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3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수도 아부다비 알무슈리프궁. 이명박 대통령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UAE 대통령이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나라가 10억 배럴에 이르는 중동 지역 유전 개발에 참여하는 내용을 담은 양해각서에 서명하는 자리였다. 이 대통령은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계약 성공을 위해) 007 작전을 벌였다”고 자평했다. 는 유전 개발을 두고 우리나라가 “‘꿈의 지역’에 뛰어든다”고 보도했다.
UAE 환심 사려 아등바등하는 이유
바로 다음날, UAE는 민주화 시위가 번지고 있는 바레인에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 500명을 파견했다. 셰이크 압둘라 빈 자이드 UAE 외무장관은 지난 3월14일 프랑스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시위 안정과 질서 유지를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압둘라 빈 자이드 외무장관은 할리파 빈 자이드 대통령의 이복동생이다. 사우디아라비아도 같은 날 군인 1천 명을 바레인으로 급파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UAE 모두 민주화의 불길이 자국에까지 번질까 전전긍긍했다.
주변 국가의 측면 사격에 힘입은 바레인 정부는 3월15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곧 시위대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됐다. 바레인 수도 마나마의 중심지에 위치한 ‘진주광장’ 바닥에는 피가 튀기 시작했다. 등 외신들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지난 3월21일까지 시민 4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바레인의 야당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시민 95명이 실종됐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에서도 보다 못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3월17일 “바레인 정부의 강경진압이 국제법을 위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에서도 쓴소리가 나왔다. 마크 토너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3월18일 “바레인 정부가 체포한 야권 인사들의 안전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정부에서는 아직까지 관련한 논평이 나오지 않고 있다. 외교통상부에 전화를 해보았다. 대변인실 관계자는 “바레인 민주화 시위에 관한 논평은 준비된 바 없다”고 말했다.
외교부의 대변인 논평은 외국 정세에 대해 수시로 발표되는 편이다. 올해 들어서도 남부 수단의 주민 투표 진행과 결과를 두고 두 차례에 걸쳐 긍정적 평가를 하는 성명을 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하야에 대해서도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가 실시되기 기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바레인의 강경 진압이 시작된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오래 입을 다물었다.
“한국 건설회사들이 정부 보증을 배경 삼아 중동에서 고층 건물부터 원전까지 수주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상업적인 이유 때문에, 한때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시위를 벌인 경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이 중동 민중의 운동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영국우리나라 정부의 침묵 이면에는 한-UAE 사이의 끈끈한 경제적 유대관계가 있다. 110조원에 이르는 중동 유전 개발사업뿐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표적 치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가 다름 아닌 UAE에 건설될 예정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UAE의 원전 건설 사업을 수주했다고 밝혔다. 결국 현 정부의 대표적인 치적 2건은 UAE 현 정부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자칫 UAE 정부에 밉보일 경우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UAE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까지 파병했다. 특전사 장병 130명으로 구성된 ‘아크 부대’는 UAE 아부다비 알아인에 주둔하고 있다. UAE 특수전 부대에 대한 교육·훈련 지원, 연합훈련 및 유사시 우리 국민 보호 임무 등을 맡고 있다. 게다가 유전 개발은 정식 계약이 아니라, 법적 구속력이 없는 ‘약속’ 수준인 양해각서만 맺었다. 우리 정부가 더욱 UAE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화수분’ 놓칠세라 소극적 대응
UAE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적잖다. 우선 UAE는 2009~2010년 우리나라 건설업계 해외 수주액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다(표 참조). 우리나라가 전세계 국가들로부터 수주한 전체 계약 액수 가운데 UAE의 비중은 2009년과 2010년 각각 32.3%, 35.8%였다. UAE의 경제규모가 국민총생산 2397억달러로 우리나라(국민총생산 9863억달러)의 4분의 1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UAE와 한국 건설업 사이를 잇는 끈끈한 연을 무시할 수 없다. 현지에서 진행되는 사업들을 보면, GS건설이 2009년 12월에 시작한 루와이스 정유공장 확장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공사 대금이 무려 31억949만달러에 이른다. 삼성엔지니어링이 지난해 5월부터 참여하고 있는 ‘샤 가스전 개발 프로젝트’도 값어치가 14억9586만달러다. UAE에서 진행되는 산업화에 실린 한국 자본의 지분은 이렇게 막대했다.
우리나라 정부의 ‘이유 있는’ 침묵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월 들어 리비아의 민간인 학살이 본격화한 이후에도 우리 정부는 오랫동안 과묵했다. 행정부가 처음 입을 뗀 때는 지난 3월22일이었다. 외교통상부는 대변인 논평을 통해 “리비아에 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73호를 채택하는 것을 지지한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유엔 안보리가 결의안을 내놓은 지 5일이 지난 뒤였다. 미국·영국·프랑스가 리비아 정부군의 군사기지에 폭격을 시작한 지는 3일이 지난 뒤였다. 열강들의 ‘합창 1절’이 끝난 뒤에야 우리 정부는 ‘뒷북’을 치는 모양새였다.
정부의 ‘슬로모션’은 역시 리비아와 맺은 끈끈한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리비아의 말 많은 지도자 카다피의 연설에서도 한국은 특별한 나라였다. 그는 지난 3월2일 국영 텔레비전 채널에 생방송된 연설에서 리비아에 대한 서구의 압박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사업 대상국을 중국이나 인도, 한국이나 브라질로 바꿀 수 있다”고 밝혔다.
해외건설협회가 작성하는 ‘해외건설정보종합서비스’를 보면, 리비아는 한국 건설 업계에도 소중한 파트너였다. 2009년 리비아 쪽 수주액은 31억달러를 넘어섰고, 2010년에도 20억달러를 육박했다. 1983년에 시작된 4천km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우리나라 해외 토목공사의 상징이었다. 리비아의 건설사업은 ‘화수분’이었다. 해외건설협회의 자료를 보면, 올해 들어서도 리비아에 20여 개 한국 건설사가 진출해 총 51건, 92억달러의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현대건설이 진행하고 있는 ‘트리폴리 웨스트 1400MW 발전소 공사’는 지난해 9월부터 4년을 공기로 진행되고 있다. 공사비가 13억5966만달러에 이른다.
한국 정부가 침묵을 지키자, 비판의 목소리가 바다를 건너왔다. 영국 일간지인 는 지난 3월21일 인터넷판 기사를 통해 우리나라 정부, 혹은 우리나라 전체를 비꼬았다. ‘한국으로 넘어온 트리폴리의 열기’라는 제목의 기사는 “한국 건설회사들이 정부 보증을 배경 삼아 중동에서 고층 건물부터 원전까지 수주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며 “이런 상업적인 이유 때문에 한때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시위를 벌인 경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이 중동 민중들의 운동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또 “한국은 항상 국제 외교 무대에서 더 많은 발언권을 원한다고 하지만, 수출과 시장에 미칠 악영향을 걱정한 나머지 중동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 소극적이다”라고 지적했다. 돈벌이를 위해 다른 나라의 민주화 시위에는 눈감고 있다는 신랄한 야유였다.
중동 ‘구체제’는 한국의 소중한 친구?중동 지역의 정정 불안은 이미 한국 건설업계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해외건설협회의 자료를 보면, 올해 들어 지난 3월23일까지 국내 건설사들이 중동 지역에서 따낸 수주액은 54억달러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계약을 맺은 218억달러 규모 사업의 4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여기에 현대건설이나 대우건설 등 주요 건설사들은 리비아에 폭격이 잇따르자 건설 현장 인력 대부분을 철수한 상태다. 앞으로 공사 진행을 기약할 수도, ‘잔금’을 언제 받을지도 알 수 없다. 한국무역협회는 지난 3월23일에 낸 보고서에서 리비아 사태가 연말까지 장기화하면 수출 피해와 건설 수주 차질로 우리나라 기업이 16억달러의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민주화 불길이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까지 번지면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중동 민주화운동에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민주주의 바람에 저항하고 있는 중동 ‘구체제’에 이해관계를 엮고 있는 우리나라 경제계의 ‘불편한 진실’이 여기에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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