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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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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수사, 질기다 질겨!

등록 2001-10-17 00:00 수정 2020-05-02 04:22

활동도 거의 멈춘 진보의련 관계자 연행…공안기관의 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인가

추석 연휴 다음날인 10월4일 오전 9시.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있는 한 사회단체 사무실의 우편함에 이상한 편지가 한통 꽂혀 있었다. 발신자도 적혀 있지 않은 두장짜리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민중의료연합 귀하. 저는 귀하가 민중을 사랑하는 활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무언의 동조자이며 지지자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보내게 됨은 안타까운 일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어 많은 망설임 끝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최근(9월25∼28일) 경찰 보안수사대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최근의 이완된 집권당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 민주세력을 구태의연한 좌익 이데올로기로 몰아세워 국민을 우롱하기로 합의한 바 그 대상이 바로 ‘평등사회를 위한 민중의료연합’입니다….”

법원의 영장 기각에 분통 터뜨려

편지는 이어 수사기관이 이미 이 단체가 만든 문건을 이적표현물로 감정해놓았으며, 잠복·미행·전화감청 등을 통해 구속 대상자를 확정해놓은 상황이라고 알리고 있다. 편지는 또 구속 대상자 체포일자를 10월8∼10일이라고 못박았다. 편지는 두 번째 장에서 체포영장 발부 대상자의 이름과 단체 내 직책까지 적어놓았다.

편지를 확인한 이 단체 상근자 이태영씨는 “처음엔 장난편지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너무 황당한 내용인데다 체포 대상자로 적혀 있던 이들은 ‘평등사회를 위한 민중의료연합’(이하 ‘민의련’) 단체 회원들이 아니라 또다른 보건의료운동단체인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이하 ‘진보의련’) 소속 의사와 약사 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5일 똑같은 내용을 담은 편지 2통(연희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음)이 특급등기로 민의련 사무실로 배달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민의련 관계자들은 수소문 끝에 몇년 전에도 수사기관 내부 관계자의 제보로 보이는 편지가 배달된 적이 몇번 있었고 실제 편지내용대로 구속사태가 벌어진 사실을 전해들었던 것이다. 민의련은 회의 끝에 수사기관 종사자의 양심적인 내부고발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편지내용을 7일 밤늦게 인터넷에 공개했다.

편지내용이 공개된 지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8일 오전 놀랍게도 편지의 내용은 현실로 나타났다. 의사·약사·간호사·한의대생 등 8명이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으로 악명 높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경찰청 보안국 보안4과)로 연행된 것이다. 편지가 지목한 체포 대상자 대부분이 실제 연행됐다. 시점도 8일로 정확했다. 단체이름을 진보의련 대신 민의련으로 지적했다는 점을 빼고는 편지의 내용은 거의 정확했던 셈이다.

같은 날 경찰청 2층 출입기자실에 경찰서 보안국 보안4과쪽에서 엠바고(보도유예)를 요청하는 보도자료 한장이 날아들었다. “1995년 2월 권아무개씨 등 의사·대학교수·약사 출신 지식인들이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사회주의 정당건설’ 등의 강령을 채택한 진보의련을 결성해 사회주의 혁명투쟁과 관련한 사상학습과 이적표현물을 만들어 뿌려온 혐의로 조직원 8명을 검거해 수사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8명 모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은 서울지검 공안2부(부장 박철준)의 수사지휘를 받는 과정에서 4명에 대한 영장청구 계획은 철회해야 했다. 검찰쪽에서 이들 4명은 무리하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10일 김아무개(31)씨 등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번에는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11일 서울지법 한주한 영장전담판사가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며 영장 청구를 모두 기각한 것이다. 같은 날 4명이 모두 풀려나자, 경찰청 보안국 보안4과 수사관계자가 또다시 경찰청 출입기자실을 찾았다. 그는 목청을 한껏 높였다. “경찰의 국가보안법 수사 역사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도대체 법원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다.” 경찰 관계자는 화살을 판사에게 돌리고 있었다.

이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경찰과 검찰은 보완수사를 통해 영장이 기각된 이들에 대해 영장을 재청구할 방침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영장이 재청구되면 영장발부 여부가 또다시 관심거리가 되겠지만, 이번사건은 공안수사기관의 고질로 지적되어온 ‘건수올리기식의 무리한 수사’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소시효 만료되기 전 ‘실적쌓기’

먼저 이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소시효’(검사가 일정기간 동안 공소를 제기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에 국가의 소송권을 소멸시키는 제도) 시점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를 구성했다는 것으로, 이적단체구성죄의 공소시효는 7년이다. 이들이 단체를 설립한 시점은 95년 2월로 공소시효가 완성되는 때는 2002년 2월이다. 5개월 정도만 지나면 이들을 이적단체구성죄로 기소하지 못하게 돼 있었던 셈이다.

공안수사기관들은 최근 몇년 동안 진보의련처럼 공소시효가 임박했다는 이유로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 명목상의 단체나 조직을 국보법의 이적단체로 무리하게 규정하는 수사방식을 채택해왔다. 98년 경찰청 보안국이 수사했던 진보민중청년연합(진보민청) 산하 여러 단체들에 대한 이적단체 수사도 이같은 사례에 해당한다. 당시 수사대상이 됐던 청년단체 회원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거나 생업을 위해 활동을 중단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의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는 이유로 실적쌓기 위주의 수사를 강행한 것이었다.

진보의련도 이같은 경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진보의련은 최근 2년 이상 활동이 뜸해 사실상 활동을 접은 상태였다. 몇달 전에는 사무실을 폐쇄하고 전화번호도 없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살펴봐도 별다른 활동내역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사건 변호인인 김도형 변호사는 “경찰의 최근 국보법 수사대상을 보면 힘없는 학생이나 소규모 단위의 노조 등에 맞춰져 있다”면서 “활동이 극히 저조한 단체나 조직을 대상으로 수사하는 것은 건수 올리기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이같은 공안기관들의 무리한 수사가 국가보안법 개정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시국 관련사건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위상을 찾지 못해 허우덕대던 공안수사 라인으로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국보법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구조조정은 공안기관부터

최근 몇년 동안 국보법 위반사건의 실형 선고 비율은 5∼10% 정도에 머물고 있다. 국보법에 따른 법적 처벌은 다른 일반 형법에 규정된 범죄보다 훨씬 높다. 이런 국보법의 위상으로 비춰볼 때 법원의 실형선고비율이 낮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결과임에 틀림없다.
수사기관에서는 이같은 결과를 두고 법원 판사들이 국보법을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색깔론’ 공세를 펴지만, 판사들은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사기관들의 경직된 행태를 꼬집는다.
인권단체들에서는 이 때문에 국보법 개정·폐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국보법을 다루고 적용하는 공안수사기관들을 재정비하는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법’을 뜯어고치더라도 ‘사람’이나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부작용은 여전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현재 국보법을 다루는 수사기관은 경찰청 보안국과 국정원 대공수사국, 검찰 공안부 등이다. 국정원은 간첩사건과 함께 국보법의 반국가단체구성죄 등을 도맡아 하고 있다. 경찰청 보안국은 한총련사건을 비롯해 기타 이적단체사건을 도맡는 등 전체사건의 7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경찰청 보안국 산하 보안과들은 경찰청사가 아닌 서울 남영동·홍제동·옥인동 등에 분실 형태로 나가 있다. 군사독재 시절부터 학생과 재야인사들에 대한 고문 등을 도맡아온 것으로 악명이 나 있다.
그러나 새 정부 들어서도 이들 조직에 대한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남북관계의 급진전과 국보법 개폐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냉전구조에 기반한 이들 공안수사기관들은 초조함에 휩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실과 동떨어진, 무리한 법 적용이 잇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검찰 공안부는 한때 신공안정책을 주창하면서 국보법사건도 일반 형사사건처럼 다루겠다고 공언했지만,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구공안 방식으로 회귀했다. 경찰이나 국정원에서 수사해 송치한 내용 그대로 기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사지휘기관으로서, 무리한 수사를 제어하는 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공안라인쪽에 치우쳐져 있는 경찰 특진제도의 문제점과 국보법에 규정된 수사기관 종사자의 보상제도 또한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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