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기업홍보의 볼모로 잡힌 애향심

지역 연고제로 성공한 한국 프로야구,
연고 도시 대신 기업명이 구단 이름 앞에 오는 이유
등록 2011-04-07 15:24 수정 2020-05-03 04:26

미국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에 동시에 관심이 많은 야구팬이라면 두 리그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안다.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 이름 앞에는 ‘뉴욕 양키스’나 ‘보스턴 레드삭스’처럼 지역명이 붙는다. 반면 한국 프로야구 구단은 1982년 리그 창설 이후 지금까지 구단 이름 앞에 계속 기업명을 앞세웠다.

3월31일 오후 경남 창원 컨벤션센터에서 ‘엔씨소프트 제9구단 창단 승인식’이 열렸다. 연합

3월31일 오후 경남 창원 컨벤션센터에서 ‘엔씨소프트 제9구단 창단 승인식’이 열렸다. 연합

애향심 이용하면서 지역명은 열외로

그저 야구가 좋아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부산 팬이 ‘롯데’를 외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OB 베어스가 두산 베어스로 구단명을 바꾸면 베어스 팬도 덩달아 ‘OB 팬’에서 ‘두산 팬’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LG 트윈스 팬도 마찬가지다. 이해할 수 없는 감독 교체와 핵심 선수 방출 등 LG 출신 구단 관계자의 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팀의 정체성과 별 관계가 없는 ‘LG’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광주에서 맹목적으로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것처럼 부산에서 무조건 롯데 자이언츠를 부르짖는 것은 사실 논리적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광주 사람이고 부산 사람이니까 타이거즈와 자이언츠를 좋아하는 것이 ‘진리’로 통했다. 지역감정이 사회 각 분야에서 부작용을 낳는 것이 사실이지만, 프로야구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지역감정은 각 팀 간 라이벌 관계 설정에 나름의 구실을 했다.

한국 프로야구가 30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에도 대표적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렇듯 지역 연고제의 성공적 정착에 있었다. 각 구단의 마케팅 노력만으로 프로야구가 여기까지 이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정도라면 미국 메이저리그나 프로축구 K리그의 사례를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팀 이름 앞에 기업명 대신 연고 지역을 넣거나, 적어도 지역과 기업명을 함께 쓸 이유는 충분하다.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각 구단 홈페이지나 유니폼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LG 트윈스는 서울 팬에게 ‘서울의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표방하면서도 홈페이지에는 ‘LG는 사랑입니다’라며 큼지막한 기업 광고만 노출하고 있다. 두산 베어스나 삼성 라이온스, 롯데 자이언츠, 기아 타이거즈 등 다른 구단의 홈페이지도 마찬가지다.

유일한 예외는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후발주자인 넥센 히어로즈다. 히어로즈의 공식 이름은 ‘넥센 히어로즈’지만 기업명이 들어간 구단 이름 못지않게 ‘넥센 서울 히어로즈’ 혹은 ‘서울 히어로즈’라는 이름을 활발히 활용하고 있다. 히어로즈의 경우 이미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가 양분하고 있는 서울에 세 번째로 뛰어들었다는 약점 때문에 전략적으로 ‘서울’을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서울 시민에게는 어쨌든 반가운 변화다.

엔씨소프트는 창원 정체성 반영할까

3월31일 한국야구위원회와 승인식을 갖고 공식 출범한 ‘제9구단’ 엔씨소프트 야구단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고 지역인 창원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출범했고, 창원 시민의 사랑도 절대적이다. 새롭게 프로야구에 뛰어드는 신생 구단인 만큼 ‘엔씨소프트 창원’이나 ‘창원 엔씨소프트’ 등 창원의 정체성을 반영한 이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역 여론도 상당하다. 난관은 엔씨소프트가 창원만이 아닌 경남 전체, 그리고 부산 팬까지 공략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윤진원 엔씨소프트 홍보팀장은 “구단명은 지역 주민의 여론과 4월11일부터 시작하는 인터넷 공모 등을 통해 최대한 많은 의견을 들어본 뒤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