 가격 산정에 참여했던 한 감정평가사는 “10조5500억원은 터무니없다. 누가 중간에 잘못 보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10조원이라는 가격이 나왔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계열사 임대료 2400억원을 아낄 수 있다는 주장의 적정성도 따져봐야 한다. 특수관계인 거래라서 금액에 따라 부당지원 소지가 있다. 감정평가업계에선 임대료를 아끼는 것까지 감안해도 최대치가 5조원대라고 봤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이번 투자 결정의 투명성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증권사 연구원은 “연기금 쪽에서 이번 결정은 배임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등 격앙돼 있다”며 시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무리한 투자로 인해 회사에 되레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뜻이다. 실망한 주주들 때문에 이사회나 임시 주총에서 한전 부지 매입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현대차그룹의 결정은 어떻게 포장해도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없고, 정몽구 회장의 반드시 사겠다는 집착에 의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다. 재벌경영, 황제경영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냈다”고 논평했다.

‘마천루의 저주’도 있다

‘마천루의 저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마천루의 저주란 부동산 경기가 상대적으로 좋을 때의 낙관적 전망 아래 추진된 초고층 건물 프로젝트가 경기침체기에 완공돼 어려움을 겪는 현상을 말한다.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장은 “부지 비용과 향후 각종 기부채납 및 건물 시공비까지 합치면 15조원이 넘게 들어갈 것이다. 막대한 자금을 사옥 프로젝트에 투입하면 전기자동차 등 다른 투자는 상대적으로 미뤄지거나 줄어들기 마련이다”고 했다.

30여 년 전 현대차그룹의 모체인 현대건설은 주바일 항만 공사 수주를 통해 경험을 쌓고 중동에서 수주를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고비마다 ‘통 큰 베팅’을 통해 성공 스토리를 이어간 현대차그룹의 역사에서 이번 한전 인수는 또 하나의 페이지를 장식할까, 아니면 뼈저린 교훈으로 남게 될까.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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