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0년간 나를 지켜준 따뜻한 불빛

상경한 남매가 겨우 구한 안식처, 반지하 전세방…1996년부터 2006년까지 전세금을 한 번도 올리지 않은 할머니
등록 2011-06-09 11:45 수정 2020-05-03 04:26

2등 강연진

»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방을 구할 수 없었다. 넓은 마당과 봄볕을 한껏 먹은 뒷마루가 있던 시골집을 떠나 서울로 유학 온 우리 남매에게 자신의 몸을 내줄 방은 휘황찬란한 서울 한복판에는 정말이지 없을 것만 같았다. ‘어머, 방이 뭐가 이렇게 좁아? 도저히 살 수 없어’라고 짜증을 내어본들, 그건 우리 자신에게 건네는 자위와 같은 것. 좁다고 짜증냈던 방들조차 우리 부모가 가진 돈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연애도 꿈도 주눅들어 있던 1996년 11월이었다.

악취, 소음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연년생인 우리 남매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 거주 연한이 다해가서 우리는 각자의 학교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가난한 부모님이 융통할 수 있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절망과 짜증, 분노를 여러 차례 오간 끝에 우연히 회기동 시장 골목 다세대주택의 지하방을 발견했다. 방 2개, 거실 겸 부엌, 화장실이 있는, 우리가 찾던 집이었다. 가느다란 햇빛 한 줄기만이 창살 사이로 내리꽂히는 지하방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시골 부모님께서 어떻게 해서든지 마련할 수 있다고 한 금액과 똑 떨어지는 아주 마음에 드는 방이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부부가 1층에, 아들 하나를 둔 중년 부부가 2층에, 그리고 1층에서 계단 5개를 내려가면 나란히 붙은 문 2개 중 하나의 문을 열고 우리가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학교 앞 자취방이라는 게 대개 그러하듯, 수많은 청춘이 드나들면서 깨끗하던 벽지와 장판은 청춘의 불안과 외로움을 실은 담배 연기, 술과 라면 냄새로 누렇게 변해갔다. 새벽에 술 마시고 대문을 두드리는 친구, 애인과 헤어지고 무작정 찾아온 친구, 옆집 담을 넘다 옆집 아저씨에게 잡힌 친구, 서울에 취직해서 올라온 고향 친구, 엄마와 싸우고 집 나온 친구…. 수많은 사람이 갖은 사연으로 자취방을 찾아왔고, 그만큼의 다양한 일들이 그 방에서 일어났다. 밤낮없이 드나드는 사람들, 땅과 눈을 맞춘 창가에서 올라오는 악취를 새벽같이 집 주변을 청소하시는 주인 할머니가 모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조용히 하라’는 말 대신 물 새는 바닥을 고쳐주셨고, 계단 층계에 새로 등을 달아주셨고, 소나기가 내리면 골목에 걸어놓은 빨랫감을 챙겨주셨고, 대문 앞 거리에서 마주치면 시골 부모님 안부를 물어주셨다. 기름보일러를 가스보일러로 교체해주셨고, 집 주변을 꼼꼼하게 정리해주셨다.

남매를 아는 모든 이가 숨어드는 동굴…

그러는 동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주인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집 근처 서점과 레코드 가게는 문을 닫고 150만원이던 대학 등록금은 30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많은 것이 변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도 졸업을 하고 취직했다. 이제 지상으로 가고 싶었고, 2006년 11월 그 집을 떠났다. 할머니는 10년 전 우리가 드린 전세금 2천만원을 다시 주셨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전세금 2천만원.

할머니도 전세금을 올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보일러를 교체할 때, 계단을 싹 수리할 때, 전국의 전세금이 오른다는 뉴스를 보실 때마다 고민하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할머니는 1996년 1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처음 전세계약서를 작성하고 전세금을 드린 이후, 단 한 번도 돈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10년 동안 전세금 얘기를 하지 않으신 할머니 덕택에 우리 부모는 2년마다 동동거리며 돈을 구하러 다니는 수고를 덜 수 있었고, 우리 남매를 아는 모든 이들은 지칠 때마다 숨어들 수 있는 동굴을 가질 수 있었으며, 우리는 모진 서울살이를 견딜 수 있었다.

천정부지로 솟는 대학가 집값과 ‘아줌마 정’은 옛말이라는 요즘, 하숙집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학생들 잘돼서 나가 너무 기쁘다며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시던 회기동 주인집 할머니가 생각난다. 근처에 갈 일이 있어 밤늦게 그 집을 찾아가봤다. 우리가 살던 방에 불이 켜졌다. 또 누군가가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천사 할머니를 찾아가다

“누구한테 나가라고 한 적이 없어”

옛집으로 가는 길에 들른 과일가게 할머니도 그대로다. “저기 저 댁 할머니 계실까요?” 참외를 사며 강연진씨가 물었다. “어, 이 시간이면 계시겠지.” 지난 6월1일, 서울 회기동 옛집을 강씨와 함께 찾았다. “할머니, 저 지하에 살던 학생인데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알지, 그럼. 어여 들어와.”
강연진 ‘학생’이 ‘교사’가 되고 ‘엄마’가 돼서 옛집을 찾았다. 강씨는 서울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첫아이를 낳고 휴직 중이다. 옛집의 주인도 변화를 겪었다. 반세기를 넘게 해로한 남편이 세상을 떴고, 할머니는 사고를 당했다. “학교 운동장으로 새벽 운동을 나갔는데, 어떤 여자가 느닷없이 밀어서 뒤로 넘어졌지. 정신을 잃고….” 그렇게 4년 전에 당한 사고로 허리가 불편하지만, 할머니는 손녀 같은 강씨를 보자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열아홉에 시집온 연은례 할머니는 70년 가까이 회기동에 살면서 여든일곱을 맞았다. 할머니는 “엄마도 잘 계시지? 보고 싶은데…”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일흔이 넘은 강씨의 어머니는 아직도 경북 봉화에서 아흔이 넘은 시어머니를 모신다. 연씨 할머니도 일흔이 되도록 시어머니 수발을 들었다. 강씨는 “할머니가 우리 엄마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셔서 더 잘해주셨나 보다”고 말했다.
“할머니, 학생들이 예뻐서 10년 동안 전세를 안 올리셨나 봐요?” 할머니는 나지막이 “누구한테 나가라고 해본 적이 없어”라고 답했다. 할머니 가족은 1988년 대지 32평에 한옥을 허물고 2층 양옥을 올려서 지금껏 살고 있다. 강씨가 여기에 살 때 2층에 전세를 살았던 가족도 의정부에 집을 사서 떠났다. 강씨도 남동생이 은행에 취직해 대출받을 여유가 생기자 지하방을 떠났다. “동생들은 어떻게 지내?” “남동생은 결혼했고요, 여동생도 곧 해요.”
남편이 은행에서 평생을 일했고, 알뜰히 산 덕분에 아쉬운 살림은 아니다. 할머니는 웃으며 “죽을 때까지 밥 걱정은 없이 살지”라고 말한다. 지금도 할머니 집에서 걱정을 덜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형편이 어려운 막내아들 친구에겐 세를 따로 받지 않고 지하방을 내주었다. 덕분에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아들이 1명 더 생겼다. 마침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 지하방의 막내아들이 지붕을 고친다고 거실을 지나갔다.
“처음에 집 보러 올 때 작은엄마하고 같이 왔잖아.” 강씨도 어렴풋한 일을 할머니가 기억했다. 10년을 살았던 집에는 남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무리 늦은 밤에 열쇠를 달라며 문을 두드려도 싫은 기색을 하지 않던 할머니는 “아직도 열쇠 꾸러미 중 하나에 ‘학생방’이라고 돼 있을걸”이라고 했다. 집을 나서는 강씨에게 할머니는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