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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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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해야 사랑인가

과잉성애 사회를 향해 <보스턴 결혼>이 던진 문제제기
로맨틱한 우정? 가능하고 심지어 권장할 만하다
등록 2014-02-27 14:30 수정 2020-05-03 04:27

‘보스턴 결혼’은 보스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애가 없는 혹은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동성 간 결혼을 보스턴 결혼이라고 부른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1885)에서 유래한 말이다. 2012년 번역된 (이매진 펴냄)은 “미국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존재한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전한다. 산업화 초기,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들이 ‘신실한 독신녀’로 서로 헌신하면서 살았다. 이들의 ‘로맨틱한 우정’에는 성애적 관계를 뛰어넘는 헌신과 열정이 있었다.

성애적 관계를 뛰어넘는 헌신과 열정

19세기 보스턴 결혼은 안전한 선택이었다. 여성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이들은 존경받는 독신녀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성과학의 등장과 함께 이런 관계는 위기에 처한다. 성애 관계가 있을 것이란 의심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까지 고무되거나 무심했던 관계가 이제는 ‘위험한 관계’가 되었다. 은 “20세기 초 10년 사이에 여자끼리 나누는 사랑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성과학자들의 분류가 대중의 의식에 침투했다”며 “그래서 ‘레즈비언’들은 ‘다른 여자들과 섹스하는 데 관심 있는 여자들’로 축소됐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로맨틱한 우정’ ‘보스턴 결혼’ 같은 용어가 ‘변태’ ‘도착’ ‘동성애’ ‘레즈비어니즘’이라는 용어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갔다”는 것이다.

남성은 물론 여성도 욕망의 주체가 되는, 되어야 하는 세기가 흘렀다. 과잉 성애화된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로 공인되는 사회가 도래했다. 애인이 없으면 온전하지 못한 인간, 성애가 없으면 온전하지 못한 관계는 서구만의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오직 성애가 동반된 배타적 이성애 부부 관계가 정상적 관계가 되는 시대는 지구화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동성결혼이 성애의 주체를 남녀 커플로 한정하는 제도에 대한 도전이라면, 보스턴 결혼은 무성적 관계를 친밀성의 오래된 형태로 복원해 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의 저자들은 “이 용어는 여자들에게 저 정체 모를 성적 열정을 쫓으라 하는 20세기의 압력을 넘어서 여자들에게 자기 관계를 달리 볼 길을 보여줄 수 있다”며 “성적인 면이 사라진(또는 성적이던 적이 전혀 없는) 현대의 헌신적 관계를 ‘신 보스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은가”라고 제안한다.

보스턴 결혼은 여성 동성애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지금 여기,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더하고, 상상력을 넓혀주는 이름이 된다. 결혼제도로 묶이지 않는 동거 관계가 늘어나고 있고, 이성애 부부의 상당수도 성애 없는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사람들이 그 관계에 가치를 두는 까닭은 이것은 돌봄, 동반자 관계, 실질적인 재정과 가사 분담, 애정, 상냥함 등 성교를 빼고는 전부 제공한다는 점에 있었다” “섹스보다 포옹, 스킨십, 정서적 지지가 관계의 본질적 부분”. 의 이런 문장들은 다수의 이성애 결혼에 적용돼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보스턴 결혼은 어디에나 있다

를 번역한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임옥희 대표는 “급속하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 사회에서 섹스 없이 동거하는 삶, 서로 보살펴주는 친밀한 관계를 비정상정인 것으로 몰아붙여서 치유하고 병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괜찮은 삶의 방식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스턴 결혼’은 성애를 넘어 다시 쓰는 관계의 역사와 현실을 뜻한다. 보스턴 결혼은 어디에나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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