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밥벌이도 못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웃는다. 그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뭐했냐고 다그쳐도 웃는다.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섬에서 나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1985년 홀로 제주로 내려와 루게릭병으로 숨질 때까지 20년간 제주 풍광을 사진으로 담아낸 고 김영갑 작가의 말이다. 변방의 불모지였던, 그러나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제주를 그는 한없이 사랑했다. 한양에서 가장 먼데다 바다로 차단된 제주는 오랜 세월 유배의 땅이었고, 외세에 맞선 저항의 땅이었다. 2012년, 제주는 도시 생활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정착을 꿈꾸는 곳이다. 저가항공사가 늘어 제주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는 행위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특별한 마음가짐을 선사한다. 육지와 다른 특유의 공동체 문화·언어를 지녔기에 제주와 서울 간 ‘심리적 거리’는 여전히 멀다. 지난 6월 경기도 용인에서 제주로 이사온 이승근(30)씨도 ‘나를 찾지 말아달라’는 마음으로 바다를 건넜다. 제주엔 친구도 친척도 없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는 혼자였다.
제주시 일도이동에 위치한 제주 중앙병원 뒤편으로 걸어가면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위에 전깃줄이 얼기설기 보이고 돌담과 콘크리트 벽들이 혼재된 추억의 골목을 만날 수 있다. 지난 7월17일 저녁 7시, 이 골목이 시작되는 곳에서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이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 7월4일부터 인근 업체에서 사무직 근무를 시작했다. 제주에 내려오려고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단다. 연봉 수준은 서울에서 벌던 것의 절반으로 줄었다.
집은 무조건 직장과 가까운 곳에 잡으리라 다짐했다. 매일같이 새벽잠을 설치며 경기도 용인에서 서울 강남으로 출퇴근하던 ‘통근’의 악몽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지역에서 발행되는 을 뒤적여 시멘트로 지은 2층짜리 집 1층을 빌릴 수 있었다. 바닷가 쪽이나 중산간 마을에서는 집 구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따로 부동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인 마음을 사로잡아야 집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선 대개 1년 단위인 연세로 임대가 이뤄진다(제주의 오랜 ‘신구간’ 풍습의 영향이다. 지상의 신들이 옥황상제에게 보고하러 올라가 다시 돌아오기 전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이사·집수리 등 큰 일을 하면 탈이 없다는 것이다. 신구간은 대한 뒤 5일에서 입춘 전 3일 사이 일주일이다). 이씨는 어렵사리 반세 계약을 맺었다. 여섯 달 동안 사는 데 보증금까지 합쳐 130만원이 들었다. 따로 대문이 없는 집이라 골목을 걷다 창문을 통해서도 이씨의 방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네 어르신들은 육지 총각이 궁금한지 간혹 그렇게 쳐다본단다. 원룸만 한 방 안에는 별다른 가구나 TV가 없다. 세탁기도 들여놓지 않았다. 서울에서 가지고 온 가방이 옷장 구실을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온몸을 덮치는 습기를 제거하려고 틀어놓은 선풍기가 유일한 전기제품이다. “대학 시절 살던 원룸이 더 좋았어요. 지금은 완전 빈티지죠. 뭔가 더 소유해도 좋지가 않더라고요.” 이씨가 사람 좋게 웃는다.
서울 수서에서 나고 자란 그는 1남1녀 중 막내다. 군 복무, 대학 재학 시절 외에 가족과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다. 가족이 용인으로 이사한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아파트에서 살았기에 별다른 생활의 변화는 없었다. 사립대 지방 캠퍼스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중소업체인 정보기술(IT) 컨설팅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스펙 쌓기엔 별다른 관심이 없던 그는 얼리어답터였다. IT 제품에 워낙 관심이 많아 관련 일을 하면 즐거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1년3개월을 버티다 이직을 결정했다. 서울의 한 대형 병원 구매팀에서 2년간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 빼곤 근무 환경이 나쁘지 않았다. 계약 기간이 끝난 뒤 그는 지난 1년간 자발적으로 일을 쉬었다.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좇는 가치를 나도 덩달아 좇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일을 쉬는 기간이 길어지자 어머니와 갈등도 있었다. 대도시를 떠나 독립을 하고 싶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고 담배도 안 피우는데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이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서른에 삶의 터전을 바꾸는 데엔 용기가 필요했다. “대학 졸업하면 직장 잡고, 결혼하고. 대개 정해진 코스가 있잖아요. 여기서 벗어난 건 맞아요. 그런데 지금 이 나이에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어떤 분들은 새 출발을 위해 이민도 가잖아요.” 다행히 어머니는 그의 결정을 만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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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살아나가고 있는 것
제주에 오기 전 그는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바다를 좋아해 부산으로 향했는데, 너무 번화했다. 바다를 건너기로 했다.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된 그의 피부는 까맣게 그을려 있다. 퇴근 뒤 매일 2~3시간 동안 바닷가를 걸었던 흔적이다. 집에서 20분 가량만 걸어가면 언제든 탑동 바닷가를 만날 수 있다. 서울에선 간혹 자전거를 탔지만 잘 걸어다니진 않았다. 자연만을 벗 삼아 살기는 쉽지 않다. 그 역시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웃이나 직장 동료에게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한창 연애를 꿈꿀 나이다. 이씨의 마지막 연애는 3년 전이었다. 좋은 짝을 만나고 싶지만 결혼에 대한 강박은 없다.
이씨는 제주에서 생각지 못했던 사람을 만났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던 류석환(31)씨를 15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둘은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 류씨 역시 미혼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두 달 전 홀로 일도이동에 정착했다. 밤 9시가 넘어 이씨가 친구에게 혹시 볼 수 있느냐고 전화했다. 류씨는 흔쾌히 나오겠노라 했다.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싶다. 제주의 겨울이 혹독하고 벌이가 쉽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류씨는 ‘여기서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다만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주민 선배들의 철학에 공감한다. 다만 최근 제주 땅값·집값이 부쩍 뛰어 시작이 쉽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다.
오늘도 모르는데 내일을 알겠느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씨는 “오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일을 알겠느냐”는 말을 자주 했다.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그렇기에 제주에서 영원히 살 거라고 장담하진 못한다. 그는 아직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제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육지에서 제주로 들어온 자유로운 영혼들의 삶의 방식을 알고 싶다고 했다. 나만의 삶을 방식을 찾기 위해서란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며 그가 한 결심은 ‘오픈마인드’가 되자는 것이었다. “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되면 좋겠어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요.”
제주=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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