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등 강연진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방을 구할 수 없었다. 넓은 마당과 봄볕을 한껏 먹은 뒷마루가 있던 시골집을 떠나 서울로 유학 온 우리 남매에게 자신의 몸을 내줄 방은 휘황찬란한 서울 한복판에는 정말이지 없을 것만 같았다. ‘어머, 방이 뭐가 이렇게 좁아? 도저히 살 수 없어’라고 짜증을 내어본들, 그건 우리 자신에게 건네는 자위와 같은 것. 좁다고 짜증냈던 방들조차 우리 부모가 가진 돈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연애도 꿈도 주눅들어 있던 1996년 11월이었다.
악취, 소음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연년생인 우리 남매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 거주 연한이 다해가서 우리는 각자의 학교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가난한 부모님이 융통할 수 있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절망과 짜증, 분노를 여러 차례 오간 끝에 우연히 회기동 시장 골목 다세대주택의 지하방을 발견했다. 방 2개, 거실 겸 부엌, 화장실이 있는, 우리가 찾던 집이었다. 가느다란 햇빛 한 줄기만이 창살 사이로 내리꽂히는 지하방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시골 부모님께서 어떻게 해서든지 마련할 수 있다고 한 금액과 똑 떨어지는 아주 마음에 드는 방이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부부가 1층에, 아들 하나를 둔 중년 부부가 2층에, 그리고 1층에서 계단 5개를 내려가면 나란히 붙은 문 2개 중 하나의 문을 열고 우리가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학교 앞 자취방이라는 게 대개 그러하듯, 수많은 청춘이 드나들면서 깨끗하던 벽지와 장판은 청춘의 불안과 외로움을 실은 담배 연기, 술과 라면 냄새로 누렇게 변해갔다. 새벽에 술 마시고 대문을 두드리는 친구, 애인과 헤어지고 무작정 찾아온 친구, 옆집 담을 넘다 옆집 아저씨에게 잡힌 친구, 서울에 취직해서 올라온 고향 친구, 엄마와 싸우고 집 나온 친구…. 수많은 사람이 갖은 사연으로 자취방을 찾아왔고, 그만큼의 다양한 일들이 그 방에서 일어났다. 밤낮없이 드나드는 사람들, 땅과 눈을 맞춘 창가에서 올라오는 악취를 새벽같이 집 주변을 청소하시는 주인 할머니가 모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조용히 하라’는 말 대신 물 새는 바닥을 고쳐주셨고, 계단 층계에 새로 등을 달아주셨고, 소나기가 내리면 골목에 걸어놓은 빨랫감을 챙겨주셨고, 대문 앞 거리에서 마주치면 시골 부모님 안부를 물어주셨다. 기름보일러를 가스보일러로 교체해주셨고, 집 주변을 꼼꼼하게 정리해주셨다.
남매를 아는 모든 이가 숨어드는 동굴…
그러는 동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주인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집 근처 서점과 레코드 가게는 문을 닫고 150만원이던 대학 등록금은 30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많은 것이 변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도 졸업을 하고 취직했다. 이제 지상으로 가고 싶었고, 2006년 11월 그 집을 떠났다. 할머니는 10년 전 우리가 드린 전세금 2천만원을 다시 주셨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전세금 2천만원.
할머니도 전세금을 올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보일러를 교체할 때, 계단을 싹 수리할 때, 전국의 전세금이 오른다는 뉴스를 보실 때마다 고민하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할머니는 1996년 1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처음 전세계약서를 작성하고 전세금을 드린 이후, 단 한 번도 돈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10년 동안 전세금 얘기를 하지 않으신 할머니 덕택에 우리 부모는 2년마다 동동거리며 돈을 구하러 다니는 수고를 덜 수 있었고, 우리 남매를 아는 모든 이들은 지칠 때마다 숨어들 수 있는 동굴을 가질 수 있었으며, 우리는 모진 서울살이를 견딜 수 있었다.
천정부지로 솟는 대학가 집값과 ‘아줌마 정’은 옛말이라는 요즘, 하숙집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학생들 잘돼서 나가 너무 기쁘다며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시던 회기동 주인집 할머니가 생각난다. 근처에 갈 일이 있어 밤늦게 그 집을 찾아가봤다. 우리가 살던 방에 불이 켜졌다. 또 누군가가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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