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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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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흔들려도 웃으며 가자

대지진 피해 입은 이바라키현 조선초중고급학교… 재앙에 울고 일본 정부의 차별에 또 울어도 의연한 조선학교 사람들
등록 2011-09-07 10:30 수정 2020-05-02 19:26

도쿄 우에노역에서 출발한 JR특급열차는 동북쪽으로 달려 1시간10여 분 만에 이바라키현의 주도 미토시에 도착했다. 지난 8월23일 오전, 미토시는 평온했다. 역내 쇼핑몰은 젊은이들로 북적였고, 버스와 택시는 연방 손님을 싣고 내렸다. 진재(震災)의 피해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공식 지원 없어

» 학교 강당 옆 벽면에 인근 도호쿠와 후쿠시마 조선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해외 각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이 보내온 격려의 편지와 글이 빽빽하다. 한겨레21 오승훈

» 학교 강당 옆 벽면에 인근 도호쿠와 후쿠시마 조선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해외 각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이 보내온 격려의 편지와 글이 빽빽하다. 한겨레21 오승훈

하지만 진앙지 후쿠시마에서 약 120km 떨어진 이바라키현도 도호쿠 대지진의 재앙을 피할 순 없었다. 외신은 이바라키현에서만 19명이 사망하고, 41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가옥 85동이 전파되고, 가옥 및 건물 784동이 반파됐다. 재일동포들의 피해도 잇따랐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중앙긴급대책위원회는 이바라키현에서만 재일동포 2명이 숨지고, 가옥 11동이 반파됐다고 집계했다. 점포 및 사무실 54곳이 전괴되거나 반괴됐다. 이런 재일동포의 가옥과 점포의 피해 규모는 후쿠시마보다 큰 경우에 해당한다. 지진은 시작에 불과했다. 평상시의 100~300배에 달하는 5.0~15.8마이크로시버트(μSv)의 방사능이 이바라키현에 끼쳐왔다.

» 이바라키현 조선초중고급학교 김영렬(왼쪽) 김리옥 학생. 한겨레21 오승훈

» 이바라키현 조선초중고급학교 김영렬(왼쪽) 김리옥 학생. 한겨레21 오승훈

인근 도호쿠 조선초중급학교와 후쿠시마 조선초중급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진학하는 이바라키 조선초중고급학교(이하 이바라키 조선학교)도 대지진 때 건물벽에 금이 가 유리창이 깨지고 강당 지붕이 내려앉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최인태 교장은 “우리가 입은 피해는 도호쿠나 후쿠시마 조선학교에 비하면 작은 편”이라며 “우리가 아프다고 말할 계제가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피해 규모로 보면 후쿠시마 다음으로 이바라키현이 크지만, 큰 학교로서 동생 격인 도호쿠나 후쿠시마 조선학교를 도와줘야죠. 학생들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상급학교로서 더 큰 피해를 입은 학교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래도 피해 복구는 남의 몫이 아닐 터. “지진이 일어난 뒤 한 달간 학생과 선생들 모두 죽자고 복구 공사를 했어요. 4월10일로 예정된 입학식에 맞추기 위해서였어요. 이 학교에 올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지진 피해 입은 학교인 걸 모르게 하고 싶었거든요. 모두 안심할 수 있게요.” 복구 과정에 일본 정부는 없었다. “일본 정부의 공적인 지원은 하나도 없었어요. 좋을 때면 모르겠는데 어려울 때 지원을 끊은 거죠. 우리도 힘든데 더 큰 피해를 입은 도호쿠나 후쿠시마 조선학교들은 일본 정부의 지원도 없이 얼마나 힘들지 걱정입니다.” 일본 정부의 지원에는 소외됐지만, 재난 당시 조선학교들은 지역사회에서 대피소 구실을 했다.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후쿠시마와 이바라키현의 조선학교에서 재난을 피했다. 공식 대피소로 등록되지 않아 정부 구호물자 배급에서 누락됐다가, 현지 주민들의 반발로 배급이 이뤄지기도 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최인태 교장은 동포사회의 도움과 격려를 꼽았다. “다들 어려운 상황인데도 선뜻 도움을 준 일본 지진피해 조선학교 지원모임인 ‘몽당연필’과 한국의 시민사회에 감사합니다. 종군위안부이던 할머니도 성금을 보내주셨다는 얘길 듣고 촌스러울 수 있지만 이것이 핏줄인가라고 느꼈습니다.”

재앙 뒤에도 계속되는 삶

이바라키 조선학교에는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급부가 47명, 중급부 15명, 초급부 22명 등 모두 88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도호쿠와 후쿠시마 등 지진의 직접적 피해 지역이 고향인 고급부 재학생은 모두 6명이다. 미야기현이 고향인 김영렬(17·고급 2년)군은 “지진이 일어날 때 학교 체육관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흔들려 이러다 죽겠구나라고 생각했다”며 “미야기현에 쓰나미가 덮쳤다는 뉴스를 보고 부모님께 연락했는데, 2주 동안 연락되지 않아서 마음을 졸였다”고 어렵게 말을 이었다. 최근 김군은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을 찾았다. “모교인 도호쿠 조선초중급학교에 가서 복구활동을 거들었어요. 학교 건물과 살던 동네가 모두 부서져 가슴이 아팠어요.” 김군은 또 “여동생이 아직 도호쿠 조선학교를 다니는데 모교가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슬프다”고 덧붙였다. 김군은 “중국 학교나 미국 학교는 지원을 받는데, 왜 조선학교만 지원을 못 받는지 화가 난다”며 “동생들이 다니는 학교를 우리가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사능 공포는 없을까. 지난 8월12일 미토시가 측정한 학교 주변의 방사능 수치는 최고 0.13μSv였다. 평상시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김군은 “학교에서 비를 직접 맞지 말고 웅덩이를 피하라고 알려줘서 그렇게 하고 있다. 다들 괜찮다고 해서 별 걱정은 안 한다”라고 말했다.

도호쿠 조선초중급학교에서 대지진을 겪은 김리옥(16·고급 1년)양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나는지 몸을 떨었다. “동무들과 졸업식을 앞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렸어요. 급한 마음에 어린 동무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오려 계단으로 갔는데 갑자기 계단에 금이 가는 거예요. 무서운 마음에 기어서 계단을 내려왔어요. 거의 5분 동안 건물이 크게 흔들렸어요. 운동장에 엎드려 아직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은 동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어요.” 재앙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김양은 지진 이후의 생활을 말하다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지진 이후의 삶이 힘들었어요. 물도 전기도 안 나오고, 몇 시간씩 줄 서서 음식을 받아먹었어요. 2시간을 걸어서 오빠와 물을 길어다 먹고, 해가 지면 계속되는 여진에 가족끼리 부둥켜안고 울면서 새우잠을 잤거든요.”

김리옥양은 “지진보다 더 힘든 건 일본 정부의 차별”이었다며 “현지에서는 일본인, 조선인 구분 없이 서로 나누고 도왔는데 일본 정부는 우리를 조선인이라고 다르게 대했다”고 말했다. 김양은 “일본 정부가 차별해도 우리를 돕는 동포들이 있으니 다 잘될 것”이라며 오히려 기자를 다독였다.

고인 물 속의 붕어들처럼

학교 강당 옆 벽면에는 인근 도호쿠와 후쿠시마 조선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해외 각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이 보내온 격려의 편지와 글이 빽빽하게 붙여 있다. 지진 피해를 입은 조선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오는 9월22일 도호쿠 조선학교에서 열리는 대운동회 알림도 있다. 문득 지진 피해 조선학교의 슬로건 “대지는 흔들려도 웃으며 가자”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붕어가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신다"고 중국 작가 루쉰이 말했던가. 도호쿠를 비롯한 후쿠시마·이바라키 조선학교들은 그렇게 마른 침으로 서로를 적시며 의연하게 어려움을 견뎌내고 있다.

이바라키현=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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