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민의 지원으로 성장 발전한 현대차그룹이 이제는 주주는 물론 종업원, 비정규직, 중소 협력업체 등을 도와 대주주·회사·국가 3자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경영을 해야 한다.”
현대차 최고경영자 출신인 이계안 전 민주당 의원은 현대차가 이제 국가경제의 장자 노릇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지금은 그 구실을 제대로 못해 ‘과락’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 전 의원은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고 적정 납품단가를 보장하려면 현대차 경영진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조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그는 또 한국 재벌 체제의 해법으로 소유-경영 분리를 통한 대주주와 전문경영인 간 파트너십 구축을 제시했다.
이 전 의원은 현대차 사장과 현대캐피탈·카드 회장을 지냈다. 2004년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가, 2007년 대선 패배 뒤 정치적 책임을 이유로 총선에 불출마했다. 이 전 의원은 내년 19대 총선에 옛 지역구인 서울 동작을에서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동작을은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의 지역구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아들인 여당의 거물 정치인과 정 회장을 보좌했던 전문경영인 출신의 재벌 개혁 주창자 간의 한판 승부가 벌어질지 벌써 주목된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10년간 큰 발전을 했다는 평가가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 발전이 대주주·현대차·국가 3자에게 모두 이익이 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장남을 대학 교육시키려고 다른 형제들이 모두 희생했다. 그렇게 해서 장남이 출세하면, 당연히 다른 형제들과 조카들을 도왔다. 현대차의 성공도 혼자 잘해서 된 게 아니다. 정부와 국민의 지원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현대차가 도와야 할 때다.
‘현대차의 국가경제 장자기업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차가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았나.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로 큰 위기를 맞았을 때 정부의 고환율(원화가치 하락) 정책으로 버틸 수 있었다. 현대차와 삼성전자처럼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기업들은 천문학적 지원을 받은 셈이다. 또 정부가 1998년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를 승인해 한국 자동차산업은 독과점 체제가 됐다. 현대차는 사실상 자동차 가격의 결정권을 쥐게 돼 많은 이익을 얻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경우도 현대차를 위해 농민들을 희생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현대차가 장자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국가경제적으로 제일 큰 문제는 일자리인데, 현대차가 이와 관련해 높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 것 같다. 기아차 인수 이후 현대차의 생산능력은 2배 이상 커졌는데, 국내에 새로 지은 공장은 하나도 없고 모두 해외 공장이다. 그나마 기존의 국내 공장 일자리도 자동화로 인해 단순노동으로 전락했다. 비정규직 양산이나 노사 갈등도 아쉬운 대목이다.
민주당이 최근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43개 정책 과제와 10대 핵심 과제를 발표했다. 현대차에 직간접적으로 해당되는 것을 살펴보니 총수가 계열사 간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후진적 지배구조, 일감 몰아주기, 불합리한 납품단가 인하,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노사 갈등 등 무려 8개에 이르더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나. 정치권에서 이런 개선 요구까지 나오는 현실을 고려하면, 현대차는 사실상 50점도 안 되는 과락 점수다.
대기업이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경쟁력을 높이려면 부품업체들에 적정 이익률을 보장하라는 주장은 이상론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그렇게 얘기하면 곤란하다.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한 뒤 플랫폼 통합과 부품 모듈화를 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대형 부품업체들은 계열화되고, 나머지는 2차 이하로 밀려나 중간관리자인 현대모비스로부터 납품단가 인하 압력을 받았다. 모비스의 이익률이 다른 부품사들보다 왜 높은지 생각해야 한다. 또 현대제철이 종합제철소를 짓고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데 들어간 수조원의 돈은 어디서 난 것인가? 적정 이익률이 보장돼야 협력업체도 연구·개발을 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줄 수 있다.
현대차와 부품업체가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은.
현대차가 협력업체를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인정해서, 자신은 갑이고 납품업체는 을이라는 인식과 문화를 바꿔야 한다. 현대차는 경영 실적이 사상 최대라고 자랑하기보다, 부품업체들의 실적이 개선되고 정규직-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가 해소됐다는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차의 노사 문제는 회사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노사 간 불신은 1998년 (1만 명의)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의 후유증이다. 회사는 노조가 무서우니까 숙련공이 없어도 자동차사업을 잘할 수 있도록 설비 자동화와 부품 모듈화 위주의 생산 방식을 구축했다. 또 (인력 구조조정을 쉽게 하려고) 비정규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이런 체제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의문이다. 자동차산업은 숙련공이 로열티를 가지고 일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사내하청 문제는 대법원에서 불법 판결이 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해결의 기미가 없다.
회사뿐만 아니라 노조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이 많다.
정규직 노조도 크게 각성해야 한다. 정규직 노조가 희생해야 하는데 기득권 유지에 급급해 비정규직과의 연대 정신을 잃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의 고용 안정을 위해 현대차 노사가 담합한 결과다. 지금 상태에서는 정규직 노조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현대차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노사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데, 해법은 무엇인가.
노사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정부·사용자·노동자 3자 간에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현대차는 2001년 자동차전문그룹을 표방했다. 이후 자동차뿐만 아니라 부품·소재·금융·물류 등 관련 업계의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과거 포드 사례와 유사하다. 포드는 자동차 외에도 타이어·제철소·조선소·해운·고무농장까지 영위하다 경쟁력을 상실했다. 직접 생산하는 부품의 가격이 외부에서 사는 가격보다 더 비쌌기 때문이다. 현대차도 고무농장과 타이어를 빼면 다 있는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자동차 관련업뿐만 아니라 건설·정보기술(IT)·레저·광고업 등 다른 업종에도 광범위하게 진출했다. 외형상 다른 재벌과 차이가 없다.
대그룹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계열분리와 함께 광고사를 매각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이노션이라는 광고사를 새로 설립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이석채 경제수석이 일관제철소 건설에 반대하며 한 얘기가 있다. 오비맥주가 하이트에 1위자리를 내준 이유는 광고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산은 계열사인 오리콤에서 오비 광고를 제작해 경쟁력이 떨어졌다. 반면 하이트는 외부의 여러 광고사들을 경쟁시켜 가장 좋은 광고를 선택했다.
계열사의 순환출자에 의존하는 현대차의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법은.
최선은 아니지만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소유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현재의 순환출자 구조는 총수의 지배를 위해 회삿돈으로 다른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는 것이다.
재벌의 오너 경영 체제에 대한 생각은.
오너 경영에 반대하지 않는다. 대신 오너가 룰을 지켜야 한다. 대주주의 역할은 시장에서 검증된 훌륭한 전문경영인을 발굴하는 것이다. 미국에도 가족 경영을 하는 기업들이 있다. 세계적 화학업체인 듀폰은 오너 자제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지만 절대 맡기지 않는 자리가 있다. 바로 회사의 기술개발을 책임지는 최고기술책임자(CTO)다. 기술이 핵심 경쟁력인 듀폰은 그 자리만은 시장에서 검증된 최고를 뽑아 앉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인가.
그렇다.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이 경쟁할 게 아니라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외환위기 때 기업들의 부실을 해결하려고 160조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갔다. 재벌이 사상 최대 이익이 나면 나의 것이라 하면서, 부실이 생기면 정부와 국민에게 손 벌리고, 사회책임은 정부 몫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와 현대건설의 부실을 대주주들이 모두 책임지라고 했으면, 오늘날 현대차그룹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재벌 총수들이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2·3세에게 경영권을 승계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정주영·이병철 같은 창업주는 타고난 분들이다.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좋은 음악대학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만인을 감동시키는 세계적 음악가가 될 순 없다. 재벌 2·3세에게 잘한다 못한다는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전문경영인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면 된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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