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총도 바늘도 한 점 없고 오직 책뿐이다. 랑군공대로 가게 길을 열어달라.”
버마 현대사는 1988년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한 랑군 대학생을 기억하고 있다. ‘8888 민주항쟁’의 도화선을 깔았던 3월16일 랑군공대 시위 지원을 나섰던 버마학생회연합(ABFSU) 의장 뽀우뚠의 외침은 폭동 진압 경찰 앞에 혔고, 수많은 희생자가 났다. 그 날 뽀우뚠은 민꼬나잉(왕들의 정복자)이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뽀우뚠에서 민꼬나잉으로</font></font>민꼬나잉은 체포를 피해 다니면서 전국 대학을 묶어 그해 6월 들어 본격적으로 시위에 불을 댕겼고, 결국 7월23일 독재자 네윈이 물러났다. 그러나 8월8일부터 다시 군인들의 유혈 진압으로 3천명 웃도는 시민이 살해당하면서, 민주화 열망은 피로 물든 채 꺾이고 말았다. 1989년 체포된 민꼬나잉은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4년 석방되자마자 ‘88세대 학생’(현 88세대)이란 조직을 만들어 칠흑같이 어둡던 버마에 희망의 불빛을 되살려냈다.
2007년 8월 그이는 정부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며 ‘8888 민주항쟁’ 뒤 처음으로 거리시위를 벌여, 기어이 그해 9월 ‘승복(샤프란) 혁명’을 끌어냈다. 그러고는 다시 체포당해 무려 징역 6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12년 1월 석방됐다. 그이는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몇 명만 있어도 투쟁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3"><font color="#666666">2007년 8월 그이는 정부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며 ‘8888 민주항쟁’ 뒤 처음으로 거리시위를 벌여, 기어이 그해 9월 ‘승복(샤프란) 혁명’을 끌어냈다. 그러고는 다시 체포당해 무려 징역 6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12년 1월 석방됐다. 그이는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몇 명만 있어도 투쟁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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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그때부터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국경의 전선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민꼬나잉을 불러왔다. 군인 아니면 아웅산수찌뿐인 아주 척박한 버마 정치판에서, 시민사회는 그 대안으로 민꼬나잉을 애타게 기다려왔다. 지난 8월11일 일요일 아침, 일 없는 88세대 사무실에서 느긋하게 민꼬나잉과 마주 앉았다.
-‘8888 민주항쟁’ 25주년 기념식에서 한 연설 멋지더라. 특히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소개하는 대목은 압권이었다.
=우리 모두가 학생운동 한 뿌리란 걸 보여주고 싶었지. 실제로 8888 항쟁 뒤에 세 그룹으로 나눠 어떤 이는 지하운동으로, 어떤 이는 정치판으로, 또 어떤 이는 무장항쟁으로 들어갔단 말이지. 일부 시선들이 그걸 학생운동 분열로 보는데 사실은 전략적인 분산이었던 셈이지. 정부가 유혈 진압으로 시민을 살해하는 마당에 우리가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고.
-앞으로 셋이 같이 갈 건가?
=그렇지. 우리 88세대와 버마학생민주전선 그리고 8888 공간에서 이미 학생 정당을 만들었던 신사회민주당(DPNS)은 어차피 한 뿌리고 앞으로도 같이 가는 게 원칙이지. 셋이 머리를 맞대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논의해왔고.
<font color="#C21A1A"><font size="5"> “나는 정치 절대 안 할 거야”</font></font>
-그 가능성 안엔 통합 정당 같은 것도 들어 있나?
=당연히 그렇지 않겠나. 세 그룹 안에는 정치하겠다는 이들도 있고, 뭣보다 우리 사회가 학생운동 세력들에게 강하게 요구해온 대안 정치화도 무시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또 학생운동은 희생당한 동지들이나 시민들에게 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도 있고 하니.
-자네는?
=나는 정치 절대 안 할 거야. 내가 정치인 되는 꼴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볼 거야.
-(동티모르 독립운동가) 샤나나 구스망도 대통령 입후보 하루 전까지 정치 안 한다고 했다. 다들 하는 말 아니겠나?
=(정색하며) 벼랑으로 밀지 마라. 나는 국가를 설계할 만한 능력이 없다. 경제도 국제도 모른다.
-모르는 건 두뇌들 쓰면 되고. 원하든 않든, 시민들이 요구하는데 어이하리오?
=(어색한 얼굴로) 내키지 않는 자리 가기가 죽기보다 싫다. 표정 관리 못하니까 외교가에서 밥 먹자는 소리만 나와도 끔찍하고, 회의 같은 것도 딱 질색인데, 정치는 무슨 정치.
-그럼, 뭐할래?
=(갑자기 화색이 돌면서) 예술. 시 쓰고, 노래 만들고, 그림 그리고…, 그게 내 길이야. 권력보다는 영향력을 생각해왔어. 영원한 비판자, 영원한 조력자 같은 게 얼마나 좋아.
지난 5월인가 그이가 커피집에 앉아서 얼핏 흘리듯이 했던 말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서 킹은 권력이 없었지만 많은 일을 했다.” 민꼬나잉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닌가 싶다. 만날 때마다 요리조리 떠보았지만 그이는 한결같았다. 실제로, 꾸밈없고 수줍음 타는 그저 동네 친구 같은 그이와 놀다보면 정치란 걸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이제는 그이 말을 그대로 믿어주기로 했다. ‘민꼬나잉의 정치판 진입 가능성은 없다.’ 정치 이야기를 접고 대신 그이의 전문 영역인 감방과 관심거리인 예술을 화두로 삼아 놀았다.
<font size="5"><font color="#C21A1A"> “다시 감방 간다고 상상하면 죽고 싶어”</font></font>-공포가 뭔가?
=뭐 그런 난데없는 질문을? 다 무섭지, 뭐. 가난도 무섭고, 독재 아래 노예처럼 사는 것도 무섭고. 감방도 무섭고….
-감방이야 이골이 났을 텐데?
=다시 들어간다고 상상하면 차라리 죽고 싶어. (그이는 처음 잡혀가서 2주 동안 물속에 갇힌 채 고문당해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를 전다.)
그렇게 무섭다는 감방에 청춘을 바친 민꼬나잉은 민주화운동의 동력이 시민들 품에서 나와야 버마의 미래가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가르쳤고, 비폭력 평화가 최후·최고의 투쟁 방식임을 몸소 보여준 진정한 시민혁명가로 민주투쟁사에 빛나는 이름을 올렸다. 민꼬나잉을 우상에 기댄 ‘아웅산수찌 열광 현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보는 까닭이다.
랑군(버마)=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beyondheadline1@gmail.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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