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여왕’이 위기를 맞았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후폭풍으로 여권 성향층으로 분류됐던 유권자 상당수가 부동층으로 돌아서면서 6·4 지방선거에 나선 여당 후보들의 지지율은 맥없이 떨어지던 터였다. 그런데 타개책으로 내세운 안대희 총리 후보자마저 전관예우 논란으로 낙마해버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껏 자신에게 따라붙었던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을 때가 된 것일까?
코앞에 닥친 지방선거의 승패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안대희 후보자의 낙마가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를 지방선거에서의 ‘표’라는 문제로 치환해보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보수층 결집’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윤희웅 민정치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은 “큰 틀에서는 정부의 무능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여당에 불리한 것이 맞다. 그러나 선거 국면으로 보면 이미 야권 성향 유권자들은 결집돼 있기 때문에 안대희 후보자의 낙마가 야당 후보들의 지지율을 추가적으로 높이는 데는 제한적일 수 있다. 반면 아직 결집이 안 된 여권에 위기감이 자극되면서 여당 후보의 지지율 개선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도 “지금으로 봐서는 여권에 상당히 불리하지만 여권 결집이 굉장히 세질 수 있다”고 했다.
안대희 낙마, 여권 결집엔 도움안 후보자의 사퇴가 지방선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부동층 가운데는 여권에서 빠진 사람이 더 많은데 그들이 안 후보자의 사퇴로 모두 결집할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보수층의 결집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야권 지지자들에게도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여야 유권자들의 경쟁이 비슷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안 후보자의 사퇴가 무조건 여권에 더욱 불리한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청와대는 공식적으로는 안 후보자의 사퇴를 기자회견 직전에야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안 후보자의 전관예우 논란이 더 크게 불거지기 전에 청와대 쪽에서 자진 사퇴를 요청했을 것이라는 뒷말도 함께 나온다. 한 여론조사기관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여론조사기관 전문가들에게 안 후보자가 사퇴할 경우 여론 추이를 묻는 전화를 돌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청와대 역시 사퇴 카드의 득실을 가늠해봤을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럼 보수층의 결집으로 새누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면한다고 해서 이것을 ‘선거의 여왕’의 부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다’ 쪽에 가깝다. 과거 ‘잠재적인 대선 후보’ 시절과 이미 대통령이 된 뒤는 여러모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박 대통령이 얻었던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에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담겨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이 침몰하기 직전이던 2004년에 당대표로 취임한 박 대통령은 ‘천막당사’로 당을 살려냈다. 당시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박 대통령이 내세운 “‘차떼기당’의 오명을 벗고 새 출발 하겠다”는 의지를 높이 샀다. 2012년 총선 직전 한나라당이 ‘디도스 사태’로 위기를 맞았을 때도 박 대통령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하고 개혁적 인물인 김종인 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이준석 클라세스튜디오 대표 등을 비상대책위원으로 영입하는 ‘쇄신책’을 내놓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2013년 대선에서는 보수당으로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강조하며 ‘노선 수정’을 예고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으로 인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지금은 사정이 확연히 다르다. 현재 보수 유권자층에게 더 크게 작용하는 건 “앞으로 잘하겠지”라는 ‘기대심리’가 아니라 단지 “위기에 닥친 대통령을 구하라”는 ‘방어심리’다. 물론 박 대통령 나름대로 쇄신책을 내세우며 국면 전환을 시도하긴 했다.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강직해 보이는 인물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가 꺼내든 쇄신책이 선거를 위해 다급하게 내놓은 ‘불량 상품’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안 후보자의 낙마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이준한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지방선거 후보 등록이 끝난 직후에 이뤄졌고, 안대희 후보자를 지명한 것은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한 날이었다. 선거 일정을 염두에 둔 행보라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기대심리’ 아닌 ‘방어심리’이뿐이 아니다. 대통령의 쇄신책을 ‘미래 비전’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국정운영의 실패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박혀 있다. 정당 대표 시절 사람들이 그에게 가졌던 ‘미래의 기대치’는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현실’이 됐고, 이 현실은 집권 1년이 지나면서 ‘국정운영의 실패’라는 ‘과거’로 변해버렸다. 이미 박 대통령에 대한 ‘탈신비화’를 경험한 유권자들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더 이상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윤희웅 센터장은 “이전의 박 대통령은 굉장한 신비감을 갖고 있었고 선거 캠페인을 주도하면서 강한 위력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로 인해 그런 신비감이 사라졌다. 세월호 사태의 책임 당사자가 된 상황에서 필드에 나가 있던 시절 나타났던 ‘선거의 여왕’으로서의 위력은 제약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환상이 깨지도록 자초한 측면도 강하다. 그동안 박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으로서 내세웠던 전략들은 정치공학적으로는 훌륭했을지 모르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는 ‘착시효과’에 불과했다. 그는 위기 때마다 리더로 나서 과감한 쇄신의 이미지를 취했으나 선거가 끝난 뒤에는 이것을 가차 없이 내던졌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조직에 위기가 왔을 때 가장 일상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리더십의 교체다. 교체된 리더십은 조직 안의 지배적인 분파를 교체하고 정책 방향을 바꾸고 조직문화를 바꿈으로써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박 대통령은 2004년 천막당사 시절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으로 불리는 소장파에 의해 새로운 리더십으로 떠올랐으나 총선에서 승리한 뒤로는 이들과 같은 궤도의 길을 걷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곁에는 여전히 그를 칭송하는 친박 핵심이 머물렀다. “비리를 근절하겠다”는 다짐도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서청원 의원,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비리 인사들을 줄줄이 기용하면서 취지가 무색해졌다. 19대 총선 직전 쇄신의 상징으로 영입된 김종인·이상돈 비상대책위원은 박근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다는 이유로 밖으로 내쳐졌고, 19대 국회의원은 말 잘 듣는 ‘박근혜 키즈’들로 채워졌다.
원하는 것은 ‘집권’뿐이던 시절이처럼 그동안의 박근혜식 위기 돌파 해법은 당을 뼛속까지 바꾸는 체질 개선이 아니었다. 이런 방식의 선거 전략은 ‘이기면 다 된다’는 정서를 앞세워 선거에서 승리만 하면 모든 잘못이 덮어지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충격요법을 반복하다보면 그 효과가 떨어진다. 경험적으로도 ‘저 사람이 어떤 약속을 한 것에 비하면 실제 영양분은 많지 않다. 대개 용두사미로 끝나더라’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충격 효과가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통해 잘 포장해냈기 때문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2012년 한국판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는 기존 보수에게도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이중성은 애매모호한 혼란을 초래한다. ‘수구’라고 불리는 세력과 결별하고, 양가적 가치로 보수를 끌어내는 것이 이를테면 ‘박근혜식 혁신’이다. 물론 이 혁신을 박근혜가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집권’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충고도 들을 수 있다. 이것이 박근혜의 특징이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의 이면에는 메시아적 인물로만 선거를 치르는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한계도 내재돼 있다. 서복경 선임연구위원은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주도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인물과 그 인물이 표방하는 정책, 이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같이 일할 사람들이 패키지로 존재하고 이것이 일관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은 정책보다는 인물 자체에 더 집중돼 있다. 윤희웅 센터장은 “특정 개인의 대중적인 위력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선거를 치르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는 선거 과정에서 정책과 공약이 서로의 비판과 방어를 통해 원활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정교해지고 다듬어져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말했다.
선거 때마다 ‘박근혜 마케팅’을 내세우는 새누리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2년 대선에서 나타난 ‘안철수 현상’도 같은 흐름에 있다. 서복경 선임연구위원은 “안철수 현상이 일어날 때도 안철수는 자신이 어떤 정책을 지향하는지, 정당의 리더가 되면 누구와 함께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시그널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존 정치가 아닌 새로운 정치’라는 타이틀 외에 안철수라는 인물에 거는 기대치가 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정치인으로서 권력을 갖게 된 이후에도 A부터 Z까지 다양한 성향을 가진 지지자들의 기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고 설명했다.
‘안철수 현상’도 같은 흐름이제 유권자들은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선거의 여왕’으로서의 전략이 아니라 국민 모두를 아우르는 방식의 체질 개선이다. 이철희 소장은 “박 대통령은 과거에 했던 방식을 탈피해서 ‘당파를 초월하겠다’는 거당적·초당적 스탠스로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제 대통령의 눈물은 일부 지지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을 위해서 흘려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새누리당의 리더’가 아니라 ‘국민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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